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 이후, 아테네 시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편입니다.
플라톤의 영향은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의 한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속에서 분명히 볼수 있습니다.
20년동안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공부 했습니다. 스승이 죽은 뒤에 아리스토렐레스는 곧 학교 당국과 불화를 빗고서
아카데메이아를 떠나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에서는 플라톤 철학을 가르쳤으나,
그것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스승의 철학을 비판하는 주요한 논점은 플라톤의 ‘이상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플라톤은 두 가지 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이원론) 하나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형상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형상의 빈약한 모방에 불과한 ‘사물들’의 세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견해를 반박하고서, 세계는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물었습니다. 만약 형상이 사물의 본질이라면 형상은 어떻게 사물과 분리되어 존재 할수 있는가? 만약 형상이 사물의 근원이라면 어떻게 다른 세계에 존재 할 수 있는가? 가장 명백한 비판은 초기 그리스인들이 풀고자 애썼던 변화와 운동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 인문학 1편에서 이야기 하였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 안정성은 환상이다.
- 세계는 가시적인 것(눈 에보이는 것) 불안정하고 과도적인 영역.
파르메니데스 - 운동은 환상이다.
- 세계는 지적인 것(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의 불변적인 영역, 영구 불변하는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톤은 둘다 받아 들임으로써 이딜레마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플라톤의 절충은 진정 운동과 변화의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그저 불변하는 사물을 신통찮게 모방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변화하는 사물’을 제대로 설명했다고 볼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실재의 두측면인 형상과 질료(質料)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 구분은 사실 속에서가 아니라 사유 속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상은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개별 사물들 속에 내재 해 있는 것이며. 즉, 형상은 세계속에 있다. 모든 대상은 형상과 질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플라톤이 말했듯이, 형상은 보편적이므로 많은 개별 사물이 같은 형상을 가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 합니다. 이 대상의 형상을 대상의 ‘본질’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무엇이다(나무다, 혹은 책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곧 그것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며,
형상은 사물의 ‘본질’이며 ‘본성’으로서, 사물의 기능과 연관이 있습니다.(바퀴, 칼, 벽돌 등등)
대상의 질료는 그 대상에만 고유한 것이므로, 그것을 대상의 ‘개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컨데, 칼은 같아도(형상) 쓰임세는 다르기 때문에(질료), 이 질료(칼의 쓰임세)를 ‘개별화의 원리’이기에, 형상과 질료를 모두 가진 하나의 대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실체는 본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저작으로 말하자면, 그 본질은 대략 형상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설명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는 그 본질을 실체로부터 불리해낼 수 없습니다. 그 대신에 실체로부터 본질을 추출하는 순수하게 지적인 행위는 가능 합니다.
실체의 본질적인 속성과 우연적인 속성에 따라 발견하고 분류하는 일이 철학자의 작업이며, 즉 다양한 실체를 본질과 성질에 따라 보는것.(인간이 되려면 합리적이어야하므로 합리성은 인간의 본질의 일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머리털을 가지고 있거나 대미리거나 둘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머리털의 유무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분석은 현대에 들어와서까지도 적용되는 방식입니다.
- 플라톤의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원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반플라톤적인 형이상학에 따르면, 실재는 복수의 실체들로 구성됩니다.
즉, 실재란 윗층에 영구한 형상들이 있고 아래층에 그 형상들을 신통찮게 모방하고자 하는 질료가 있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플라톤의 이원론과 대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원론입니다.(플라톤은 실재의 가장 ‘실체적인’층을 비물질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이원론은 관념론화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 도토리의 목적론
도토리의 질료는 장차 참나무라는 현실성으로 자라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도토리는 참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태이고, 참나무는 도토리의 현실태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운동의 원인으로 생각 했습니다. 각각의 개별적 실체는 자체 내에 목적론적(곧, 목적 지향적)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실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 성질은 변한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실체를 네 가지 인자로 분석 합니다.
질료인 -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재료’(대리석 덩어리)
형상인 - 질료가 되고자 하는 조각상이라는 형상 혹은 본질 (예술가의 정신 일종의 구상)
동력인 - 그 변화를 이루어내는 현실적인 힘 (대리석을 깎는 행위)
목적인 - 대상의 궁극적인 목적 (완성품, 파르테논의 신전과 같은 아름다움)
그러므로 자연은 각 실체들이 자기 실현을 추구해가는 목적론적 체계이며, 각 실체의 특수한 본질에 의해 주어지는 한도 내에서는 어떠한 완성태도 가능한 세계입니다. 플라톤의 이론에서 처럼, 모든 것은 무의식적으로 ‘선(good)’을 향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그런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사물의 추구하는 텔로스telos(목적)로서 모종의 구체적인 완성태가 현식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동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일종의 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기존 신들이나, 종교의 신과는 달리, 제일 동인은 전혀 인격화된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의 원인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종교적 의미가 아닌 ‘목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모든 것은 마치 육상 선수가 결승선을 향해 달리듯이, 제일 동인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의 도덕 이론에서는 목적 개념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위에는 모종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 행위의 ‘선(good)’이라고 규정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 행위의 목적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앵위를 설명하는 방식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 우리 행위의 총체성은 무한히 순환하는 것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을 먹기 위해 일어나고, 일하러 가기 위해 아침을 먹고, 돈을 벌기위해 일하고, 아침 식사거리를 사기 위해 돈을 번다는 식)
둘째, 모든 행위의 목적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선이라는 것이 존재 한다면, 우린 그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래야만 그것에 우리의 모든 행위를 맞출 수 있고, 비극적인 일을 당한다든가 삶을 낭비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 행위가 추구하는 목적이 행복이라는 점은 보편적으로 합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간의 선이다. 즉, 우리는 어떤 다른 것을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행복 자체를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에 관해 철학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냥 행복이 궁극적인 선이라고 말한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합니다. 행복의 본성을 정의하기 위해 자신의 형이상항적 구조를 전개 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는 마치 칼이나 도토리의 기능은 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
이 복잡한 정의를 이해하려면 ‘덕’이란 무엇이며 덕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알아야 할것입니다.
-엘리트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이루려면 일정한 물질적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가 말하는 조건은, 우리는 좋은 친구들, 재산, 정치 권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신분이 좋아야 하고 성장 과정과 외모도 좋아야 한다.(외모가 아주 추한 사람은 행복하기 어렵다) 또 키가 너무 작으면 안된다, 나아가, 우리는 육체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야 한다.(기술자나 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덕을 실현할 수 없다) 여기서 보듯이, 엘리트주의적 편견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가 말하는 덕이라는 개념을 알아 보겠습니다.
덕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아레테arete인데, 이말은 ‘우월성’ 으로 번역할수 있습니다. 아레테는 어떤 행위나 노력, 대상을 성공적인 행위나 노력, 대상으로 만드는 성질을 가르킵니다. 그러므로 아레테는 실용적인 우월성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 두가지로 나눕니다.
지적인 덕은 상속 재산과 교육의 결합으로 얻어지며, 도덕적인 덕은 모방, 실천, 습관을 통해 업어 집니다. 우리가 지니게 된 습관은 성격의 상태, 즉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결정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행동이 ‘중용’에 일치할 경우에 그 성격의 상태를 ‘덕’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비겁한 행위 -
위험에 처했을 때 과도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나친 공포를 드러낸다든가 하는경우
무모한 행위 -
반면에 지나치게 두려움을 모르는 경우
용기 있는 행위 -
적당한 정도의 두려움을 보이면서 온건하게, 즉 덕스럽게 행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도덕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런식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수학적으로 계산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 선택은 항상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여러 가지 시행 착오를 거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지적인 덕에는 현실적인 지혜와 철학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지혜는 각각 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이므로, 그것은 도덕적인 덕과 관계가 있습니다. 철학적인 지혜는 학문적이고 성찰적이며, 현실의 이해 관계와 무관합니다. 그것은 순수 이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능력이란 주로 인간의 것이므로 철학적인 지혜야말로 가장 높은 덕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덕에 부합하는 영혼의 행동”이라고 정의할 때 그 행동이란 철학적 행동을 가르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견해는 도덕적 견해에 따르고 있습니다. 행복이 인간 개인의 기능이나 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그런 기능이라 말합니다. 인간에게 사회적 본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국가(polis)는 시민들의 행복을 극대화 하는 목적을 지닌 자연스러운 인간 조직. 사실, 국가는 가정보다도 더 자연스럽다.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만 인간 본성이 완전히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에서도 목적론이 지배하고 있다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 구조의 기반에 따라 국가의 종류도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공동 복지를 도모하는 구조여야만 정당한 국가라고 말합니다.
군주제 - 한사람에 의한 정치
귀족제 - 엘리트 집단에 의한 정치
공화제 - 시민들이 직접 담당하는 정치(제한적 민주제)
특정한 상황의 경우에 군주제도 좋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시민들 개개인이 모두 뛰어날 수는 없기에 공화제를 선호 하였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집단 전체로 보면 소수의 선한 사람들보다 한데 뭉친 다수가 얼마든지 더 나을 수 있다”
위 정치상황을 왜곡화 시키면 군주제는 전체정치, 귀족제는 과두 정치, 공화제는 민주 정치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은 오늘날로 치면 수정된 민주주의에 해당하지만, 그가 말하는 국가내의 분업은 플라톤의 주장만큼이나 가혹합니다.
- 미메시스mimesis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기능이 미메시스, 즉 모방(현대식으로는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견해를 같이 합니다.
그러나 예술 속에 표현된 대상의 지위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릅니다. 예술은 사물이나 개체를 단순히 모방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진리를 표현하므로, 예술은 좋은 것일 경우에 철학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위대한 예술은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는 커녕 감상자의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열정을 ‘정화’할 수 있다. 비극예술의 경우에는 그 효과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연극에서 나오는 연민과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그러한 감정들이 카타르시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만 기여한 게 아니라 미학과 정치학에 관해서도 중요한 글들을 남겼습니다. 나아가, 그는 혼자 힘으로 논리학, 즉 타당한 추론의 학문을 창시 했습니다. 상징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시대보다 훨씬 나중에 발달한 것이지만, 여전히 논리학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하는 바가 클 뿐더러 그의 연구를 수정한다기보다는 추가하는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용어 정리
형상forms(이데아) - 플라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등장하는 개념. 플라톤은 물리적 혹은 개념적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것이 형상에 의존한다고 보았으며, 형상은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실재의 모델(본질, 보편자, 원형)이라고 말했다. 형상은 영원 불멸하며, 모든 참된 철학의 궁극적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상을 사물의 본질이라고 보았지만, 그는 형상이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내부에 있다고 말했다. 한 대상의 형상과 기능은 궁극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질료(質料) - 원어 필레이는 숲의 나무라든가 재목의 뜻이지만 바뀌어 재료·소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형상(形相)의 대(對)개념, 또는 상대적인 원리이며, 사물의 실체-본질을 형상인(形相因), 기체(基體)가 되는 것을 질료인(質料因)이라고 한다. 이 양자가 결합하여 개별적인 것이 성립한다. 하나의 금반지라면 금은 질료요, 원형은 형상을 말한다.
본질essence - 대상이나 개념의 본성과 정의를 이루는 속성,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합리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웃거나 낯을 붉히는 행위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인간의 본질은 아니다.
실체substance - 철학에서 실체란 전통적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독립적인 실재라고 간주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것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실체라고 불렀다. 예컨대, 말이나 사람(아리스토텔레스가 든 예)은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있지만, 말의 색깔이나 사람의 크기는 그럴 수 없다. 17새기와 18세기의 합리론자들은 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실체의 개념을 지나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는 세계에는 단 하나의 실체, 즉 신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신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버클리가 물질적 실체를 비판하고 흄이 정신적 실체를 비판한 이후에 실체 개념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칸트에게서는 다시 실체가 등장하지만, 그는 그것을 근본적 실재가 아니라 인식의 한 범주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논리학logic - 타당한 추론의 구조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 논증의 내용보다는 논증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분야다.
카타르시스catharsis - 위험한 감정들을 정화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 예술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냉수 샤워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는 이론도 있다.
이상으로 BC5~BC4세기 아테네 시대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 해봤습니다.
글이좀 어려우실겁니다. 하지만 몇번 읽다보면 익숙해 지실것입니다. 현대시대에 다 녹아든 이야기 이며 우리가 이야기 할때의 생각의 뿌리이며 서양 사상의 토대 입니다.(우리또한 서양문화를 받아 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철학을 이해 할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정도 잡지식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요즘 너무 생각없이 하는 말들과 철학없는 생각들이 난무합니다. 한번웃고 지나갈수도 있는 말들이 많지만 진지한 생각속에 말이 나오면 그 사람에게 품격있어 보입니다.
다음은 아테네 학당 마지막 시대인BC3~BC4세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시대 이후 철학과 예술의 암흑기인 종교의 시대가 찾아 옵니다. 어찌보면 이전 시대가 가장 철학과 예술이 발달한 시대라고 보시면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