때는 지난 여름, 그 날도 역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마침 자리가 비어있어 냉큼 앉았고, 제 맞은 편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더랬죠.
어딜 다녀오셨는지 무척 지쳐 보이시는데다 앞에는 척 봐도 꽤 무게가 있어보이는 짐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여학생이 바로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다리를 꼰 채로 시끄럽게 통화를 하더군요.
입에서 어찌나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인상을 썼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며 큰 소리로 통화를 하덥니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의 큰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다음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차를 하면서 가장 자리가 남게 되었는데, 그 여고생... 그 가장자리에
앉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잠깐 자리배치를 보자면,
[문] [빈 가장자리] [할머니] [여고생]
[나(맞은편)]
이었죠. 빈 가장자리가 나기가 무섭게 여고생은 자리를 옮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더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친 할머니께서 몸을 지탱하시느라 한 손을 그 가장자리 끝머리에 놓고 계셨던겁니다.
사실상 그 외에 빈 자리는 수두룩했고, 제 보기에 여고생은 꼭 그 자리에 앉아야 할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도 여고생은 굳이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일어났고, 할머니의 손이 자기가 앉을 좌석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마구 변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너무 고단하고 지치신 터라 당신의 손이 삐져나왔다는 것조차 할머니께선 모르시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여고생은 이에 아랑곳 없이 할머니를 찢어질 듯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아예 막 가자는 식으로
그 자리에 털썩 앉아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할머니의 손이 여고생의 엉덩이에 깔렸고,
당황하신 할머니께선 아무 말 없이 손을 빼내시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고생이 할머니를 한 번 째려보더니 통화중인 이에게 한다는 말이,
"아 짜증나. xx 재수없어. 자리 넓은데 왜 혼자 차지하고 난리야. 짜증나게..."
이러는 겁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저는, 이를 악물고 여고생을 노려 보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머리통이라도
한대 후려쳐 주고 싶었지만, 더운 날 괜한 시비에 말릴까 싶어 불같은 화를 꾹꾹 눌러 참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건 아니다 싶고, 정말정말 화가 나더라구요.
나이는 새파랗게 젊다 못해 파릇파릇 어린 것이, 감히.... 꼭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필이면 내려야 할 역이 되었고, 어쩌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할머니께서도 내리시려는지 주섬주섬 짐을 챙기셨고, 여고생은 혹여 그 움직임이 제게 닿을까
오만인상 다 찌푸리면서 더러운 거 피하듯 중얼중얼 댑니다.
오냐, 너 잘 걸렸다.
혹여라도 반성하는 표정을 지으면 한 마디 못해 줄거 같아 걱정이었는데, 마지막까지 불을 당겨주니
되레 고맙더군요.
지하철 도착 음성이 나오고 문이 열리기 전 할머니께선 제가 내리는 문보다 한 칸 앞에 서셨습니다.
전 벌떡 일어나 여고생 앞으로 가서 조용히 말해 주었습니다.
"학생, 그렇게 살지 마.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꼭 거기 앉아야 해요? 할머니께서 고단하셔서
손 좀 놓고 계신 게 그렇게 잘못이에요? 그리고!!! 전화예절 안 배웠어요? 공공장소에서는 제 안방에서
떠들듯이 그렇게 깔깔 대는 거 아니에요!"
학원강사를 하면서 중학생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았던 터라, 여고생에게도 특별히 말을 높여
주었습니다. 반말을 하면, 그 기분 나쁜 것만 생각해서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을테니까요.
갑작스러운 저의 공격에 여고생은 뻥찐 표정이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쌤통이나 싶었던지
큭큭 대덥니다.
전 씩씩거리면서 문 앞에 섰습니다. 통화를 시끄럽게 한 것은 둘째치고, 할머니를 더러운 사람
취급하듯 인상쓰면서 싹퉁머리 없게 굴었던 게 너무너무 화가 났거든요.
여하튼 그렇게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니 반사적으로 할머니께 시선이 가더라구요.
아니나 다를까 무거운 짐짝을 든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시는데, 괜히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사람들이 무척 많이 왕래하는 역인데, 무심하게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더군요.
물론 다들 나름대로의 사정들이 있으셨겠지만, 그냥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전 후다닥 다가가 "할머니, 제가 들어드릴게요." 했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고단하신 표정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던 할머니께서 웃으시며,
"아유, 고마워요."
하시덥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도저히 할머닐 앞질러 갈 수가 없었거든요.
게다가 할머니께선 무릎이 아프신지 걸음을 옮기는 것초자 힘겨워 보이셨습니다.
가방과 짐을 제게 모두 맡기셨음에도 한 팔로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시는 모습은 여전히 마음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가방은 어깨에 메고, 할머니의 짐과 가방 역시 한 손으로
몰아 들고, 할머니를 부축했습니다. (헉... 무거워서 다음 날 팔 한 쪽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ㅋ)
그러자, 저를 올려다 보시며 하시는 말씀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짐도 무거울텐데.... 고마워서 어째.. 미안해서 어째..."
제 손을 만지작 만지작 토닥이시며 말씀하시는데 순간 울컥해 버렸습니다.
고마워하면서도 그만큼이나 미안해하시는 말투와 표정이 어찌나 가슴 아프던지...
결국 그날 혼자라면 일 분 만에 왔다갔다 할 계단을 장장 십 분에 걸쳐 오르고 내렸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관절에 무리가 가시는지, 이를 악물고 오르시고 내리시는 모습이
정말 마음 아팠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건 다름 아닌 할머니의 말씀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고마워... 요즘은 딸 같은 사람들도... 그냥 다 지나 가...... 학생처럼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 없어.. 정말..... 너무 고마워... 바쁠텐데 미안해.. 이 늙은이가 그냥 가라고 못하고, 이렇게
무거운 짐 들게 해서 미안허이.... 다리가 너무 아파서... 원래는 거절해야 하는데.... 거절 못하고...
오늘처럼 이렇게 계단이 편하기는 처음일거야....."
오르고 내리는 내내 고마워, 미안해를 반복하시는 할머니의 목 메인 음성에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난 결코, 착한 것도.. 마음*가 고운 것도 아닌데...
자꾸만 착하다고, 이쁘다고 칭찬해 주시는 할머니의 말씀에 괜히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 손녀딸 같다고 손을 만지작 거리시며 웃으시는데..... 그 인자한 미소에 그만 또 울컥... ㅠㅠ
어찌보면 사실 짐 들어 주는 거... 어렵지 않은 일인데, 사람들은 그냥 바람처럼 쌩쌩 지나가 버리는 거
같았습니다. 젊음을 과시라도 하는 걸까요...... 물론, 그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세상사 바쁜일 천지이고, 십 분 이십 분은 제쳐두고서라도, 일~이 분이 아까운 게 요즘 세상이니까요.
그러나 달리 보면, 그 일~이 분 시간을 소요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을까요. 몇 시간 봉사활동하는 것만큼이나 당신을 뿌듯하게 하리라는 걸, 제가 장담합니다.
어찌보면 제 만족을 위해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렸을지도 모를테지만, 어찌하였든.....
오늘처럼 편하게 계단을 오르내린 적은 없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심장에 박힌 기분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고맙다며 제 손을 꼬옥 잡아주시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남아 있는 것 같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여러분들께도, 이러한 행복이 함께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