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승천

금산스님 작성일 13.04.23 22: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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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대의 초록환타님 작품입니다.

 

동자승은 커다란 협곡을 힘들게 이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올라가고 있는 곳은
 
조선 땅 안에서 가장 고명하다는 사소대사(思蘇大師)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생각할 사(思), 깨어날 소(蘇) 두글자의 의미는 그 놀라운 법력을 지닌 사람의
 
명칭으로는 오히려 너무 가벼웠다.
 
이제 거의 다 올랐다. 꼬박 하루를 맨손으로 올라온 소년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맨 처음 덩굴로 손을 감고서 오르기 시작했지만, 날카롭고 뾰족한 절벽 바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절벽 꼭대기에 다닿아 손을 짚고는 몸을 앞으로 굽혀 기어 올랐다.
 
"후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용케 이런곳을 기어 올라왔다 싶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이곳에 들렀다 왔던 사람들의 말처럼 허름한 초가집이 한채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소대사께서는, 만약 자네가 진정으로 거짓없이 원하는게 있다면, 능히 이루어주실수 있는 분일세"
 
장터에서 만난 각다귀 중에, 사는게 지겨워 죽을 각오를 하고 그곳에 올라왔갔었다던 늙은 노인이
 
한 말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그분을 만나고서도 왜 걸인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어린 동자승의 당찬 반발에 그 늙은 각다귀는 슬그머니 웃었다.
 
"에하아라, 내 맘대로 내 길대로 그래그래 가리라, 좋기도 좋고 흥겹기도 흥겹구나.."
 
각다귀는 묘한 노랫가락을 부르면서 무리들 사이로 섞여 갔고, 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동자승은
 
노인에게 들었던 소사대사의 거처를 찾아 당장 짐을 꾸려 떠났다.
 
그것이 한달 전이었다.
 
동자승은 하루를 꼬박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빛나는 형형한 눈을 지니고 있었다.
 
거침없이 걸어간 소년은 초가집앞에 멈춰 서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사소대사님, 어리석고 이 못난 자가, 대사님의 혜안에 기대어 몇마디 조언 듣기를 청하옵니다"
 
대답은 금방왔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듯 심하게 갈라지는 쇳소리처럼 들리는 그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사람을 강하게 잡아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어린 동자께서 이 별볼일 없는 늙은이를 찾아 먼 고생길을 사서 하셨구나, 그래 무슨 일인가?"
 
초가집의 낡아빠진 문 사이로 문답은 계속 되었다.
 
"지금 이 세상은 예전 같지 않사옵니다,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사랑과 포용은 잊은지 오랩니다.
 
간성지장(干城之將) 같은 나라를 위할 줄 아는 위인은 없고,
 
간신적자(奸臣賊子) 같은 부모를 팔고, 나라를 팔며, 끝으로 나아가서는 임금의 눈을 가리고
 
스스로의 배를 불릴 생각만하는 시정잡배들은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동자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쏘는 듯한 눈빛으로 초가집 헤진 문을 바라보았다.
 
"대사께서는, 제가 우주 만물에 대해 각성하여, 깨달음을 얻고 사람들을 구할 방도를
 
얻고자 한다면, 저에게 길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초가집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동자승이 초조하여 다시금 말소리를 내려 할때였다.
 
"허허허허... 허헛, 허허허허허.."
 
비아냥거림이나 불쾌함이 묻어나지 않는, 진실로 통쾌한듯 웃는 소리였다.
 
"어린 동자께서 포부가 대단하시구려, 하지만 이 늙은 노인에게 하셔서 방도를 얻으실 말은 아닌것 같소"
 
그러자 동자승은 눈빛을 더욱 날카롭게 하여 문을 노려보았다.
 
"나라안에서 가장 깨달음의 경지가 높으시다는 대사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초가집에서는 다시 죽은듯이 기척이 없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이토록 썩어간다면, 우리를 이토록 번영토록한 세상의 모든 섭리에 대해
 
책임을 물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 답이 없사오니까?"
 
그때였다, 부서진 문풍지 사이로 둘둘말린 흰색의 종이가 내밀어졌다.
 
동자승은 급히 다가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잘들으시오, 풍운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어린 동자여. 그 안에 든것은
 
사람들을 개혁시킬수 있는 물건이라오" 동자승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들자,
 
안에는 각기 빛깔이 틀린 네개의 둥그런 환약이 있었다. 각각, 검은색과 상록, 흰색과 갈색이었다.
 
"그 환약은 각각이 모두 이 조선팔도내에서 가장 사악했던 네 동물들의 정기(精氣) 담고 있소.
 
그것을 먹으면, 그 동물들로 변하게 되오. 그리고 그 시간은 무려 10년.
 
그약을 먹은 후에 해야 할 것은.." 대사의 목소리가 자츰 사그러 들었다.
 
"무엇입니까?" 동자승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바로 사람들에게 갖가지 패악을 부리는 것이오"
 
동자승의 눈이 의아하게 뒤바뀌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대사님, 나라를 구할 방도를 청하고자
 
왔는데, 짐승이 되어 패악을 부리라니요"

대사는 일언반구도 없이 할말을 끝마쳤다. "환약은 모두 네개, 각각이 10년으로 모두 40년이오.
 
그대는 40년동안 사람에게 끊임없는 횡포를 부려야 하오. 그것이 진정 사람을 위하는 일이오.
 
그대가 부린 40년의 패악은, 그대가 하기 나름으로 4만년의 태평성대를 가져올 수도 있음이오.
 
내게 조언을 구하고자 왔다면, 나를 믿고 따르시오."
 
동자승은 환약을 꼭 쥐고서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굽혀 초가집을 향해 절을 올리고 난뒤에 서툴게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자승은 마을앞에 이르러 환약이 든 종이뭉치를 꺼내었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와 더 나은 인간상을
 
위한 희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검은색 환약을 삼켰다.
 
이제 마을앞에 작은 동자는 없었다. 집채만한 덩치를 가진 검은 호랑이 한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눈에서는 달덩이를 박아 놓은 듯한 부리부리한 광채가 흘러나왔고, 울음소리 한번에 태산이
 
풀쩍 뛰었다가 가라 앉았다.
 
검은 호랑이는 조선 내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으며,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훌쩍 마셔 농작물을 마르게 했다. 나라가 호랑이 울음소리와 발구름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임금이 직접 포상금을 내걸고, 전국에 내로라하는 사냥꾼들이 나섰지만, 모두가 호랑이의 밥이 되었다.
 
사람을 닥치는대로 집어 삼키며 조선땅을 두려움으로 몰아 넣었던 호랑이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안도하면서 다시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나 사람으로 돌아온 동자승은 울부짖으며 스스로의 피부를 손톱으로 찢어 발겼다.
 
622명, 자신이 호랑이로 화했을 적에 죽인 사람의 수였다. 무너뜨린 집과 비워버린 강도
 
셀수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멈출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불행을 잊었을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초록색 환약을 삼켰다.
 


사람들은 다시금 공포에 사로 잡혔다. 건장한 성인 남성을 한발에 채어갈수 있을 만한 커다란
 
솔개가 나타난것이다. 호랑이가 사라졌다며 기뻐하던 사람들은 다시금 나타난 솔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 지중을 뜯어내는
 
커다란 발톱과 이내 날아드는 청동빛의 부리와 굳센 날개를 볼수있었다. 황소를 채어갈 정도로
 
힘이 좋은 솔개에게 베겨낼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솔개를 피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으로 사람들이 도망쳐 갈 무렵, 공포의 솔개는 다시금 호랑이처럼 사라져버렸다.
 


동자는 심한 공포에 떨었다, 어느덧 자신이 죽인 사람의 수가 1000여명을 육박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먹어야할 환약의 개수는 2개, 그건 앞으로 20년의 살생이 더 남았다는 걸
 
의미했다. 동자승은 비뚤어지고 있는 마음에 자신에게 환약을 준 사소대사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진정 그는 이런 방법밖에 없어서 나에게 환약을 준 것인가? 정녕 이런 끔찍한 방법밖에 없어서?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사람들이 불행을 잊고 어느정도 번영을 누리는 때에,
 
흰색 환약을 삼켰다.
 

 

사람들은 서서히 절망에 익숙해져 갔다. 이번에 경상도 쪽에서 사람을 한입에 삼켜버리는
 
백색 구렁이가 나타났다는 말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천지신령께서 노하셨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구렁이는 산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낮이든 밤이든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다.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그 산을 돌아다녀야 했다.
 
세배가 넘는 거리였지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로는 마을에 나타나 멱감는 아이나, 바다에 헤엄쳐나가 고기를 잡는 해녀나 어부들을 통째로
 
삼키어 버리고는 유유히 산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임금은 호랑이와 솔개, 그리고 흰뱀이 나타난
 
이유가 되었다. "다 임금이 부덕해서지.." 요즘 사람들이 가장 잘 내뱉는 말이었다.
 
10년뒤,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흰뱀은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으로 돌아온 동자는 이제 미쳐버린 사람의 것 같은 회의어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30년의 세월에 의해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하고, 수심과 고뇌에 시달려온 까닭에
 
실제 나이보다 무척 늙어보였다. 턱수염도 멋없이 지저분하게 자라나있었다.
 
사실 동자는 갓 사람으로 돌아오자, 모든걸 포기하고 대사에게 달려가 환약을 줘 버리고 싶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런 힘겨운 고난을 씌운 대사를 죽여버리고자 마음 먹었다.
 
살인귀로서의 10년은 그토록 힘들고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 남은 환약을 보면서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10년 뒤에 사람으로 돌아올때면, 그는 우주의 본질을 꿰어 보고
 
만물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속세를 살펴보면서,
 
사람들이 다시 어느덧 흰뱀이 파괴한 것을 복구하였을 즈음에 마지막 노란 환약을 삼키었다.
 

 


이번에는 지리산 쪽이었다. 삐죽 삐죽한 가시나무 같은 날카로운 뿔을 지닌 노란터럭의 사슴이
 
나타났다고 했다. 약초를 찾는 사람들이나 심마니들은 무자비하게 뿔에 질려 죽었다.
 
다른 온순한 사슴들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칼날같은 뿔을 들이밀고 달려드는 사슴때문에
 
어떤 이들도 지리산에 오르지 못했다. 혹여 올랐다면, 난자되어 내장이 흘러나오는 시체를
 
수습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산 속에 사는 범과 곰, 늑대같은 육식동물을
 
비롯해 모조리 죽여버리는 사슴에 의해 온 지리산이 썩은내로 진동했다.
 
설상가상으로 썩어가는 시체들로 인해 역병이 돌아 지리산에 인접한 마을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마치 억겁과도 같은 시간, 그 사슴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동자승은 부릅뜨고 자신이 40년 전에 찾아왔던 절벽을 올라가고 있었다. 입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가 물려져있었다. 눈을 어찌나 치켜떴는지 실핏줄이 터져나가 온통
 
붉어진 혈안을 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자라난 머리와 거뭇거뭇한 피부, 엉킨 길다란 수염의
 
비쩍 마른 노인이 입에 칼을 물고 절벽을 타고 있는 광경은 그 자체로 섬뜩했다.
 
그는 사소대사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4개의 환약을 모조리 먹은 뒤에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마지막 환약을 먹고 10년뒤 인간이 되었다. 깨달음의 각성을 들떠 기다리는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1년째 기다리던 날, 그는 사소대사를 죽여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소대사! 썩 나와라! 이 천하의 빌어먹을 사기꾼 같으니!" 흥분한 그는 비수를 움켜쥐고서
 
그가 왔던 40년 전보다 더욱 낡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초가집을 그는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멈칫했다.
 
낡은 개다리 책상위에 다소곳이 놓인 종이 뭉치와 서필하나, 이것은...?
 

이것을 자네가 보고 있다는 것은, 마치 억겁과도 같았을 40년을 모두 인내해 내었다는 것일테지..
자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해 이곳으로 왔을 테고. 이 늙은이를 시해하기 위해서일 게야.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네. 자네가 찾아왔던 40년 전에도 이미
 긴 삶이 남지 않았던 늙은 노인네였으므로. 나는 자네가 그토록 바라던 깨달음을 주기위해
 이 서신을 남기는 걸세. 자네는 이무기에서 용으로 거듭나는 걸세, 자네가 먹었던
 네개의 환약은, 사악했지만 한없이 강한 자연의 기를 받고 태어났던 사신(四神)이라네.
그 모든 기운은 자네의 몸속에 깃들어 있을테지,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환약을 먹고 나면,
자네는 진정한 깨달음속에서 우주와 의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네.
 


그는 편지를 읽으며 미친듯 울고 웃었다. 기쁨과 분노, 회한과 허탈감등의 오만가지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 뭉치를 펴냈다. 안에 들어있는건,
 
황금으로 만든것처럼 찬란하게 빛이나는 금색의 환약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빨을 들어 묵묵히 짓이겨냈다. 그가 겪었던 원치 않던 살인의 고통, 그것의 결실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우르르르... 구름이 끼어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콰르릉, 쿠릉.. 번개와 천둥까지 요동치기 시작한 하늘은 시커먼 먹빛이었다.
 
그때였다.
 
높다란 절벽위에 초가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왓장들과 짚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엉성하게 쌓인 토벽도 순식간에 큰 금을 따라 부서져내렸다.
 
협곡 위에 산산히 부서져 내린 초가집의 잔해,

그리고 그 속에서 길게 활개 치며 하늘로 솟아 오르는 것,
 
그것은..
 

그것은 찬란한 황금빛 비늘을 지닌 황룡이었다.

사슴의 뿔, 독수리의 발톱, 호랑이의 아가리, 뱀의 비늘을 지닌 고귀한 환수..
 
가우우우우..
 
조그맣고 길게 포효한 용은 협곡위를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한번 날았다.
 
끊임없이 내리는 빗줄기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위로 솟구쳤다.
 
황금빛 비늘이 마치 지상으로 내려 꽂히는 번개 같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번개가 된 마냥
 
그렇게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비상했다.
 
먹구름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황룡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날씨는 삽시간에 말갛게 개었다.
 
비온뒤 개인 하늘은 티없이 맑은 푸른 빛을 띄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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