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오리 엉덩이가 지나갈 때마다, 벼 포기가 상하지 않게 힘을 주어야만 했다. “오리 때문에 못살겠어요.”벼는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모른 체하는 농부가 원망스러웠다. 어느 날,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바람이 몹시 불고 비가 엄청 내렸다. 벼는 다른 논을 건너다 보았다. 논마다 사나운 흙탕물을 견디지 못한 벼들이 쓰러져 누워 있었다.
벼는 행복했다. 햇볕은 따스하게 내려 쪼이지, 논바닥의 물은 넉넉하지, 게다가 알뜰살뜰 보살펴 주는 농부 덕분에 벼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행복한 벼는 바람이 불어와 춤을 청하면 언제고 기쁜 맘으로 함께 춤을 추었다. 벼는 농부를 무척 좋아하였다.
“잘들 자라는구먼!”
농부가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신이 났다. 그래서 부지런히 거름을 찾아 뿌리를 뻗고 햇살 한 자락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 날, 벼를 살펴보던 농부가 말했다.
“이젠 오리를 넣어도 되겠군.”
농부는 논에 어린 오리들을 풀어놓았다.
“꽉꽉꽉꽉!”
“아이, 시끄러워라. 너희들 좀 조용히 살 수는 없니?”
벼는 불평을 하였다.
그런데 시끄러운 것보다 더 큰 일이 생겼다. 오리들이 논바닥의 풀을 뜯어 먹느라 벼의 뿌리까지 마구 쪼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오리들은 논바닥에 난 여리고 맛있는 풀을 뜯어 먹느라 넓적한 주둥이로 논바닥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풀을 뜯어먹고 나날이 몸집이 커지는 오리는 주둥이도 더 단단해져서, 벼의 괴로움은 늘어만 갔다. 벼는 농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행여 벌레가 먹을까, 거름이 모자랄까 눈여겨 살펴주고, 가뭄 땐 조금이라도 물을 더 먹이려고 이웃 사람들과 다투기까지 한 농부였는데….
“오리 때문에 못살겠어요. 제발 오리 좀 쫓아 주세요.”
벼는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모른 체하는 농부가 원망스러웠다.
벼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부는 여전히 해 뜨기 전에 찾아오고 해 진 다음에 논을 떠났다.
“어허허… 잘들 자라는구먼.”
올 적마다 그렇게 말했지만 벼는 농부의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넓적하고 단단한 오리 주둥이를 피해 뿌리를 깊이 깊이 내리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벼는 뚱뚱한 오리 엉덩이가 지나갈 때마다, 벼 포기가 상하지 않게 힘을 주어야만 했다.
어느 날,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바람이 몹시 불고 비가 엄청 내렸다. 물이 산더미처럼 불어나자 사방에 물난리가 났다. 논마다 물에 꼴깍 잠기고 사나운 흙탕물이 들판을 휩쓸었다. 그러나 성난 바람은 올 때처럼 급하게 비를 몰고 가버렸다. 흙탕물도 제 갈 길로 가버렸다.
“휴, 큰 일 날 뻔했네.”
벼는 몸을 떨며 말했다. 흙탕물이 길을 삼켜 며칠 못 왔던 농부가 달려왔다.
“아이고, 얘들아.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농부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알았어! 다른 논의 벼들은 쓰러져도 늬들은 무사할 줄 알았어. 다 오리 덕분이야. 오리가 늬들을 튼튼하게 한게야.”
벼는 그제야 다른 논을 건너다 보았다. 논마다 사나운 흙탕물을 견디지 못한 벼들이 쓰러져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