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듣는 시, 이상화시인의 시.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밤새도록 기뻐서 울었다...1945. 8.15일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시인.독립운동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무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1901. 4. 5 ~1943. 4. 25)시인님 대구 출생, 독립운동가, 시인.
선생님은 아버지 시우(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私塾)에서 공부하고 1916년 중앙고를 나왔다
3·1운동시 대구 학생 운동에 참여 백기만과 함께 거사/ 발각 되어 서울로 도피했고/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동인이 되었다,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25년 박영희·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에 참여했으며, 1927년 대구에 돌아 왔으나 일제순사의 가택수색을 여러번 당하고, 의열단 이자 대구의 독립투사인 이종암사건시에 동지들과 같이 구금되었다. 중국의 한인 독립군 대장인 친형 이상정 장군 만난 후에 일제 의해 체포되어 5개월 옥살이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교남 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선생을 했다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 공원에 상화 시비가 세워졌다.
일제시대 우리나라 일부 문인들을 보면, 스스로 문약하고 지조를 지키지 못하며, 일순의 영달과 영화를 위하여
일제에 아부하고 부왜한 시인/ 문인들이 더러 있었는데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선생이야 말로 시인이시다---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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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맞아 모두 길거리를 나와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