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 누군가는 그를 아동 성추행자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를 ‘가장 바보 같은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를 성형 중독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뒤로 걷는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 최초의 지구인이었고, 흑인으로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을 만들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인기 가수부터 필리핀의 죄수들과 유럽의 아카펠라 그룹까지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춤과 노래를 따라한다. 당신에게 그는 ‘King of the pop’일수도 있고, ‘Jacko’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잊을 수 있는가?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무대를.
퀸시 존스 : 프로듀서.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Thriller>, <Bad> 등을 프로듀싱했다. 퀸시 존스는 마이클 잭슨의 어린 시절, 가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로부터 그를 “인류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굉장한 녀석”이라고 소개받았고, 성장한 마이클 잭슨이 형제 그룹 잭슨5에서 솔로로 독립하려 하자 음반 프로듀싱을 제의했다. 세 장의 앨범은 전세계에서 1억 5천만 장 정도 팔렸고, 이 중 <Thriller>는 빌보드 앨범 차트 37주 1위, 그래미 8개 부문 수상 등을 기록했다. 퀸시 존스의 완벽한 프로듀싱과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부터 프로그레시브 락의 전설 알란 파슨스에 이르는 다양한 뮤지션과 교분을 쌓으며 음악적인 폭을 넓힌 마이클 잭슨의 자유로운 음악적인 스타일이 결합한 결과였다. 특히 그룹 밴 해일런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해일런이 기타를 친 ‘Beat it’에서 보여준 흑인과 백인, 록과 댄스 음악의 결합은 전세계 팝의 트렌드를 바꿨다. 당시 밴 해일런은 마이클 잭슨이 보낸 ‘Beat it’의 녹음을 듣고 곧바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기타를 쳤고, 연주에 대한 비용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Thriller>는 엄청난 성과와 달리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 나온 앨범이었다. 잭슨5가 소속된 레코드사 모타운은 잭슨5가 전문 작곡가의 곡을 그대로 부르기만 할 것을 원했고, 이 때문에 마이클 잭슨은 솔로로 독립하며 에픽 레코드와 계약 당시 자신이 앨범 제작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또한 레코드사가 <Thriller>의 발표를 재촉하는 바람에 서둘러 믹싱을 했다가 결과가 형편없자 레코드사와 대립, 다시 믹싱을 했다. 그리고 <Thriller>가 발표될 당시 미국의 MTV 등 음악 전문 방송사들은 흑인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를 방송하지 않았으나, 마이클 잭슨은 전세계 최초의 드라마 타이즈 뮤직비디오인 ‘Thriller’로 방송사의 규제를 돌파했다. <Thriller>의 엄청난 성공은 마이클 잭슨을 주류 팝 음악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Thriller>는 한 흑인 뮤지션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끝없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자넷 잭슨 : 가수.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 <Control>, <Rhythm Nation 1814>, <Janet>등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했고, 마이클 잭슨의 <History> 첫 싱글이자 700만 달러가 든 뮤직비디오 ‘Scream’에 함께했다. 남매가 모두 스타인 까닭에 “두 사람이 동일인이다” “마이클 잭슨이 비만이 된 자넷 잭슨을 경멸한다” 등의 온갖 루머가 나돌았지만, 마이클 잭슨은 오히려 자넷 잭슨에게 다이어트 기구를 사줬고, 자넷 잭슨을 댄싱 퀸으로 올려놓은 ‘Rhythm nation’ 군무에 마이클 잭슨의 춤을 응용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자넷 잭슨은 어린 시절 너무 뛰어난 오빠들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이클 잭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마이클 잭슨이 걷기 시작하자마자 그를 가수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레슨을 강요했고, 그가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벨트와 다리미 코드 등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로 그를 때렸다.
게다가 그는 잭슨5 활동 초기에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스트리퍼가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공연까지 해야 했고, 아버지의 강요에 부담감을 느낀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기절한 적도 있었다고. 이런 유년기 때문인지 마이클 잭슨은 청소년 시절 자신이 스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고, 얼굴에 여드름이 나자 자신의 얼굴을 부끄럽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피하기도 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을 한 탓에 가정교사가 고등학생 정도의 수업을 가르친 것으로 ‘인정’한 것이 마지막으로 받은 교육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클 잭슨과 자넷 잭슨이 성인이 되자 아버지의 곁을 떠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남매가 어린 시절 좀 더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면 그들이 성형수술이나 ‘니플게이트’(자넷 잭슨이 슈퍼볼 시합 축하 공연 중 가슴을 드러낸 것)등의 스캔들에 대해 좀 더 여유있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매컬리 컬킨 : 배우. 어린 시절 영화 <나 홀로 집에> 등에 출연하며 전성기의 인기를 구가했고, 마이클 잭슨의 앨범 <Dangerous>의 ‘Black or white’에 출연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이 부각된 것은 마이클 잭슨의 어린이 성추행 논란이 시작되면서부터. 1993년 한 때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에 초청돼 살았던 조던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고소를 했고, 그 뒤 2003년 개빈 아르비조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했다. 이에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매컬리 컬킨도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매컬리 컬킨은 이런 의혹을 모두 부인했고, 마이클 잭슨은 2005년 법원으로부터 모든 기소 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물론 마이클 잭슨이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조던 챈들러의 가족에게 2600만 달러를 지급, 이로 인해 마이클 잭슨이 사실은 유죄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팬들은 잭슨이 <Dangerous> 투어를 하던 시점에서 재판 소요 기간이 7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 사건을 끌고 갈 수 없어 이 같은 타협을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조단 챈들러와 그의 부모는 마이클 잭슨의 보상금을 두고 다툼 끝에 서로 고소했고, 조단 챈들러는 방탕한 생활로 파산 상태에 이르자 <Michael was my lover>라는 자서전을 내기도 했다. 개빈 아르비조도의 사건도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을 주장한 관련자들의 증언이 모두 위증으로 판명됐고, 개빈 아르비조 측은 무죄 판결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언론이 마이클 잭슨을 유죄라고 확정하듯 보도한 것과 달리, 마이클 잭슨의 재판에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이클 조던 : 농구선수. <Dangerous>에 수록된 ‘Jam’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이들은 둘 다 이니셜이 ‘MJ’이고, 1980~1990년대 스포츠계와 팝계를 대표한 아이콘이었으며, 각각 음악과 농구로 세상을 지키는 영화 <Moon walker>와 <Space jam>에 출연했다. 또한 알 켈리의 ‘I believe I can fly’는 <Space jam>에 수록, 마이클 조던의 BGM처럼 됐고,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발라드 ‘You are not alone’은 알 켈리가 작곡했다. <Dangerous>는 마이클 조던 외에도 매컬리 컬킨, 에디 머피, 매직 존슨, 나오미 캠벨 등 당시 최고의 스타들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영화 <세븐> 등을 연출한 데이빗 핀처가 ‘Who is it’을 연출했으며, 당시 최고의 히트 프로듀서였던 테디 라일리와 건스 앤 로지즈의 기타리스트 슬래쉬 등이 음악에 참여하는 등 당시로서는 어떤 뮤지션도 할 수 없는 인력과 물량 투입을 자랑한다. 마이클 잭슨은 여기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을 동원해 자신의 비트를 현대적으로 다듬었고, ‘Heal the world’와 ‘Will you be there’ 등 보다 세련 된 팝 발라드를 선보여 1990년대 이후 팝 음악의 트렌드를 정의했다. 미국 언론이 <Dangerous> 발매 당시 “<Thriller>를 일정 부분 뛰어넘은 앨범”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Dangerous’ 퍼포먼스는 지금도 여러 가수에 의해 반복될 만큼 세련됐고, 나오미 캠벨과 함께한 ‘In the closet’ 뮤직비디오는 이렇다 할 특수효과나 스토리텔링 없이 두 사람의 몸으로만 영상을 채워 섹슈얼리티가 점차 강조되던 당시 흐름을 따랐다. 스캔들이 터지기 전까지, 마이클 잭슨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 : 가수, 혹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마이클 잭슨과 1994년 결혼했고, 그 다음 해 이혼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의 쇼에 갈만큼 마이클 잭슨의 팬이었고, 그가 엘비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아버지의 작품에 관한 저작권 등을 관리하던 당시 마이클 잭슨이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하면서 가까워졌다고. 당시 언론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어린이 성희롱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비틀즈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던 마이클 잭슨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작권까지 확보하기 위해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은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의 일부 저작권을 소유하게 되기도 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자신이 진정 마이클 잭슨을 사랑했고, 마이클 잭슨도 많이 노력했다”는 말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함구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이 마이클 잭슨이 공개석상에서 리사 마리 프레슬리에게 한 키스에 대해 행동 분석가를 통해 “각본에 의한 키스였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결혼을 의심한 것은 단지 마이클 잭슨의 스캔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이클 잭슨은 성형수술로 여성에 가깝게 변한 얼굴에 백반증으로 점점 피부가 하얘졌다. 거기에 거대한 놀이동산 네버랜드를 짓고, 비디오 게임 회사 세가의 게임을 광적으로 좋아하며, 애니메이션 <트랜스 포머>를 보며 로봇으로 변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취향은 그를 성인 남자라기보다는 무성적인 존재로 느껴지게 했다. 또한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이혼 뒤 결혼한 여성 데비 로는 그가 낳은 아이가 모두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 정자 은행에서 정자를 받아 낳은 아이라고 밝혔다. 이런 일련의 소문과 사건들로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팝의 황제’에서 음악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바보인 ‘Jacko’로 바뀌었다. 여기에 복잡한 개인사 속에서 내놓은 앨범 <History>는 거대한 동상까지 동원해 자신을 ‘황제’로 못 박는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면서 그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비춰졌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그의 성형수술이 무대에서 떨어지며 부러진 코 때문에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마이클 잭슨처럼 온 몸의 피부를 하얗게 하는 박피술은 현대 의학으로는 아직 불가능하다.
폴 매카트니 : 뮤지션. 그룹 비틀즈의 멤버. <Thriller> 작업 전 마이클 잭슨에게 작곡을 가르쳤고, <Thriller>의 ‘Girl is mine’을 함께 불렀다. 그러나 그가 마이클 잭슨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그에게 음악 저작권을 사라고 했다는 것. 마이클 잭슨은 그의 조언에 따라 비틀즈(!)의 저작권을 샀고, 이 후 둘은 갈등 중이다.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의 저작권을 구입한 뒤 소니와 Sony/Atv Publishing을 설립, 양측이 소유한 저작권의 수입을 50%씩 분배하는 계약을 맺었다. 마이클 잭슨은 이를 통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있어 언론의 보도처럼 파산할 일은 없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솔로로 독립하며 MJJ 프로덕션을 설립해 자신의 모든 저작물과 관련 상품 등을 관리하는 등 뮤직 비즈니스에서도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마이클 잭슨과 그의 앨범을 발매하는 소니와의 오랜 갈등은 유명한데, 마이클 잭슨은 소니가 앨범의 곡수와 스타일, 기간까지 통제할 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제작비, 방송 홍보비 등을 모두 책임지라고 하는 등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소니와의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주장했고, 급기야 ‘Sony is phoney’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기에 이른다. 결국 소니는 마이클 잭슨의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그의 신보 <Invincible>발표 당시 라디오 방송만으로 빌보드 40안에 들었던 그의 싱글을 늦게 정식 발매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Invincible> 발표 당시 마이클 잭슨은 이미 미디어에 의해 ‘Jacko’가 됐지만, 그는 그 때에도 ‘King of the pop’답게 뮤지션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윌 아이 엠 : 뮤지션.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25주년 기념 앨범에 수록된 ‘Girl is mine’을 리믹스 했다. 윌 아이 엠은 어린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이었다. 또한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Thriller>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앨범이었고, 어셔에게 마이클 잭슨은 “세상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사람”이었으며, 안젤리나 졸리는 고교시절 마이클 잭슨의 붉은 재킷을 입고 다녔다. 평생을 음악 산업 안에서만 살았던 ‘King of the pop’은 대중과 미디어에 의해 그의 후배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언론과 미디어의 놀림을 받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그의 춤과 노래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 스타는 늙는다. 소문은 사라진다. 그러나 무대는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