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싶은 인물 - 흥선대원군 -

부싯돌라이타 작성일 12.06.06 11: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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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정치의 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파락호로 행세하며 왕권을 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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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은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되어 왕위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상황에서 왕위와 멀지 않은 왕족이라는 것은 그다지 축복이 아니었다. 헌종 이후 끊어진 정조의 직계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으로 이어졌고 철종마저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왕위와 가까운 왕족들은 모두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동 김씨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안동 김씨는 세도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들이 골라서 강화도에서 데려온 철종처럼 정치에 문외한인 왕을 원했다. 안동 김씨들은 조금이라도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했고, 견제는 역모라는 무서운 누명으로 이어졌다. 조금만 왕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 왕족은 꾸미지도 않은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멀리 귀양가서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혈통적으로는 왕의 자리와 멀지만 편입된 가계상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이 택한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건달처럼 행세하는 것이었다.

야심 없는 파락호를 자처하고 궁도령, 혹은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으며 세도가들의 눈을 피한 이하응은 아무도 모르게 조대비와 연줄을 대어 자신의 야망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다. 조대비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비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에 밀려 한 많은 궁중 생활을 했던 비운의 대비였다. 당시 조대비는 순원왕후 사망 이후 궁중의 최고어른이 되어 안동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을 길을 찾고 있었다. 이하응은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어 조대비에게 접근하였고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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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어린 아들을 앞세워 10년간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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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과 맺은 묵계대로 그의 둘째아들 아들 명복을 철종의 후사로 지명했다. 12살 고종은 이렇게 그의 아버지 이하응의 노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하응은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이 되었다. 조선역사상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4명이 있지만, 왕의 아버지로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했다. 어린 나이의 고종을 왕으로 지명한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책 결정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주어 그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다. 오랫동안 세도가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며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흥선대원군은 시정의 건달 행세를 하며 깨달은 당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개혁 정책을 통해 해결해가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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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흥선 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의 승리 후 전국의 주요 장소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치의 뜻을 결의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이러하다.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 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출처: (CC)Dalgial at Wikipedia.org>


흥선대원군은 일단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그 와중에 국정 공백을 막기 위해서 김병학 등 일부 안동 김씨와는 손을 잡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에 힘썼다. 그는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일부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법전간행을 통해 19세기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고 세도정치 동안 비대해진 신권을 제한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펼쳤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사치를 근절하기 위해 의복제도를 고치고 사창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양반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부담을 고스란히 양인에게 전가하고 상류층의 권리만 누렸던 양반층에게 그 부담이 일부 돌아감으로써 국고는 풍족해졌고 양인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표방한 나라였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조화는 세도정치라는 신권의 독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비정상적으로 커진 신권을 제압하기 위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을 위주로 개혁을 주도해 나갔는데 이는 조선이 세계사의 커다란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일정 정도는 주효한 개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19세기 후반, 일찌감치 산업혁명 등을 통해 발달한 기술문명의 세례를 받고 제국주의화 되어가던 서양국가들은 거침없이 동양으로 진출해오고 있었고, 이러한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에 대한 집착은 일부분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왕권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원납전으로 경제구조를 흐려 백성의 삶을 다시금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서구의 새로운 사상이 왕권중심의 유교사상을 교란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치를 펴 국제관계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 막아낸 두 번의 양요(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집권 초기 행한 개혁정치로 인해 강해진 국방력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할 기회를 놓쳐버린 사건이기도 하였다.

권좌에서 물러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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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이나 수렴청정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임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권력을 잠시 위임해주었던 왕은 성장하면 원래 자기 것이었던 그 권력을 반드시 되찾으려 한다. 흥선 대원군의 아들 고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살에 왕좌에 오르면서 아버지에게 권력을 위임했던 고종이 22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아래 있기를 원할 리는 만무했다. 그는 자신이 왕인 나라를 직접 다스리고 싶어했고 너무나 강력한 아버지 흥선 대원군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에게 자신이 10년간 휘두르던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고종 내외는 권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최익현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등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명성황후의 측근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들과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퇴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익현의 탄핵은 결국 흥선대원군의 실각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원치 않는 정계 은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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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집 운현궁. 흥선대원군은 섭정 시기 운현궁과 궁궐을 직통으로 연결시켰다.
운현궁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문이 폐쇄되면서 대원군의 섭정도 끝이 났다. <출처: (CC)Daderot. At Wikipedia.org>

강제로 물러난 탓에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 과정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권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집착은 이전에 그가 보여준 확고한 개혁의지와 경세가로서의 품위마저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재집권에 대한 야망은 결국 며느리 명성황후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외척의 정치 참여를 극단적으로 막고자 하였던 그의 섭정기간 동안과는 너무나 상반되게도 그가 권력을 잃어버린 후 정국은 완전히 왕비의 친정인 민씨가가 주도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립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역모에도 연루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때는 난도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피신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잠깐의 재집권은 청나라의 힘을 빌린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청나라에 납치되며 물거품이 되었다. 정권을 다시 잡기 위해 그는 그 어떤 세력과도 제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기도 했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세력에 손을 뻗었으며 갑오경장 때는 일본과 줄을 대어 재집권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행동들은 아들 고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895년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바깥 활동을 막았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꿈꾸었으며 만년의 그의 헛된 꿈은 며느리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대원군은 또다시 잠시 정권을 잡지만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친러파가 대두하면서 축출되었다. 3년 후인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19세기 후반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의 정치사를 관통했던 흥선대원군은 그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에는 틀림이 없는 인물이다.

출처: 네이버케스트 //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개인적으로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치보다는 비천한 왕가의 태생으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위해 그가했던 행동들에 본받고싶은 점이 많아서 올려봅니다.

 

이루고자하는 일을 위해 스스로 멍청해보이고 꼼꼼한 성격이지만 일부로 덜렁덜렁한 이미지로 상대에게 약하게 보임은

언젠가 내가 그 상대 위에 올라서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흥선대원군을 생각합니다.

 

짱공여러분은 닮고싶은 인물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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