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뻐꾸기 시계

금산스님 작성일 13.04.18 11: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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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대의 초록환타님 작품입니다.

 

전화 업무란 것이, 상당한 인내를 요구로 하는 것이다.
 
전화가 끝나도 그 구매자가 상품을 구.매.할.지.아.닐.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물건에 대한 찬사를 터뜨린 고객이 되려 구매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평과 불만을 토해낸 고객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구입’ 버튼을 누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가 전화 받는 모든 고객은 잠정적 고객원이

된다. 어떤 전화에도 성심껏 상품 안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나이의 남자가 일하기에는, 또 남에게 명함을 내밀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직업
 
이긴 하지만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는 러브 젤과 각종 바이브레이터, 흥분제와 최음제들에 대해 부지런하
 
게 설명했다. 간혹 새로 나온 제품이 있을 땐, 누구보다 먼저 제품에 대한 설명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는 떳떳한 직장인이었다. 물론 그 자신이 생각기에 그렇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냥 스스로 떳떳하다고 착
 
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정시에 출근했고 정시에 퇴근했으며, 여러 칸칸이 나뉜 업무 공간에
 
서 누구보다 열심히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좋은 구매자만 있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샐러리맨이

된다.
 
문제는 좋은 구매자가 별로 없다는 데에 있었다.
 


1.
 


“워낙 중국산 바이브레이터가 많아서 솔직히 조금 의심이 되네요. 저번에 모르고 샀더니 5분 돌다가 고장 나더라고. 여기 보니까 환불 불가라고 씌어 있는데다가…”
 
“백퍼센트 믿을만한 제품입니다, 손님. 환불불가라는 건 물건 특성상 그런 겁니다. 구매하신 손님들 반응도 아주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아저씨가 써봤어요?”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귀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척 봐도 한참은 어린놈이었다. 참자, 수화기를
 
들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직접 써보진 않았습니다만….”
 
“얼씨구. 써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리 자신 있게 권해요? 웃기네. 이 아저씨.”
 
“상품 평이 많이 있으니까 한번 읽어보시면 될 겁니다. 저희가 자신 없는 제품은 결코 내놓지 않아요.”
 
상대가 피식피식 비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거 죄다 알바라는 거 알거든요. 사람 살에 들어가는 건데 주의해서 사야지, 안에서 폭발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수화기너머에서 자지러지듯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앞에 수화기를 잡고 있는 한 녀석과 둘러싸고 박
 
장대소하는 고삐리들의 모습이 훤했다.
 
“야, 이 씨.새끼야!”
 
순식간에 전화를 받던 동료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 향했다.
 
“뭐? 씨.발새끼? 이 게이새끼가 어디 손님한테 대고 욕질이야?”
 
“어린 노므 새끼가, 너 뭐하는 놈이야?”
 
“낄낄낄… 야, 그런 거 팔지 말고 그냥 너희들이나 평생 쓰다 뒈져. 오케이? 에이즈 옮을까봐 전화 먼저 끊는다.”
 
뚜- 뚜- 소리가 귀에 울렸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데스크 위에 있던 생수병의 목을 비틀고 통째로 마셨다. 가는 물줄기가 붉어진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전화 추적을 하던가 해야지, 잡아 족쳐야 돼.”
 
“내비 두쇼, 그런 놈들 한 둘이요? 매번 그리 열을 올리면 아저씨 염통만 나가지… 좀 참아 보드라고요.”
 
옆 자리 이 씨의 말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 부채질은 했지만 홧홧함은 가시지 않았다. 이 씨
 
는 입맛을 쩝 다시고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이반들의 천국, 게이 포.르.노 세상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
 


“아빠 왔다”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그가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말하고 답하는 일반적인 대화 기준은 사라진
 
다. 그는 닫힌 방문을 흘끗 바라보았다. 나무문이지만 강철로 만든 것보다 더 견고해보였다.
 
“오늘은 말이다. 또 장난전화가 왔다.”
 
사온 야채들과 생선들을 꺼내어 식탁 위로 죽 나열했다.
 
“그래서 아빠가, 점잖게 충고해줬단다. 짜식들, 장난전화 몇 번 걸리는게 뭐 대수겠냐.”
 
랩을 꺼내 뜯었다. 각각의 재료들을 칭칭 말아 단단히 봉했다. 냉장고문을 열어 하나하나 안으로 던져 넣었
 
다. 음식물이 들어가자 구형 냉장고는 온도를 맞추어 올렸다. 기계 진동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TV를 틀었다. 그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채널을 멈추고 캔 맥주를 딴 채 소파에 앉
 
았다. 풀벌레 소리가 꾸준하게 브라운관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아르마딜로는 자기 보호 성향이 매우 강한 동물입니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몸을 둥글게 말고 보호태세에 들어갑니다. 겉껍질은 매우 딱딱해서 날카로운 이빨들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탁월하지요.”
 
쥐를 닮은 생물 하나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늑대가 다가와 이리저리 놈을 굴린다.
 
“음식을 충분히 먹은 아르마딜로는 본인이 안전해질 때까지 얼마든지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전까지 절대로 갑옷을 벗지 않지요.”
 
그는 빤히 그 노란 쥐새끼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직도 노랑 공처럼 말려 있었다. 발을 멋대로 뻗대고 편
 
히 누웠다.
 
“내일 아침은 카레 해 줄 테니까. 많이 먹어라”
 
“좋아하잖아, 카레”
 
“그렇지?”
 
대답이 없으므로 대화는 성립이 안 된다. 칠이 벗겨진 괘종시계에서 뎅, 뎅, 뎅 소리가 들렸다. 고장 난 까
 
닭에 뻐꾸기가 튀어 나오지 않는다. 언제부터였더라…. 시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
 
켰다.
 
눈을 떠보니 브라운관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정규채널이 모조리 끝난 것이다. 반쯤 남은 캔 맥주가 엎질러
 
져 있었다. 옆에 놓인 휴지를 꺼내 쏟아진 맥주를 빨아들이려 했지만 휴지는 자꾸 곤죽이 되어 갔다.
 
한 무더기 쌓인 휴지를 뒤로하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발뒤꿈치를 치켜
 
들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한걸음씩 내디뎠다. 한 발자국씩에 넉넉히 시간을 들였다.
 
겨우 다다랐다. 그는 문 앞에 서서 폭탄을 해체하는 대테러요원처럼 조심스레 움직였다. 허공에서 천천히

미끄러지는 그의 얼굴 뺨이 문에 닿았다. 차가웠고, 소름이 돋아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집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분
 
명히, 거기 있었다. 두께가 오 센티 남짓한 나무문을 간격으로 부자는 대치하고 있다. 자고 있을까.
 
조심스럽게 얼굴을 뗐다. 처음과 같이 시간을 들이며 방문에서 멀어졌다. 덕분에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
 
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3.
 


아들은, 녀석과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더티 해리’를 보았다. 부자가 함께 보기에 더할 나
 
위 없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아들과 터프한 서부 총잡이들의 이미지를 느껴보려는 시도는 일반적인 아버
 
지의 것이었다.
 
시도는 반만 성공했다. 아들은 황량한 사막의 바람과 거친 황야의 술집에는 관심이 없었다. 줄곧 나오는 당
 
시 최고의 권총이었던 44구경 매그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영화가 끝난 후 무심히 하나만

물었다.
 
“주연 배우가 누구였어요?”
 
물론 그건 클린트 이스트 우드였다. 현대에서도 그만한 남성적 입지를 가진 배우는 별로 없다. 아무튼 그렇
 
게 물어오는 녀석의 눈은 무심해보였지만, 모종의 반짝거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흑백영상으로

‘공룡 백 만년’을 보면서 금발의 글래머 여배우 라켈 웰치를 바라보았을 때와 같은 묘한 흥분을 포함한

눈이었다.
 
무의식적 자각이랄까, 불안함에 그의 시도는 연이어 계속 됐다. 이소룡 주인공, ‘와호장룡’. 성룡의 ‘취
 
권’. 강하고 패도적인 영화는 두 부자의 꾸준한 취미가 되었다. 그는 매번 아들과의 관전 포인트가 다른

것을 어렴풋 느꼈다.
 
미식축구와 이종격투기를 배우게 했다. 아들은 그럭저럭 따라왔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에는 아들이 진정
 
한 남자가 거치기에 이상적인 것들을 상당수 습득했다고 느꼈고, 일말의 안도를 느꼈다. 하지만 클린트 이
 
스트우드를 바라보던 녀석의 시선은 너무 컸다.
 
남자가, 롤 모델로서 이상적인 남자를 바라 볼 때의 시선과, 이상적인 여자를 바라 볼 때의 시선은 다르다.
 
아마도 그래서, 그의 아들이 생일파티 때에 ‘남자를 좋아해요’ 라고 선언했을 때 당연하게도 놀라지 않았
 
던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당연하게도 화를 냈다. 그것도 엄청나게.
 

무지막지한 분노 끝에 아들은 배척되었다. 아들은 방으로 숨었지만, 방문은 걸어 잠기지는 않았다. 당시에

문은 단지 문으로써만 기능했을 따름이었다. 그게 철옹성으로 바뀌기까지 어떤 개입이 있었고, 그 사건은

그 누가 만든 것도 아니라 아들 스스로가 부른 것이었다.
 
아들은, 사춘기였고 누군가를 벅차게 좋아해 볼 수 있는 때였다. 그것이 녀석 또래의 소녀였더라면, 그는

아버지로서 퍽 즐거운 시선을 누렸을 것이다. 한바탕 슬쩍 지분거린 뒤, 아버지다운 조언 몇 마디면 해결
 
될 해프닝이었다. 아니면 스스로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던가.
 
단지, 그게 아니었을 따름이다. 아들은 고백을 했고, 상대방 남자아이는 거절한 모양이다. 아들은 원치 않
 
는 커밍아웃을 당했고, 학교에서 1년을 버텼다. 그 1년 동안, 녀석은 그야말로 남자답게 투쟁한 모양이었
 
다. 그리고 나서 아들은 자기 방을 철저한 요새로 삼았다. 그러니까 녀석은 한마디로, 졌다.
 
“히키코모리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그 수요가 많은 사회 부적응자를 그렇게 불러요. 타인과 부대끼는 걸 두려워하는 거죠. 처방?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건 오롯이 개인의 문제에요. 이해의 접점을 찾아야죠.”
 
의사는 아들의 동성애를, 힘겨운 고백을, 따돌림에의 저항을 그렇게 진단했다. 처방 없음. 알아서 하시오.

이해의 ‘접점’을 찾으시오.
 
대형 매그넘과 쌍절곤과 중국 권법을 제외한, ‘접점’
 


4.
 


카레가 서서히 끓었다. 그는 아들이 싱겁게 먹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간을 모자라게 했다. 자신이 먹을 분량
 
만큼만 덜어 따로 소금을 더 넣었다. 완성된 카레를 도시락에 천천히 담았다. 따뜻한 밥과 따로 담아 밑반
 
찬들을 꾸려 넣었다. 완성된 도시락을 방문 앞에 놓았다.
 
언제 내놓았는지 까만 비닐봉지가 요강과 함께 밖에 놓여 있었다. 그는 밤새 붉어진 오줌을 변기에 따라 버
 
리고, 비닐봉지를 가위로 오려 신문지로 쌓인 대변 역시 물속으로 낙하 시켰다. 물을 내리고 화장실을 나섰
 
다.
 
“현장조사?”
 
“그렇다는구만. 환장 하겄소. 안 그래도 남세스러워 죽겠는데, 현장 조오사?”
 
고객 욕구 파악이란 명목으로 그들에게 떨어진 ‘게이 바 탐사’는 충격적인 임무였다. 심지어 물건 상담

업무를 맡고 있던 그가 속한 팀까지 모조리 그곳으로 답사를 가야했다. 그는, 유능하진 않지만 누구보다 헌
 
신적인 직장인이었으므로, 동료들의 불만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술렁거리는 체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상담업무를 지속했다. 낮 동안 꾸준히 전화가 왔고, 한 두건의 전화를 제외하면 모두 평범
 
한 고객이었다. 그렇게 업무를 마치고, 녹음기와 종이가 끼워진 차트를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2인 1조로 배정받은 사람은, 바로 옆자리 앉은 이 씨였다. 그는 항문에 정조대를 하고 가야하는 것 아니냐
 
며 쉼 없이 낄낄 거렸고, 그는 그런 이 씨의 농담에 악의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의 농담 한마디에 가슴이 깊
 
이 내리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야간업무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늦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은, 밤늦게까지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
 
도 그의 방에만 있겠지. 핸드폰을 꺼내 1번을 눌렀다. 신호음이 흐물흐물 늘어졌다가 마침내 받을 수 없다
 
는 여자의 안내음이 들렸다.
 
“도착했구만, 형씨는 여기 들어가쇼. 난 저쪽 가볼텡게. 우리 표정 컨트롤 좀 해줌서 딱 다섯 사람씩만 인터뷰 따내는 기요. 이따가 요기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드라고요. 늦어도 2시까진 꼭 나올 테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로 내려가 처음 느낀 것은. 의외로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외설스러운 복장과 끈적끈적한 스킨쉽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일반 펍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미
 
러볼 대신 은은한 반사조명이 바 전반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 몇 몇 남자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 각자의 잔
 
에 담긴 술을 마셨다. 그는 녹음기와 차트가 든 가방을 한번 두드려보고는 쉼 호흡을 했다. 가장 가까이에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볼까, 하는 생각과 달리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힘겹게 걸음을 뗐
 
다.
 


5.
 


대화를 하다가 느꼈지만, 남자는 상당히 젊었다. 스물 초반쯤으로 보였다. 남자라는 말보다 청년이라고 부
 
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로. 그러니까, 벌써 그 나이에 성 정체성을 찾고 이러한 전용 바를 찾을 정도
 
가 된 것이다. 그러한 그의 말에 청년은 ‘찾은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것’ 이라고 그의 말을 정정했다.
 
태생부터 게이라는 의미다. 아무튼 청년은 그가 이 바에 찾아오게 된 계기를 상당히 흥미로워 했다.
 
“좋은 시도에요”
 
한 마디로 표현한 청년은, 일반 이성애자들이 그와 같은 이반들과 이렇듯 사소하게라도 조금씩 접촉해나가
 
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비록 포.르.노 물품을 팔려고 왔지만, 나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
 
청년은 자신이 마시던 것과 같은 것으로 그의 음료 하나를 샀다. 그는 거절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혼자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는데요. 그 있잖아, 아저씨 경우대로 말하면 죽여주는 여자를 봤을

때 가슴이 짜릿! 한 거 말이에요. ‘대부’를 보는데, 마이클 꼴레오네 아시죠? 알 파치노가 연기했잖아
 
요. 그게 나한텐 그거였단 말이야.”
 
청년은 손을 권총처럼 취하고 허공에 한방 쏘는 시늉을 했다.
 
“최고였죠. 그건, 그 전까지 있었던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남자는 여자만 사랑해야 된다
 
고 교육받은 10년이 송두리째 박살나던 순간이었다고요.”
 
그는 잠자코 자신의 컵을 바라보고 있다가 잔을 들어 꿀꺽 꿀꺽 삼켰다. 휘유, 하고 청년이 눈을 크게 뜨
 
고 바라보았다. 다 마시고 나자 기침이 올라왔다.
 
“그거 무지 독한 건데, 괜찮겠어요?”
 
“한잔 더”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잔 더 주문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다 빌어먹을 정도로 똑같다. 그게 라켈

웰치일 때도 있고,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한테는 알 파치노일 수도 있는 거다.
 
그 금발의 여배우가 그에게 주었던 어떤 이미지들을, 누군가는 단단한 턱과 곧은 어깨에서 발견 할 수도 있
 
는 거다.
 
그건 이해의 문제보다 ‘받아들임’의 문제였다. 여전히 그의 집에는 아들이 유배되어 있다. 괘종시계가

몇 번이나 울렸을까.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다. 게이 바에서, 청년 게이와. 그 빌
 
어먹을 접점. 이게 진보일까. 물어볼 사람 어디 없나.
 
“아저씨 재밌네요. 나가서 한 잔 더 할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관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청년은, 씻고 있었다. 화장실 문 앞에 벗은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매트리스에 앉은 채 시계를 흘끔 봤다. 새벽 한 시 반이다. 이 씨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됐다. 그
 
는 걸어두었던 자신의 외투를 찾아 조용히 걸쳤다. 신발을 신고 방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6.
 


“이제 오시는 고마, 어째, 인터뷰는 많이 따셨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그랗지요? 내도 점마들이 내 몸을 눈으로 훏는기 아닌가 싶아라 오금이 저리갖고 할 수가 있어야지요. 낄낄낄.”
 
그가 웃지 앉자 이 씨가 고개를 옆으로 빼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와 그라시오? 경우 없는 일이라도 당해뿌셨소?”
 
“아들이 기다려서 그래. 빨리 가봐야겠어.”
 
“웜매, 아들이 있었소? 난 여태 몰랐네…. 시간이 몇 신데 자겄지라. 몇 살이나 되요?”
 
“모르겠어.”
 
이 씨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기 뭔 말이요. 아들내미 나이를 모른다교?”
 
“그래, 몇 살이었지. 응. 몇 살이었지.”
 
“허… 참.”
 
이 씨가 입을 쩝 다시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능 들어가서 자던 거 흔들어 깨움서 나이 한번 물어보쇼! 애비가 새끼 나이 모르는게 말이 되덜 합니까 그래. 부자지간 왠수 졌소?”
 
“사실 말이야. 그런 것 같애”
 
“웜매? 을마나 옴팡지게 화나 나 부렀음 지 아빠하고도 말을 안 할려고 한 대요. 아따 싸가지.”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주 후레자식이야. 싸가지 없는 놈.”
 
피식 피식 거리다 박장대소하는 그를 보고 이 씨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 너털, 마주 웃음을 놓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가 너 좋아하는 치킨 사왔다.”
 
침묵.
 
“닭, 무지 비싸더라.”
 
침묵.
 
“너 프라이드치킨 좋아하지? 내가 좋아하는 양념치킨 포기하고 사온거야.”
 
부스럭 부스럭 포장을 뜯자 노랗게 튀겨진 치킨들이 보였다. 그는 치킨 봉지를 들고 아들의 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방 문 앞에 검은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닭튀김을 놓고서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선반에

놓인 가위로 봉해진 봉지를 갈랐다.
 
변기 위로 떨어진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여자의 것처럼 길게 자라난 몇 뼘의 머리카락. 견고하고 질겨보였
 
다. 그러나 잘려 있었다.
 
아들은 몇 살이었지? 그는 잘려진 머리카락을 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년간 누적
 
되어온 그 길이는 아주 길었다. 그는 드러난 아들의 목덜미를 상상했다.
 
그는 봉지 속에 있던 머리카락을 집어든 채 다시 거실로 갔다. 소파에 앉아 김이 오르는 치킨이 놓인 아들
 
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칠 벗겨진 괘종시계가 뎅, 뎅, 뎅 소리를 냈다.
 

 

 


*외전
 

 


이 씨는 그의 집 맞은 편에 살았다.
 
이 씨는, 자신의 직장동료가 자신의 아파트 맞은편에 건물에 산다는 걸 몰랐다. 동료는 항상
 
식거리를 산다며 대형 슈퍼에 들렸다 귀가했다. 혼자사는 남자쯤으로 생각했다.
 
이 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어 있는 와이프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 조심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담배를 하나 태워 물고 허공에 멍하니 불었다.
 
그 때, 항상 창 밖을 바라보던 건너편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수척하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이씨는 이 늦은 시간에 창밖을 보고 있던 적이 없음을 생각해내고 눈을 부볐다.
 
그러나 소년은 그곳에 있었다. ...뭔가 어색했다.
 
그는 한참 소년을 바라보면서 어색함의 이유가 어깨까지 길었던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피식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마저 빨았다.
 
다시 힐끔 소년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담배를 떨어뜨렸다. 손이 달달 떨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1m 남짓한 긴 창문의 맨 아래에서 간신히 창밖을 바라보던 소년의 얼굴이 창문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자 달빛이 환하게 창을 드러냈다.
 
늘어진 발끝과 쓰러진 의자를 본 이씨는 기어코 비명을 질렀고, 아내를 깨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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