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 왜 마리우스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

nasica_ 작성일 13.01.06 19: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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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마음에 아픈 장면이, 팡틴느의 비참한 처지나 장발장이 죽는 장면이 아닙니다.  바로 앙졸라가 그랑테르와 함께 사살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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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hear the people sing ?  TO THE BARRICADES !!)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앙졸라는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는데, 똑같이 정부군에 반항하여 싸웠고, 실제로 병사들을 몇명 살해하기까지 한 마리우스는 어떻게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을까요 ?  장발장이 하수구를 통해서 마리우스를 빼내오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마리우스는 ABC의 친구들의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텐데, 그는 왜 이후에라도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  그냥 현장에서 붙잡히지만 않았기 때문에 마리우스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나중에라도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수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마리우스는 당장 교도소로 가서 강제 노역에 처해지거나 심지어 교수형이라도 받게 되는 것일까요 ?  그럴리가 없지요.  만약 그랬다면, 테나르디에가 틀림없이 경찰에 고발하지 않을테니 전재산의 반을 내놓아라 하면서 마리우스를 협박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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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에서, 결국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로부터 2만 프랑의 돈을 뜯어내는데 성공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건 마리우스의 아버지인 퐁메르시 대령의 유언 때문이었지요.)



망작이라고 일컬어지는 1998년작, 리암 니슨과 우마 써먼 주연의 레미제라블을 최근에 EBS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실마리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그 영화에서는 마리우스를 데리고 하수구를 통해 기어나온 장발장과, 그 앞에 나타난 자베르 사이에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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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좀 그럴싸하게 나가더니... 가면 갈 수록 영화 전개가... 매우 이상했어요.)



장발장 : 난 체포해도 좋으니 1시간만 달라, 이 친구를 그 조부의 집에 데려다 주고 잡혀가겠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이 친구는 죽는다.

자베르 : 뭐하러 그런 수고를 해야 하지 ?  이 반란군 친구는 치료를 받더라도 결국 어차피 교수형을 받을텐데.

장발장 : 며칠 안에 대사면령이 내려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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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998년 영화가 망작인 대표적인 이유.  저 주먹들고 설치는 찌질이가 마리우스이고, 혁명의 리더가 마리우스 본인입니다 !!  앙졸라는 대체 어디에 간것인지 !!!)



실제 원작 소설에서는 이런 대화가 안나옵니다.   (이 1998년 영화는 이래저래 망작입니다.  심지어 앙졸라가 아예 안나옵니다 !!!!)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일개 도주 범죄인인 장발장이 어떻게 감히 '며칠 안에 사면령' 이야기를 운운할 수 있었을까요 ?  그냥 영화가 망작이라서 ? 

왜 마리우스가 사법 처리를 피하고 코제트와 행복하게 부르조아의 삶을 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보시려면, 이야기가 아주 길어집니다.  먼저 먹는 과일인 배 이야기부터 들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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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랑스니까 우리나라 나주 배가 아닌 서양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서양배는 저렇게 좀 표주박처럼 생겼어요.)



다음은 민음사에서 나온 레미제라블 한국어판의 일부분입니다.  정기수라는 교수님이 번역하셨는데, 소개를 보니 서울대 불문과를 나오시고 프랑스 보르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프랑스 교육 문화 훈장도 받으셨으니 불문학 쪽에서는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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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저녁 루이 필리프는 걸어서 돌아오다가 어리디어린 건달 하나가 뇌이 궁전의 쇠 문설주에 엄청 큰 배 하나를 숯으로 그리려고 발돋움하며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왕은 앙리 4세로부터 이어받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그 건달을 도와 배를 다 그리고 나서, 그 아이에게 루이 금화 한 닢을 주면서 말했다.  "저 위에도 배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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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영화보고 나서 충동구매로 질렀습니다 !  근데 번역체에 약간 실망했어요.)



이 문장이 이해가 되세요 ? 전 맨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제가 가진 펭귄 클래식 영문판으로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 책은 Normal Denny라는 분이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Radley College라는 곳을 나왔고, 그냥 비엔나와 파리에서 공부했다 라고만 설명이 붙어있네요.)

...then gave him a coin, a louis d'or. "There's a pear is on that, too," he said.

이러면 좀더 이해가 쉽게 됩니다.  그러니까 '저 위에도 배가 있다' 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그것(금화) 위에도 배가 있단다' 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뻔 했습니다. 

불어판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La poire est aussi l?-dessus."


Bing translater로 번역을 해보니 저 l?-dessus 라는 단어는 on it, on top으로 번역이 되고, 네이버 불어 사전을 봐도 저건 그냥 "그 위에" 라고 번역이 되어 있던데, 그걸 왜 굳이 "저 위"라고 번역을 해서 '문설주 위를 말하는 건가' 하고 헷갈리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려도 아직 이해가 잘 안되시는지요 ?  이걸 완전히 이해하시려면 일단 민음사의 주석을 보셔야 합니다.  주석에는 '배는 루이 필립의 문장'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저 금화 위에 루이 필립의 문장인 배가 찍혀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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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폴레옹의 꿀벌 문장입니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할 때, 참모진들이 고심 끝에 고른 문장입니다.  나폴레옹 이전에도, 원래 프랑스 왕가 문장에 꿀벌이 들어간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꿀벌보다는 나방을 닮은 것은 에러.)



나폴레옹의 문장이 꿀벌(벌꿀이 아닙니다 꿀벌입니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왕의 문장이 먹는 배일리가 없쟎습니까 ?  사실 배라는 것은 루이 필립의 문장이 아니라 별명이었고, 그것도 조롱하는 별명이었습니다.   1831년, 그가 왕좌에 오른 이후에 나온 아래 만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두상이 약간 배를 닮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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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필립, 배로 진화하다)



아, 여기서 배란 물론 서양배를 뜻합니다.  서양배는 굳이 따지면 약간 표주박처럼 생겼지요.  그러니까 저 대담한 부랑아 소년은 감히 궁전 문설주에다 왕을 조롱하는 낙서를 하다가 왕 본인에게 딱 걸린 것인데, 왕 본인이 그 조롱 낙서를 그리는 것을 도와주고 이 불쌍한 소년에게 금화까지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금화 위에 새겨진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루이 필립이 "이 금화 위에도 배가 있다" 라고 농담을 한 것입니다.  당시 금화 앞면에는 항상 왕의 얼굴을 새기게 되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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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필립 때 나온 금화는 사진을 못 찾겠네요.  이것이 루이 필립 때 나온 5프랑 짜리 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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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루이 14 때의 금화, 흔히 Louis d'Or 라고 부르는 물건입니다.  불어로 금이 Or 에요.   금값만 따져도 현재 가치로 약 40만원 정도 합니다.)



레미제라블 속의 저 문장은 가브로슈를 소개하면서 파리의 어린 부랑자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여러분이 느끼셔야 하는 것은 바로 저 루이 필립이라는 왕의 관대함입니다.

잠깐, 루이 필립이 관대하고 착한 왕이었나요 ?  예, 맞습니다.  이건 레미제라블 속에도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주인공 마리우스와 앙졸라, 그리고 ABC의 친구들은 이 어질고 착한 왕을 몰아내려고 했었나요 ?  그건 나중에 보도록 하고, 먼저 이 루이 필립이라는 왕에 대해서 간단히 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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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내 진짜 얼굴은 처음이지 ?  저 위에 배는 잊어버려.)



일단 루이 필립은 원래 부르봉(Bourbon) 왕가 출신이 아닙니다.  루이 필립은 오를레앙 (Orleans) 가문의 왕자였는데, 이 오를레앙 가문은 부르봉 가문과 함께 유서 깊은 카페 (Capet)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귀족 가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부르봉 가문은 장남, 오를레앙 가문은 차남인 셈이었지요.  당연히 왕은 모두 부르봉 가문에서 나왔고, 오를레앙 가문은 그냥 공작이라는 작위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오를레앙 가문을 프랑스 사람들은 'la branche cadette', 영어로는 cadet branch, 즉 분가(나눌 분, 집 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민음사 레미제라블 5권 99페이지에 있는 주석도 오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blanches cadette 라고 되어 있던데, 이건 더 젊은 백색, 혹은 백색 사관 후보생이라는 뜻이고, 아마 branche cadette를 쓰려고 하다가 오타가 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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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루이 필립 1세의 아버지 루이 필립 2세입니다.  2세와 1세가 바뀐 것 아니냐고요 ?  아닙니다 !)



루이 필립은 이렇듯 애초에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지요.  루이 필립의 아버지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 2세 (Louis Philippe II)는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계몽 사상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로 인해 운명의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때도 루이 필립 2세는 제3신분 편을 들었고, 혁명에 협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으로서 그의 거처였던 파리 시내 루아얄 궁 (Palais-Royal)은 급진파인 자코뱅들의 본거지일 정도였습니다.  루이 필립 2세 자신도 열혈 자코뱅이었습니다.  참 묘하지요 ?  공작이 자코뱅이라니 !  미국의 오올리언즈 (Orleans, 루이지애나의 뉴 오올리언즈가 아니라 메사츄세스 주의 소도시입니다)라는 도시 이름은 독립 전쟁 당시 자신들을 후원해준 바로 이 양반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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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미셸 하니까 어딘지 귀에 익지 않습니까 ?  화보에 자주 나오는 해안가의 그 유명한 몽생미셸 성 바로 그 곳입니다.)



그의 아들 루이 필립도 당연히 그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자유주의자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혁명이 터지기도 전인 1788년, 당시 불과 15살이었던 루이 필립은 몽생미셸(Mont Saint-Michel)의 감옥 문을 부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레미제라블에도 나오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1792년 유명한 발미 (Valmy)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혁명을 진압하러 침공하는 프로이센 군과 싸우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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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발미 전투에서의 루이 필립입니다.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말에서 내려서서 투구를 쓴 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바로 루이 필립입니다.  바로 그 옆에 말을 탄 장교는 그의 친동생이고요.  발미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는 발미(Valmy)에서 생긴 일 http://blog.daum.net/nasica/6862441 참조)



그의 따뜻하고 고귀한 품성을 전해주는 일화는 많습니다.  가령 젊어서 군에 있을 때, 성난 마을 주민들이 혁명에 반대하는 카톨릭 사제들을 때려죽이려고 몰려들자 자신이 홀홀단신으로 폭도들과 사제들 사이에 버티고 서서 카톨릭 사제들을 구해낸 적이 있었지요.  본인 자신은 혁명파인데도, 혁명으로 인해 불필요한 살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덕분에 사제들을 놓친 마을 사람들은 이 젊은 귀족 장교에게 무척 화가 났을텐데, 바로 다음날 어떤 사람이 강물에 빠지자, 루이 필립이 물에 뛰어들어 이 사람을 구해냈습니다.  결국 이 용감함에 감복한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월계관을 선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결국 반혁명파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에는 반대한,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였습니다.  반면에 그의 과격한 자코뱅 아버지는 아예 성을 '평등'이라는 ?galit? 로 바꿔버리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혁명은 그다지 아름답게 돌아가지만은 않습니다.  발미 전투에서 그의 상관이었던 두무리에 (Charles Fran?ois Dumouriez) 장군은 혁명 정부의 무능력과 과격함에 질려버린 상태라서, 차라리 1791년의 헌법 체제, 즉 입헌 군주제로 되돌리기 위해 오스트리아군과 손잡고 반혁명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가 나서 실패했는데, 두무리에의 부하였던 루이 필립도 이에 연루되어, 결국 두무리에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망명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파리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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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두무리에 장군입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영국의 연금을 받으며 나폴레옹에 저항하며 살았습니다.  루이 18세 복위 이후, 프랑스군으로의 복귀를 꾀했으나, 이미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의 실력파 부하 원수들이 다 꽉 잡고 있었으므로 실패... 결국 영국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쳤습니다.)



여기서부터 루이 필립의 진짜 고생이 시작됩니다.  그는 곧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심지어 미국 등으로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낭만적인 세계 여행을 즐긴 것 같지만, 그는 따로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이 궁핍했던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타고 다니던 말을 팔기도 했고, 어떤 기숙 학교에서 수학과 지리, 프랑스어 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행하던 여동생은 놀랍게도 삯바느질을 해서 생활비를 보탰다고 합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여자들과 놀아나 사생아들을 남겼다는 점은 에러...)  그래서 루이 필립은 젊어서 고생을 해 본, 시민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1830년 7월 혁명이 벌어졌을 때, 샤를 10세는 자신의 손자에게 양위를 한다고 선포하고는 망명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당연히 공화제를 원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에 비해서 공화제의 혼란을 두려워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 왕'이라고 할 수 있던 루이 필립이 그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서민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착한 왕이라, 참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  결국 루이 필립은 부르봉 왕조를 쫓아낸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것이지요.  19세기의 프랑스 혁명은 대개 부르조아, 즉 중산층 계급이 선도하지만 결국 일반 민중들이 몸빵을 담당해서 피를 흘리는데, 그 성과는 역시 다시 중산층 계급에서 독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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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1830년 7월 혁명을 묘사한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제 블로그의 타이틀 화면인 Eug?ne Delacroix 작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 guidant le peuple) 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역사화치고는 파격적으로 사건 직후인 1830년에 그려졌습니다.  화가인 들라크루아는 정작 이 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총을 들지는 않았는데,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없다면, 조국을 위해 그리겠다 !' 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 그림에는 노동자와 부르조아 중산층 시민, 거리의 불량 소년 등이 모두 합심하여 왕정 타파에 나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 불량 소년이 훗날 빅토르 위고에게 가브로슈에 대한 영감을 주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으나, 정작 위고는 그에 대해 아무 말을 한 것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제작 즉시 매우 유명해졌는데,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 이후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ㅉㅉ)



루이 필립은 이렇게 인기 많은 왕으로 시작했지만, 그 인기는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애초에 공화제를 원했던 민중이 '자신들이 이용만 당하고 얻은 것은 없다'라고 분노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루이 필립의 정치는 결국 투표권 보유자를 줄이고, 금융가 및 지주들만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노가 좀 설익게 터져 나온 것이 루이 필립 즉위 2년 만인 1832년 6월, 즉 레미제라블에 묘사된 무장 봉기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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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832년의 파리 무장 봉기 사건은 실패한 사건이다 보니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나, 빅토르 위고에 의해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요.)



빅토르 위고는 이 봉기 사건 당시에는 루이 필립의 지지자였고, 레미제라블 내에서도 루이 필립 개인에 대해서는 무척 칭찬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앙졸라가 굳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야 했던 것은, 루이 필립을 몰아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에서 왕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묘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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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필립 당신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소이다 !)



자,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마리우스가 중대 범죄인 반란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보지요.  사실 그 답은 레미제라블 안에 다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음사의 번역을 그대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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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모두의 책임이므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눈을 감아 줄 필요가 뒤따른다.
게 다가 또 언어도단인 지스케의 법령은 의사들에게 부상자들을 고발하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은 여론을 분개시켰고, 단지 여론 뿐만 아니라 첫째로 국왕을 분개시켰으므로, 부상자들은 그 분개 때문에 감추어지고 보호받았으며, 현행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사람을 제외하고, 군법회의는 감히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무도 마리우스를 괴롭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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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스케 (Henri Gisquet)라는 양반은 당시 실존 인물로서 1831년부터 1836년 사이에 파리 경찰청장을 한 분입니다.  저 양반은 제딴에는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자, 여기저기 많이 도망쳤을 반란 가담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파리 전역의 의사들에게 총상이나 자상을 입은 부상자들의 신원을 경찰에 알리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 이 명령을 어길 경우 의사들은 면허를 잃는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신고를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반란 가담자 색출을 위해, 그것도 부상자들의 색출을 위해 의사들에게 신고를 강제한 것은 너무나도 비인도적인 조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디까지나 착한 왕이었던 루이 필립 본인이 그 조치에 대해 벌컥 화를 냈던 모양입니다.  결국 마리우스가 사법 조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지스케 청장의 악의에 루이 필립 왕의 선의가 빚어낸 오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는 빅토르 위고의 말, '폭동은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서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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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의 루이 필립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



루이 필립의 관용 정신은 특히 자기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암살 미수 사건에서 극에 달합니다.  1835년 쥬세페 피에스키 (Giuseppe Mario Fieschi)라는 코르시카인이 무려 25개의 총신을 묶은 특수 화기를 동원해 루이 필립의 암살을 시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루이 필립은 이마만 살짝 총알에 긁혔으나, 그의 말은 총알에 맞아 죽었고,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모르티에 (?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 원수를 포함한 무려 17명이 사망했으며 다수가 부상당했습니다.  이 대학살극을 벌인 피에스키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유럽 제일의 기병 지휘관이었던 뮈라(Murat)의 부하 병사였는데, 고향에 돌아와 절도 등의 범죄로 인해 10년 형을 살았고, 그 이후에도 (꼭 장발장처럼) 평생 따라다니는 가석방 감시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의 딱한 사정을 들은 루이 필립은 특히 모르티에 원수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상을 입은 것이 나였다면 그 자를 사면해줄 수 있었을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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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모르티에 원수입니다.  루이 필립은 모르티에 원수의 장례식장에서 아예 대놓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왕실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지요.)



레미제라블에 나왔던 봉기 사건은, 확실히 너무 설익은 혁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아직 이 착한 루이 필립을 지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 봉기 사건이 진압된지 얼마 안되어 행사에 참여했던 루이 필립에게 파리 시민들은 진심어린 환호를 보냈다고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왕정이 루이 필립이라는 개인의 매력으로 십수년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결국 1848년 2월 혁명으로 쫓겨나 영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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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 피날레 부분에서 나온 이 초대형 바리케이드는 마침내 왕정을 무너뜨린 1848년 혁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1848년 2월 혁명 때 만들어진 바리케이드는 정말 초대형으로서, 높이가 20m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공화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다가 불과 3년만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다시 무너졌다는 것은 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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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괜찮습니다.  민중의 힘은 강합니다.  언제든 민중을 억압하는 정권이 나오면, 결국 바리케이드의 영웅들이 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번 대선에서는 졌냐고요 ?  민주당이 정말 민중을 대표하나요 ?  이번 대선에서 민중의 뜻은 박근혜 측에 있었던 것이지요 뭐.  오늘날 우리가 정권 교체를 바리케이드를 쌓고 피를 흘리며 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임시 공휴일인 투표일에 동네 투표장에 가서 도장만 찍고 오면 되는 것이 다 과거 바리케이드의 영웅들 덕택입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또 소중하게 투표권을 행사하십시요.)



최근 대선이 끝난 이후, 여당이 재집권하게 되자 이에 절망한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달았지요.  내용을 보면 회사 측에서 파업에 의해 재산상의 손해를 보았다면서 엄청난 액수의 손해 배상 소송을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 같더군요.  노동 운동하시는 분들 개개인도 식구가 딸린 가장이니까, 당장 사람을 빚더미에 깔리게 하는 손해 배상 소송은 어떻게 보면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압박인 것 같습니다.  제가 노동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못 기울여서 잘 모르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 붙이는 그런 조치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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