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특집 단편 - 저주받은 집.

베재댜겨 작성일 08.05.27 00: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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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하얀 나비 검은 나비...


나비는 할머니가 붙인 이름이다. 아니, 할머니에겐 세상 모든 개는 바둑이고

모든 고양이는 또 나비니까... 할머니가 붙였다기 보다는 나비가 그 이름에

적응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가족들이 이름을 고민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을 못참고 이 작고 귀엽고 새까만 고양이는 자기의 이름을 나비라 결정해

버렸다. 할머니가 붙이고 고양이가 결정한. 나비.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이녀석을 처음 데려오던 날이 기억난다. 누나 품에 안겨 있던 이놈을 처음 보았

을때 아버지는 무심했고 어머니는 걱정했고 나는 반색했다. 위생이 털이 먹이가

이런저런 걱정거리들이 나열되고 있을때 나비는 누나의 품에서 꼬물거리며 땋은

머리 한쪽을 가지고 놀았고 그 귀여운 모습에 가족들의 고민은 순간 펑 증발해

버렸다. 


나비야.. 나비야..


가족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나비를 보고 있다. 입에서 검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다. 한쪽 눈은 뜨고 있지만 촛점은 없다. 누나는 울며 쓰러졌다.

아버지는 달력을 한 장 찢어 나비를 덮는다. 그리고는 커다란 봉지를 가지러

주방으로 간다. 사람이 저렇게 매정할수가. 냉정할수가. 자. 망연자실 서 있는

내게 아버지가 검은 봉지를 내민다. 저렇게 매정할수가. 냉정할수가. 어머니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른다. 받아.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받아든다. 아버지는 돌아

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나와 어머니는 같이 운다. 할머니는 반응이 없

다. 머리부터 검은 봉지를 씌워내리는 내 손등에도 뜨거운 눈물방울들이 후두둑

쏟아진다. 나비야.. 나비야... 편하게...


고양이가 죽어서 그런가. 우리 집에 저주가 내렸다. 아니 저주가 내려와서 고양

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현관 문 고리를 뜯고, 안쪽에서 잠글 수 있도

록 거꾸로 달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 집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고. 전화도

무엇도 할 수 없다고. 그저 이 저주가 사라질때 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자며 우

리를 몰아세웠다. 며칠 후 숨겨놓았던 전화기를 찾아 어디론가 몰래 전화하던 누

나가 발각되었고, 호되게 뺨을 몇 차례 얻어맞은 뒤 방에 '감금' 되었다. 그때 누

나의 눈빛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 누나. 십수년을 같이 살았던 우리.
 
누나. 가 저런 섬뜩한 눈빛을 보일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내 가슴에

화상처럼 눌러붙었다.


그 후로 몇 달, 그리고 오늘. 난 자살을 결심했다. 내 인생 가장 극적인 결정이자 

가장 적극적인 해결방안. 자살. 파랗게 날이 선 과도를 보고 있노라니 웃음도 울음

도 아닌 괴이한 소리가 입술 새로 미어져 나왔다. 이상했다. 죽기로 결심하자 거짓

말 처럼 그 간의 일들이 용서가 되었다. 아버지가 준 검푸른 멍도, 누나가 준 날카

로운 자상도, 엄마가 주고 또 부목까지 해 준 왼팔의 골절도. 모두 용서가 되었다. 

그래. 이것이 내가 이들을 용서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이다. 죽자.


손목을 그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머리 속에서 보여준 희망적인 환상일

뿐 이 집착 강한 육체는 피부 위로 얕은 생채기들만 내어 놓았을 뿐이다. 도대체

난 무엇에 미련이 있는지. 이 무시무시한 삶에 무슨 미련이 있는지. 오늘의 결심

은 아마 내일로 또 내일로 미뤄질 것이다.


먼저 성공한 사람은 할머니었다. 무슨 힘이 나셨는지, 절망이 그 불쌍한 노인

에게 역전의 힘을 주었는지, 할머니는 한쪽 손목이 덜렁거릴 정도로 깊은 상

처를 냈고 편안한 죽음을 달성하셨다. 창백해진 얼굴에서 미소를 본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일순간 분노가 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듯 했다. 누나에 이어 내가 감금되었고, 내 경우에는 휴대폰이 아니라 과

도를 빼앗겼다. 아니 집안의 모든 날카로운 도구들과 둔기가 될 만한 공구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먼저 행하지 못한 비굴의 소치로서 우리에겐 더

더욱 힘든 날들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모두들 이 소름끼치는 진실 앞에 더

욱 사무쳐 몸을 떨거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잠을 자지 않는것 같았다. 약의 도움인지 무엇인지, 좀처럼 기회를 주

지 않았다. 맨손으로 죽는다는건 너무도 힘든 일이다. 이 힘든 일을 더욱 많은 

용기를 짜내 실행할때 마다, 여지없이 가족들에게 발각되게 마련이었고 순서야 

어찌되었든 매타작을 당한 뒤 마지막 코스로 아버지의 응징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들이 병원에도 약국에도 가지 않고 숨을 이어갈 수 있는게 오히려 위대하게

보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야만스러운 짐승의 생존본능인가!


얼마 후 누나와 어머니가 성공했다. 극적이었다. 실로 극적이었다. 입고 있는 옷

을 벗고 찢고 또 엮어 굵은 똬리를 만들고, 서로의 목을 졸라 죽고 죽은 것이다.

실로 극적인 장면이 바로 이것이다. 동시에! 동시에 죽은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

오히려 깊은 경외심이 느껴졌다. 옆에 아버지가 없었으면 박수를 쳤을지도 모르

는 일이다. 아버지는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이 모든게 자기 탓이라 

중얼거리며 시체를 수습했다. 그래 봤자 침대위에 구 두를 나란히 놓는 것 뿐이


었지만. 죽음 앞에서 또 열없이 관용스런 맘이 된 내가 아버지 탓 만은 아니라고... 

이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주어진 저주받은 운명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일시적인 감정에 흔들리는건 남은 둘 사이에서 일어날 일을 미루어 봤을때

코미디 보다도 더 코미디 같은 일이 될 것 같아 관두었다.


예상대로, 난 발가벗겨졌다. 나 마저도 같은 방식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아보겠다

는 아버지의 조치였다. 억울한 것은, 본인은 멀쩡히 차려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

렇게 죽음을 갈망하는 나와, 저렇게 삶을 갈망하는 아버지를 비교해 보자니 그 아

이러니 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라도 해서 살고 싶은가 보지. 흉기도 약도 심

지어 옷도 빼앗고, 자기는 저렇게 아둥바둥 악물고 살고 싶은가 보지.


마귀를 물리쳐 달라는 아버지의 기도도 더이상은 없었다. 내 방문 앞에서 서성이

는 소리와 가끔 격정에 겨워 벽을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굉음만이 날 괴롭힐 뿐이

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편안한 죽음을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하면

그가 눈치도 채지 못하도록 죽을 수 있을까. 


그래. 혀를 깨물자. 그래! 왜 이 방법을 진작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도구가 없어도

인간은 죽을 수 있다. 그 끔찍한 고통만 참아낸다면, 그 끔찍하지만 잠시간의 고

통만 참아낸다면, 금방 편안해질수 있다. 힘껏 방문을 차 문고리를 떨궈낸다. 이런

허술한 장치로는 나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 앞 선 예를 보고서도 왜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단 말인가? 이제 끝내자. 마지막이다. 아아 마지막.


심호흡을 한다.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집어넣어 혀를 길게 빼냈다. 곧 펼쳐질 광경

이 번뜩 머리속을 스치자 엄청난 떨림이 찾아왔다. 콰직. 하는 불쾌한 소리가 들리

는가 싶더니, 입 속으로 피 냄새가 밀려왔다. 선홍빛의 피가 입에서 흘러내려 아버

지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처럼 편안하게 죽을 것이지. 어떻게든 막아 보

겠다고,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다고... 내게 이런 괴로움을 주다니. 그 댓가다. 

그 댓가다. 


앞 선 그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나의 선물.

사랑하지만 저주받은 가족을 위한 나의 선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그에게서 숭고

함이 느껴졌다.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오래 닫혀져 있던 현관문을 열고... 비로소 난 세상으

로 나왔다.


제일 처음으로 할 일은, 슈퍼에 가서 검정색 큰 비닐봉지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는 것이다. 많이. 많이. 나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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