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교황의 성생활

향수_ 작성일 12.12.21 03: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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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타락한 교황은 누구일까?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3대에 걸쳐 짐승같은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난잡한 성생활과 온갖 변태행위로 수 많은 사생아를 낳게 하였으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딸까지 남자의 침실로 밀어넣었던 교황.

그가 바로 알렉산더 6세(1492~1503)이다.

 

알렉산더 6세는 1431년에 로드리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발렌시아의 대주교 알폰소 보르하였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여동생이었다.

로드리고는 어렸을 때부터 난폭하여 12세 때 친구를 칼로 살해하였으며,

난잡한 성생활로 적어도 여섯 명 이상의 사생아를 낳게 했다.

 

1455년 그의 아버지가 교황에 오르자, 당시 25세였던 로드리고는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임명된다.

이때 로드리고는 스페인의 과부와 그의 두 딸까지 농락한 후 과부가 죽자,

큰 딸을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또 그는 1461년 로마에서 18세의 아름다운 소녀 로사를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교황을 두려워하여 그녀를 베니스로 이주시킨 후 약 20년간 왕복하면서 네 아이를 낳았다.


 

교황 이노센트 8세(1484~1492)가 죽었을 때, 로드리고는 막대한 재산을 다 팔고

그 돈으로 교황 자리를 사려고 하였으나 마지막 한 표가 모자랐다.

그는 한 표를 돈으로 사려고 하였는데 그 한 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베니스의 한 수도사였다.

그 수도사는 거금과 함께 로드리고의 12살 된 딸 루크레씨아와의 하룻밤을 요구하였다.

로드리고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22명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고 교황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1492년 교황이 된 로드리고, 즉 알렉산더 6세(1492~1503)는

이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거칠것이 없게 되어 그의 생활은 더욱 문란해졌다.

15세의 한 소녀는 교황과 하룻밤에 11번의 관계를 가진 후 열을 내고 쓰러져 죽기도 하였다.

교황은 뻔뻔하게도 그 장례식에 가서 소녀의 명복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교황은 즉위하자 마자 로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17세의 자기 아들 세사레를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둘째 아들 후안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교황은 누구의 말도 듣지않고, 자기의 체면이나 성스러운 교황의 직책에 별 관심 없이

바티칸 궁정으로 첩들과 딸 루크레씨아를 불러들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위해 팔아치웠던 궁전 및 성들을 회수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하루에 평균 14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살인범들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고

성직(聖職)과 성물(聖物)을 매매하였으며 돈을 받고 근친상간을 눈감아 주었다.

한 귀족은 24,000개의 금판을 주고 자기 여동생과의 성교를 허가받았으며

발렌시아의 추기경 피터 멘도자는 교황에게 돈을 주고 미소년을 입양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로사의 나이가 많아지자 교황은 아름다운 소녀로 이름 난 15세의 귤리아를 손에 넣었다.

위조죄로 걸린 그녀의 오빠 알렉싼드로를 용서해 주는 대가로 그녀를 차지한 것이다.

이후 교황은 귤리아와 오르시노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고 신부와 함께 초야를 치렀다.

이것은 그녀의 오빠가 교황과 사전에 합의한 법칙이었다.

그 이후로 알렉싼드로(19세의 소년)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는데,

나중에 그는 교황 바오로 3세(Paul 3 ; 1534~1549)가 되었다.

 

귤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부 또는 교황의 창녀로 알려진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그녀를 한번이라도 본 로마인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만다고 한다.

 

교황과 귤리아 사이에 난 첫 딸을 교황은 오리시노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그 아이를 본 플로렌스 출신의 대사는 그 딸이 너무나 교황과 닮아서

그녀는 교황의 딸임에 틀림이 없다고 자기 집으로 보낸 편지에 기록하고 있다.

 

귤리아는 자연히 궁중에 사는 교황의 딸 루크레씨아와 친해졌다.

루크레씨아는 아버지 덕택으로 12살 때부터 남자를 알게 되어 자기 아버지 못지 않게 남성 편력이 심했다.

두 미녀들이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교황은 딸을 결혼시키기로 하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 차례의 약혼을 했으나 더 좋은 신랑감이 나타나면

교황은 주저없이 파혼하고 딸을 새로운 신랑감과 약혼시켰다.

그 가운데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스페인의 돈 가스파로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교황은 막대한 금화를 주고 돈 가스파로를 설득한 후 피사로의 귀족 스포르싸와 결혼시켰다.

 

성대한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루크레씨아와 신랑은

교황과 오빠 세사레가 지켜보는 가운데 초야를 치러 그들의 관음증을 만족시켜야했다.

결혼 후에도 루크레씨아는 신랑을 따라가지 않고 바티칸에 남아 밤이고 낮이고 외출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다가 얼마 후 귤리아와 같이 남편의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동안을 참지 못한 교황은 그들을 불러오기 위하여 교황령까지 내렸다.

 

교황은 자기 아내를 보고 싶어서 들른 귤리아의 남편 오르시노까지 협박하는 소동을 벌였다.
그는 자기의 소유물이었던 두 미녀들, 즉 귤리아와 루크레씨아가 새로운 애인들을 만난다든가

그들의 남편들과 재결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황은 그들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일주일 이내에 또 다른 세 여자를 불러들였다.

이들은 발렌시아의 수녀, 카스틸의 15세 소녀, 베니스의 16세 소녀들이었다.

 

 

이를 보다못한 프랑스 왕 챨스 8세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로마의 성 밖에 도착하여

교황을 간통, 근친상간, 살인 등의 죄를 물어 교황청에서 쫓아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때 아들 세사레 추기경이 저항하다가 생포되자 어쩔 수 없이 교황이 로마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찰스 왕은 안전을 이유로 교황의 아들 세사레를 인질로 끌고 갔다.

 

이 시대에 매독이 유럽 전역에 퍼져 1494년에는 교황청까지 침략하였는데,

당시의 유럽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벌이라고 하였다.

교황과 아들 세사레는 물론 교황의 가족 및 첩들까지 총 17명이 매독에 걸렸다.

 

지롤라모 수도사가 이것을 지적하고 성직자들을 비난하자 교황이 함구령을 내렸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그에게 추기경 자리까지 주겠다고 설득하였다.

그것마저 거절당한 교황은 지롤라모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고 그의 죽음을 축하하였다.

 

또한 교황은 그동안 수녀원에 가있던 루크레씨아를 교황청으로 불러들여

교황이 임명한 조사위원회에서 자신이 처녀라고 선서하게 하였다.

내막을 잘 알고 있던 조사위원회가 교황에게 난색을 표했으나

결국 그의 압력으로 딸의 혼인이 무효 처리되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루크레씨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교황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그녀의 오빠 세사레는

교황청 시종을 임신의 범인으로 몰아 그를 칼로 찌르고 강에 던져버렸다.

죽은 시종의 처는 교황의 차지가 되어 그의 아이를 낳았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루크레씨아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아이가 죽은 시종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달랐다.

나중에 밝혀진 두 교서에는 각각 교황과 세사레가 그 아이의 아빠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중세라고 해도 이 얼마나 추악하고 짐승만도 못한 짓인가?

 

 

간디아의 군주가 된 교황의 둘째 아들 후안은 12살 되던 해인 1493년에 스페인의 공주와 결혼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취향을 잘 알던 그는 성스러운 신앙의 이름으로 미녀들을 끌어들여 교황청에 공급했다.

교황은 스페인의 소녀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후안은 그의 사랑을 독점하였다.

 

그러자 맏아들 세사레는 자신보다 더 많은 미녀를 공급하는 동생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칫하다간 후계권을 후안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마침내 어머니 집에서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동생이 길에서 살해당했다.

그것도 목에 8번이나 잔인하게 칼에 찔렸으며 몸에 돌이 매달린채 강물에 던져졌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이런 세사레의 무자비한 모습을 모델로하여 군주론을 펴냈다.

그는 국가의 이익과 통치자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도덕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국가권력론, 다시 말하면 국가통치에는 권모술수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박카드(Buchard)의 기록에 의하면 피 보기를 즐긴 세사레는 자기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하여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울타리를 치게 하고, 남녀 죄인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끌고 나오라고 한 후에

완전무장하고 말을 타고 질주하면서 칼로 찌르고, 또 일부는 총으로 쏘고 그래도 모자라서 말로 짓밟았다.

이를 교황과 여동생인 루크레씨아는 성당의 발코니에서 보면서 즐겼다고 한다.

 

세사레는 남편이 있는 부인들을 납치하여 강간하고 죽여서 강물에 던져 버렸다.

여기서 운이 좋은 소수의 여자들만 죽지 않고 남편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세사레는 매독 증세가 얼굴에 나타나서 검은 반점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1499년 프랑스 왕의 소개로 게인이라는 작은 나라의 공주 샬롯(17세)과 결혼하였다.

 

세사레는 매독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여자들을 겁탈하는 과정에서,

1501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소문난 베니스의 장교 부인을 납치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가두고 성 노리개로 삼다가 2년 후에야 남편에게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도 교황 부자는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청의 직할 영토로 만들려고 총력을 다하였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물, 성직을 가리지 않고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서 돈을 모았으며,

또 자기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암살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교황은 또 추기경들을 대접하기 위해 매일 밤 25명 정도의 창녀들을 교황청으로 불러들였다.

 

 


 

마침내 1503년 8월에 짐승같은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죽었다.

교황 부자는 자기들이 싫어하는 추기경을 저녁에 초대하여 독살하려고 하였는데,

일이 잘못되어 그 독약을 자신들이 먹게 되었다.

 

세사레는 운 좋게 살았으나, 독약을 먹은 교황의 배는 불덩어리가 되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었으며 피부색은 노랗게 변했다.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고

몇 시간을 누워 있던 교황의 얼굴은 자줏빛으로 변하면서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교황은 배 양쪽에서 출혈이 일어나면서 사망했다.

 

만성 매독에 걸려 있다가 독약을 먹고 죽은 교황의 시체는

옆구리가 풍선처럼 부어서 몸이 사각형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교황이 살아있을 때는 아부하고 그의 손발에 키스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죽은 후에는 누구도 그의 발이나 손에 키스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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