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거리
2006/09/15 03:22
http://blog.naver.com/anjunhyeong/60028695331
<<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m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35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것은 100개이상이다. 평균 25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모든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것 이라고 발뺌 하였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청동기 만들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주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단군 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며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밝혀질 일이다. 아무튼, 고구려 및 고조선 등과의 연관성은 배제하더라도, 중국이 이 유적들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주 :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 만주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른바 '황하문명'의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 오래된 청동기는 4200년전 것이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 역사서 들에서 보아도 고구려는 민족이 백제 신라와 같았고 말(언어)도 같았음. 한민족의 문명이 중국보다 빨랐고 중국 문명은 한민족의 문명을 받아서 된 것이라 하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강: 중국 신화통신이 위의 사실을 극히 일부 밝힌 내용 -
위사진은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 이다.위의 피라미드들과 모양은 같은데 크기는 차이가 많이 난다. 이를 보아도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쭝국당국은 고조선 고구려역사를 쭝국역사라 우기는 것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의 배달한국 고조선의 피라미드들을 대대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려 하고 있다. 봐라 우리가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라고... 그리되면 한국인들은 선조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등신들이 될 것이다... 물론 그리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에서 발견된 괴 피라미드들의 이야기
과연 중국에 높이 300m의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설화는 사실일까요?
현재까지 이집트와 남미등지에서만 발견된 피라미드가 중국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독일의 고고학자 할트위그 하우스돌프씨 라고 합니다
.
중국의 시안지방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고대 황제의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들의 숫자는 무려 15개가 넘는다고 하며,
이는 1945년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의 피라미드는 전세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있다고 하며,
그 이유는 중국의 공안 당국이 피라미드 근처의 모든 지역을 외국인 출입 금지지역으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63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탐사된 피라미드는 당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오판 되었다고 하나, 1973년 에 실시된 카본 대이팅 실험에 의해 괴 피라미드는
진시황보다 수천년이 앞선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일인 여행객으로 가장한 하우스돌프씨는 자신을 초청한 중국인이
시안시의 관광부장관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외국인출입금지 지역을 탐사 할수 있었다고 하며,
그는 당시 피터 크라사라는 독일인 친구와 동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외국인 고고학자가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와 사진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중국의 공안당국은 하우스돌프씨의 카메라를 빼앗고
모든 필름을 검증 하였다고 하나,
당시 피라미드가 담긴 필름들은 모두 발각되기전 독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카메라를 세관에 빼앗긴뒤 통역관과 같이 인근의 농부들에게 피라미드에 관한
질문을 한 하우스 돌프씨는, 피라미드 옆에 집을 짓고 사는 농부들 조차
자신의 옆에 있는 거대한 유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기괴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4년 독일로 다시 돌아온 하우스돌프씨는 "하얀 피라미드"란 고고학 서적을
출간하여 유럽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림설명: 피라미드앞에서 밭을 갈고있는 농부의 모습)
과연 위의 피라미드들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것 일까요?
중국의 공안당국은 어떤 이유에 의해 타국인들이 피라미드를 탐사하는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일까요?
신비를 드러내는 동방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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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안에 존재하는 피라미드
중국에도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이 사실을 여태 중국 정부는 숨기고 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 해야 할 사실을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Haus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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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네티즌들에게 "만주 피라미드"의 존재 여부를 논하는 큰 이슈가 된 사진이 하나 있다. 다음은 그 문제의 사진이다. 아래 사진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전혀 아니면서, 우리 한민족처럼 생긴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이어서 너무도 친근감을 준다.
이 사진은 독일의 학자인 하우스도르프(Hartwig Hausdorf)에 의해서 찍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에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실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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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서양에 제보되었던 중국의 피라미드
ⓒ 나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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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당시 중국 서안(西安: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을 비행하던 비행하던 미공군 조종사는 눈 아래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트처럼 생겼다. 그는 얼른 카메라에 담아서 신문사에 기고했다. 이 사실은 “미국조종사의 시안 서남쪽 외딴 산의 거대 피라미드 발견”란 제목으로 『뉴욕타임즈』에서 보도된 바 있다.(1947.3.28)
그러나 당시 중국 당국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해당 지역에 외부인의 통제를 금지시켰다. 공식적인 외교 사절을 통해서 중국 내륙의 피라미드에 대한 탐사를 요청하는 각국의 언론도 묵살했다. 이 사진 이후로 중국에 존재하는 피라미드는 사실상 잊혀져 갔고, 전설이 되어 갔다.
● 중국의 피라미드를 서양에 제보한 하우스도르프
그러나 호기심 많은 서양인들은 더욱 궁금해했고, 비밀탐사까지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1994년 3월, 하우스도르프는 친구와 함께 비밀리에 촬영하여 마침내 북중국의 ‘하얀 피라미드(White Pyramid)’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런 피라미드가 100개도 넘게 있는데, 개중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쿠푸왕 피라미드(146.5m)보다 두 배 이상 높은 300m 이상의 것도 있었다고 한다. 또 근처에서 만난 한 승려는 이 피라미드가 대략 5천여년 전의 것이며, 자신의 사원에 있는 매우 오래된 고서古書에서 이 피라미드를 당대의 명승고적으로 소개한 것을 보았다 했다. 이런 사실을 듣다보면, 지금의 꽉 막힌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고대의 신비스런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하우스도르프에 의하면, 고고학자 왕시핑Wang ShiPing 교수는 서안 일대에 피라미드가 처음 세워진 시대를 4,500년 전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바로 동방족 성황들이 중원문화를 개척하던 무렵이다. 현재 서안 서쪽에는 강(姜)씨의 시조로 동방 동이족의 성황으로 알려진 염제 신농씨의 탄생지인 보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그 피라미드가 만주에 있냐, 중국 내부에 있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 역사 기행을 하다 보면 깊은 숲속에 숨겨진 거대한 고대 유적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규모가 큰 유적들은 대개 그 지역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중국당국은 자랑스럽게 공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삼엄하게 통제하며 감춰두고만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중국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문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나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피라미드 배경의 밭가는 소" 사진은 일부 네티즌들에 의해서 만주에 존재하는 피라미드냐 아니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진 경향이 있다. 중국 내륙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한민족과 관계가 없는데, 왜 한민족의 원류인 동이족과 연관을 시키려고 하느냐는 일부 네티즌들의 반론이 있기도 했다.
● 만주에 존재하는 진짜 한민족 피라미드
그러나 세계 학자들의 개방 요구가 높아지자 최근 중국에서도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대표적인 통신사인 신화통신은 만주에서 5,000여 년 전의 피라미드를 발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2001.7.9)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7개의 묘장과 제단이 있었고 별자리와 관련된 글자가 나왔다 한다.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 곽대순(郭大顺)은 이것이 요령성, 하북성, 길림성 인접지역에 주로 분포하던 홍산문화의 유물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피라미드의 사진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에게 문의를 해서 찾아보기를 문의를 해보았으나, 그도 찾지 못했다. 그가 전하길 중국에서는 인터넷을 단속해서, 동이족의 문화와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가 유통되는 것을 단속한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 러시아에 의해 발견된 티벳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티벳 지역에도 엄청나게 존재했다. 중국 정부에서 공개를 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황당하게도 티벳 지역의 피라미드는 중국 과학자가 아닌, 러시아 과학자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티벳 서부에서 100여 개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 무리를 발견했다고 제보했다.(중앙일보 2000.7.5) 100개가 넘는 대규모 피라미드 유적이라면 이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이 사실을 보도한 러시아의 유력 주간지인, 『논증과 사실(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18, 19호에서는 티벳의 피라미드뿐 아니라 티벳에 깊이 뿌리내린 신교문화의 흔적도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티벳의 전설에 따르면 “신의 아들이 지상에 출현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지상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라고 한다. 이것은 배달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와 신의 도시인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것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는가? 또 “티벳의 라마승에 의하면 그들의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고대 옛 문명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라고 한다. 치우천황을 이은 15대 환웅인 치액특(蚩額特) 천황 때 티벳을 개척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옛 문명’이란 배달국에서 전수된 신교 문명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티벳은 한민족과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언어만 보더라도, '할머니→할매', '할아버지→할배', '부엌→정지', '밥 먹었나→밥 무운나'처럼 비슷한 말을 쓰고 있고, 한민족 특유의 삼태극 문양을 쓰고 있다. 고대에 티벳은 환국, 배달시대 신교문화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흥미롭게도 서안, 만주, 티벳 지역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들에서 몇가지 공통점이 나타난다.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이집트의 초기 피라미드 그리고 중국 지역의 피라미드들은 모두가 계단식으로 구성되었고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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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의 고구려 고분군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나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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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와 유사한 피라미드가 우리 역사에도 보인다. 중국 집안(集安)의 유적들 중 가장 경이로운 것은 12,358기나 되는 고구려의 무덤떼이다. 일본인 한 학자가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고 했는데,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하여 삼신상제신앙을 하는 신교문화의 흔적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이 중 중국 학자들에게 ‘동방의 피라미드’(東方金字塔)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찬사를 받는 장군총을 보자면,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옆에는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소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거느리고 있듯, 장군총 주변에도 작은 고인돌처럼 생긴 무덤의 수호자 배총(陪塚)과 12개의 호석(護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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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총
광개토대제의 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중국학자들에게는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운다.ⓒ 나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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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중동과 중국 일대에 발견되는 피라미드와 고구려 장군총을 살펴보면서, 그 밑에 감춰진 신비스런 배달국과 환국의 존재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동방의 피라미드의 정체 역시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원래 인간문화의 뿌리, ‘기층(基層)문화’는 땅 속의 뿌리처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비스런 고대의 문화가 파괴되면서 그 자리에 '이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historical) 시대가 펼쳐지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명이란 깊고 깊은 인간 정신의 심연 중에서도 얇은 껍질에 불과한 '이성' 편향이 아니던가?
고고학의 마지막 개척지는 바로 인류 문명의 시원지인 천산 동쪽의 환국과 동방의 배달 조선이란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여태 감춰져 있는것은 분명하고 또 앞으로 드러나게 될 것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이나, 서남공정이니, 중화문명시원공정이니 수많은 공정(工程)을 돌려서 자기들 입맛대로 채색을 한들 때가 되면 드러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순전한 마음으로 믿는다.
● 참고문헌
* Hartwig Hausdorf, 『Die Weisse Pyramide』. 이 책은 94년 발간된 이래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김상일,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347~378쪽. 50년대 미공군 비행사에 의해 촬영된 중국 피라미드의 존재를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싣고 있다.
(출처 : '중국에서 발견되 피라미드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 네이버 지식iN)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檀君王儉이 阿斯達에 도읍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桓雄이 「弘益人間」의 理念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頂 神檀樹下에 내려와 이곳을 神市라 하고 그를 桓雄天王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風伯(風神) 雨師(雨神) 雲師(雲神)의 三神을 거느리고 主穀 主命 主刑 主善惡등 무릇 人間三百六十餘事를 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觀念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百事를 주관하는 守護神的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守護神의 住處는 곧 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仙王堂(서낭당)은 즉 天王堂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神壇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神市였던 것이다.
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樹木자체가 神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神壇樹는 天神 天王의 降下階段, 혹은 天王의 住處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國號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朝鮮은 후에 이르러 「阿斯達」을 雅譯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大 논문집(社會科學)제2집에 「阿斯達과 朝鮮」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古記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古記에는 熊이 女神으로 化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年來 주장해 오고 있다.
즉 熊을 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地上族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天上族, 天神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開天節이라 하여 단군의 開國日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十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落種(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神에게 年事의 豊登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落種期의 祭典을 五月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天神에게 제사하고 歌舞와 飮朱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君民이 同樂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端午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神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五月祭 十月祭의 遺風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上,高,山,神 등을 의미하는 古語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譯으로 볼 수밖에 없다. 夫餘의 迎鼓祭, 高句麗의 東盟祭, 東濊의 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燃燈大會, 八關大會도 春冬二期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仲冬八關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檀君立國의 開天節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不安定監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顯正會理事 李喜秀씨가 1977년 10월 「顯正誌」에 「史書上에서 본 國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이 지금은 없어진 「古記」와 「舊三國史記」와 현존 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魏書의 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史記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記載를 제외하였지만 同書卷十七 高句麗本紀五 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惑云이하의 王之는 王노릇을 하였다는 動詞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의 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이라고 連書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平壤은 지금의 평량(平土良)이 아니라 고구려의 黃城(皇城, 즉 丸都城)의 對岸인 東黃城(今江界)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樂浪郡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前後者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平壤은 다른 곳
金富軾과 같은 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金富軾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仙人王儉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內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王儉城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地理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古記에는 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高句麗에 金春秋가 갔던 西紀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金富軾이 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二一年書二月條에서 「평량은 본래 仙人王儉의 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古記이거나 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金富軾은 三國史記에서 新羅의 六村도 朝鮮의 遺民이 山間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三國史記 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一然이 인용한 古記의 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金富軾이 평량이 仙人(檀君)王儉의 宅이라고 명기한 데서 古記가 檀君記事를 實載하였다고 볼 수 있다. 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古記를 들먹여서 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國難을 겪으면서도 檀君廟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檀君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戊申6월條에 柳寬의 上書를 보면 文化縣 九月山 東嶺허리에 神堂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北壁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文化縣 사람들은 이를 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寬은 그 上書중에서 「九月山은 縣의 主山이던 檀君朝鮮 때에는 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 新羅에 와서 闕山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文化縣을 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高麗때에 儒州監務로 하고 후에 또 文化縣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闕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首의 시에 나타나
文化의 동쪽에 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父老들이 전하기를 檀君의 都邑地라고 한다‥」하였으며 「九月山下에는 桓雄을 南面으로 모시고 東西向으로 桓因과 檀君을 모신 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檀君이 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世宗18년 丙辰 12月丁亥條 柳思訥(柳寬의 조카)의 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古記 檀君記 외에 歌詞형식으로 된 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柳思訥은 漢城府使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臣이 檀君世年歌를 보니 檀君은 朝鮮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沒함에 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朝鮮世宗代까지 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 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柳寬의 上書에 따르면 三聖堂은 黃海道 九月山 東嶺에 있다. 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父老들로부터 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三聖堂에 桓雄天王을 上座에 모셔서 南面하게 하고 東壁에는 桓因天王을 모셔서 西向하게 하고 西壁에는 檀君天王을 모셔서 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 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文獻備考 卷64 札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황해도 文化縣 九月山에 있으며 桓因 桓雄 檀君을 모셨으며 春秋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조 成宗13년에 황해도 관찰사 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九月山에 三聖廟를 세우고 평낭(土良)의 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42 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桓因 桓雄 檀君의 祠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東國輿地勝覽 卷51 平낭條」에 보면 두 首의 詩를 통하여 「開國한 지가 멀고 먼 檀君은 朝鮮始祖이다. 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堯와 함께 開國하였다고 들었으니 去今 四千年이며 檀君廟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主體思想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廟를 세우고 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國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祠堂 지어
文獻備考 卷13 輿地考1 歷代國界1에서는 檀君朝鮮國을 첫머리에 싣고 遺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白嶽은 지금의 文化縣이며 九月山의 본명은 闕山인데 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闕山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九月山의 藏唐京은 또 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司은注簿 鄭陟(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箕子祠堂에 가보니 箕子의 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西向하였다. 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唐堯와 같이 입국하였고 箕子는 武王의 명으로 朝鮮에 봉하여졌으니 帝王曆年數로 보더라도 帝堯에서 武王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箕子가 북향하여 南面하고 箕子보다 앞서서 立國한 檀君을 東쪽에 配享하는 것은 立國傳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臣이 本朝의 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檀君祭의 陳設圖에 이르기를 「神位는 堂의 중앙에 모셔서 南面토록 되어있으며 臣이 箕子祠에서 본 西向의 坐는 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箕子와 나란히 南向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上座에 箕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立國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箕子祠堂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檀君祠堂을 지어서 단군을 南向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祀儀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札曹에 명하여 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國祖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箕子보다는 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檀君의 祭享이 끊어진 것은 日帝 때부터였다고 본다.
檀君朝鮮 연구 숙제
三國遺事의 檀君記載는 他書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一然이 인용한 古記도 金富軾의 인용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金富軾도 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古記에는 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檀君의 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檀君의 祠廟祭天壇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享檀君陳設圖가 世傳되어 왔고 그것은 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朝議에 의하여 建廟 奉祭祀했던 것이다. 만일 檀君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檀君과 檀君朝鮮에 관한 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에서 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金富軾의 事大的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夫餘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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