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무적의 창?
영화 <헬보이>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과 대사가 나온다. 악의 세력인 라스푸친 일당이 어느 박물관에 들어가 히틀러 소유였던 <롱기누스의 창(Lance of Longinus)>이라는 걸 얘기하는 장면과 히틀러가 1958년에 죽었다는 FBI수사관들의 대사가 그것이다.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연구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의 유품 중 하나인 롱기누스의 창이라는 것을 거론해 보기로 하겠다.
(사진: 영화 헬보이에서 롱기누스 창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라스푸친 일당)
젊은 세대들은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하면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을 떠 올리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이 역사적으로 차용해 온 소품일 뿐 원조 롱기누스의 창은 아니다. 이 창의 기원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에서 봤듯이 엄청난 채찍질과 무지막지한 폭행 끝에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못이 박히는 장면에서 바로 이 롱기누스의 창이 처음 등장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의 창. 그것이 바로 롱기누스의 창이었던 것이다.
(사진: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에서의 롱기누스 창)
이 창은 신화적, 문화적으로 매우 많은 코드를 담고 있다. 종교와 교리를 떠나 지구상 최대의 완벽한 슈퍼스타라고 칭하는 예수의 몸을 찔렀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다는 권력을 뜻하는 동시에 신성함을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의 몸을 찔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신성시되는 이유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고통을 줄여줬기 때문이다.
■십자가형의 고통스러움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단순히 나무에 사람을 못 박아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십자가에 매 다는 것은 맨 마지막에 벌어지는 이벤트로서 그 형벌의 시작은 심한 채찍질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 당시에 벌을 가하던 채찍은 끝에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을 붙여 놓은 것이기에 한번 맞게 되면 살 속에 박혀서 힘있게 빼지 않으면 빠지지 않을 정도 였다고 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쇼크사로 즉사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맞은 상처자국에서는 더운 날씨로 인해 곧이어 진물이 흐르며 염증이 생기기 시작하여 죄인의 온 몸을 불처럼 달구게 된다. 그런 상태로 자신이 못 박히게 될 약 2m가량의 무거운 나무를 끌고 사형 장소까지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목이 마르다고 하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니 현대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행의 길이었을 것이다.
(사진: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 중 한 장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다. 예수를 모셔 드리고 집에 돌아갔더니 닭들이 무지개빛 달걀을 낳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고생 고생하며 당도한 사형장이지만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장에 도착하면, 죄수가 짊어지고 온 나무를 기둥에 십자가 모양으로 맞추고는 땅에 눕혀진 십자가 위에 죄수를 눕힌다. 죄수의 두발은 세로 기둥의 받침대에 올려지고 차렷자세 모양으로 두 발을 모은다. 이 때의 몸은 바로 눕힌 상태가 아니라 가로로 눕힌 상태가 된다.
죄수의 두 발이 세로 기둥에 나란히 모아진 상태에서 복사뼈 바로 밑에다 대못을 박게 되는데, 굵고 울퉁불퉁한 대못은 두 발의 복사뼈를 관통한 다음 나무에 깊이 박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죄수의 상체를 비틀어서 바로 눕힌다.
다음에는 끈으로 양팔목을 가름대에 묶고 양손의 손목뼈 사이에 못을 박는다. 흔히들 손바닥에 못을 박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되면 죄인의 체중과 중력으로 인해서 손이 두 갈래로 찢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한 다음 십자가를 세워 고정시킨다. 상체가 뒤틀린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은 대단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렇다고해서 쉽게 죽지는 않는다. 낮에는 뜨거운 땡볕과 밤에는 싸늘한 추위를 견뎌야 하고, 때로는 날짐승의 공격을 받으며, 고통 중에서 서서히 죽게 내버려둔다.
(사진: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 중 한 장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십자가 처형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쓴 의사 리히터의 논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나 육체적인 긴장은 모든 동작에 고통을 준다. 못이 박혀진 손 부분은 신경이 예민하고 몹시 아픔을 느끼기 쉬운 곳이었으므로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못의 상처와 채찍에 맞은 자국은 곧 염증을 일으키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괴저 현상까지 일으켰다. 신체의 위치가 피의 순환을 방해하고 고통을 일으켰으며, 육체의 긴장은 죽음 자체보다도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십자가의 고뇌는 최악의 고뇌요 그것은 순간 순간 괴로움이 증가하는 긴 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형벌은 즉시로 타는 듯한 갈증을 사형수에게 안겨줬다."
한마디로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는 소리다. 일설에 따르면 예수는 39번의 채찍질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무 많은 피를 흘려 하루를 못 넘기고 숨을 거두게 된다.
■예수에 대한 특혜?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1분이라도 빨리 죽는게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기에 죄인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죄수 옆에 있는 병사들에게 죽음으로 가는 급행료 등을 내어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선처를 바라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망나니에게 노자돈을 주어 한칼에 목을 날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진: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 중 한 장면. 오열하는 마리아 옆에 창을 든 로마병정이 보인다. 이들 중 한명이 롱기누스였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롱기누스의 창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우리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된다. 원래 창으로 찌른다는 것은 규정에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창으로 예수를 찌르는 행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피를 많이 흘려 죽게 하려는 선물이었다는 얘기라고도 볼 수 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십자가형에 대한 공식적인 특혜는, 십자가에 매단 직후 몽둥이로 다리뼈를 부러뜨려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 보면 예수가 숨을 거두자 온 하늘이 컴컴해지고 지진이 일어날 때 로마병사들이 무서워하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두 사형수의 무릎뼈를 몽둥이로 내리쳐 부셔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되면 횡경막이 위로 치솟게 되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되며 몸의 균형을 잃어 피순환이 정지 되기 때문에 급속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창의 기원
롱기누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소개된 기독교적 기원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이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찔렀고, 이때 예수의 배에서 물과 피가 흘라나왔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거론한 기독교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장면이다.
(사진: 바티칸의 롱기누스 像)
그 후 민간에 퍼진 속설로는 창으로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의 이름이 롱기누스였으며, 창으로 찌른 직후 눈이 멀어 예수를 경멸하고 증오하였으나, 그 창을 타고 떨어지는 예수의 피로 눈을 씻어 다시 회복된 후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롱기누스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도였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예수의 부활을 두려워했던 사탄이 롱기누스의 몸 안으로 들어가 예수의 심장을 찌르려 했지만 다행히 빗나가 갈비뼈를 찌르는 바람에 예수가 부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로 인해서 일부 지방에서는 롱기누스를 성인(聖人)으로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화로만 전해져온 것으로서 이런 수많은 설화들을 정리하여 대체적인 가닥을 잡은 것은 12세기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엥 트루아(Chretien de Troye)의 <성배 이야기(Le Conte du Graal)>였다. 그후 독일의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가 지은 파르치발(파시발; Parzival)과 15세기 영국의 토머스 멜러리(Thomas Malory)가 지은 <아더왕의 죽음(Le Morte d'Arthur)>으로 이어지면서 롱기누스의 창은 성스러운 창이라는 이미지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사진: 롱기누스의 창 복원 전 모습)
학자들에 의하면 성스러운 창의 이미지는 켈트 신화의 광명신 루(Lugh)가 적에게 던져 번개로 변하게 하는 마법의 창 브류나크(Brionac)의 이미지와 상당부분 겹친다고 한다. 짐작하건데 켈트신화와 기독교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배(聖杯)와 롱기누스의 창은 항상 짝을 이루어 회자되곤 했는데, 창이 파괴의 이미지이므로 자연스럽게 치유의 이미지인 성배와 짝을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지며 이와 관련하여 창은 남성의 생식기를 뜻하며 성배는 여성의 생식기를 뜻한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 비슷한 모양을 연결시켜 숭배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제왕의 창- 롱기누스
역사적으로 보면 미인의 팔자는 항상 기구했다. 권력있고 잘난 남자들의 쟁탈전 속에 희생양이 된 예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롱기누스의 창도 그와 비슷한 숙명이 예정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예상대로 예수까지 한번에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로 대단한 무기인 이 창이 그냥 평탄하게 남아 있었을리 만무했다. 히틀러가 이 창을 소유했다는 것을 잠깐 언급했는데, 그 이미지는 어느덧 무엇이든 찌를 수 있다는 '힘의 상징'과 동일시 되었으며, 그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역사상 수 많은 권력자들이 소유했고, 또한 이 창을 소유하고자 전쟁까지 불사했던 마물(魔物)이 되어 버렸다.
첫 소유자는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이 창이 하느님의 뜻으로 인도해 준다고 믿어서 부적처럼 몸에 지녔다고 한다. 아랍인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한 칼 마르텔 장군은 전쟁 중에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샤를마뉴 대제는 이 롱기누스 창을 가짐으로 해서 47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었다. 그 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를 비롯 1.000년 동안 45명의 제왕이 이 숙명의 창을 소유했다하니 역마살(役馬煞)도 이런 역마살이 없다.
(사진: 박물관에 복원된 롱기누스의 창)
마지막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1910년대에 오스트리아의 학자 겸 박물관 학예관인 '발터 슈타인'에게서 '이 신성한 창을 소유하는 사람은 이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후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전시된 이 창에 대해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이 창에 대한 히틀러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훗날 그의 저서에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창을 본 후 내가 경험하게 될 위대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날에는 그 창을 보고 혼수 상태에 빠지기까지 했다니, 그의 공과를 떠나 열정 하나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한 열정의 결실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38년 4월에야 이루어졌다. 히틀러는 비엔나로 입성하여 꿈에도 그리던 '롱기누스의 창'을 손에 넣어 독일의 뉘른베르크로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45년 패망까지 파죽지세로 전 유럽을 격파하며 그는 제왕으로 군림했다.
이 창의 개인 소유 운명은 공식적으로는 독일 패망 직후 미군이 가져감으로해서 끝난다. 여담이지만 1999년 12월 구 소련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가 공개됐는데,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자살한 후 발견되어 곧장 화장(火葬)된 것이 아니라 소련으로 이송된 후 미이라 형태로 있다가 1971년에야 화장됐다고 하니, 그토록 아끼던 창은 미국으로, 자신은 소련으로 갈라져 냉전 시대 이산(離散)의 아픔을 몸소 겪은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롱기누스의 창은 그 후 원소유주였던 오스트리아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다시 반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자신을 소유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듯 2천년 역사의 풍진 세월을 오늘도 관람객들에게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