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대의 초록환타님 작품입니다.
나는 지금 기다리고 있다.
무언갈 기다리는가 하면, 차례를 기다린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기억할 수도 없을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것은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내 앞줄과 뒷줄같은 가까운 거리는 대부분 서로가 알고,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눌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일렬로 늘어선 줄속에서 몇백, 몇 천년을 지루하게 기다린다고 생각해보라.
유흥거리라고는 대화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든 금방알게 될 것이다.
다행히 줄은 일렬로 늘어선 한 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양옆과 그 옆을 비롯하여
빽빽히 자리잡고 있다. 덕택에 대화는 실컷 할 수 있다.
가끔은 너무나 지루해 줄을 박차고 나가는 몇몇도 볼 수 있다.
그때는 부럽기도 하지만, 일탈은 이내 상상만으로 끝내야 한다.
여기서 포기해버리기엔 지금까지 인내한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이 그토록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무언가의
'차례".. 포기할 수 없다.
나는 가만히 서서 앞자리에 서있는 자의 등에 새겨진 번호를 본다.
보지 않고도 외울수있을 정도다.
그 긴시간동안 지겹도록 봐왔던 번호니까.
USA - HM-M-4456356.
검게 새겨진 각인같은 번호는 무슨 짓을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내 등뒤에도 이런 각인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앞의 것과 같지 않았다.
개개인이 모두가 다 틀린것 같다.
이를 테면, 내 앞, 앞의 코드번호는 이렇다.
JAP - HM-W-4125567
이런 것이 무언지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각각에게 모두 귀한 것임에는 틀림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렬된 상황속에서 다르게 주어지는 번호에게 따로 무슨 의미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천년간의 고독속에서 그나마 가능하던 대화조차도 질려버린 존재들에게 주어진 의문, 그것에 대한
대답은 최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매 시간이 고통없는 지옥이었으므로.
그때였다.
처음엔 소음이었지만, 점차로 커지며 허공을 가득 매웠다.
사이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우웅-..
더할나위없이 조용했던 주변이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나도 흥분과 기대로 가슴이 뛰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것이, 사이렌소리는 각별한 것이었다. 억겁과도 같은 이 시간속의 그조차도
한번밖에 겪어본적이 없는 특별한 것.
그것은 바로 순서를 무차별적으로 바꾸어주는 현상을 예고하는 소리였다.
누군가에겐 희망, 누군가에겐 절망이었다.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차례' 몇 십만명의 존재들이 그토록 갈구하여 기다리는 무언가에게
더 다다갈수 있게 해주는 희망의 소리였으며,
억겁의 인내를 견뎌내어 무언가의 바로 앞까지 근접했을 경우 사이렌이 울린다면
그것은 절망의 소리일 터였다.
전체가 흥분어린 어조로 시끄럽게 떠들애 댈때,
모두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소용돌이에 휘감긴듯이 어지럽게 허공을 휙휙 돌기 시작한다.
몇만의 무리가 가득 가득 떠올라 빠르게 서로를 섞여가기 시작한다.
후우우웅-!
강한 바람소리만 귀에 들려온다.
시리게 부는 바람은 눈조차 뜨지 못하게 한다.
웅,웅, 웅, 웅,, 후우웅
끊임없이 울리는 사이렌, 또 끝없이 휘갈기는 바람.
이번엔, 이번에는 제발...
땅에 닿는 감촉이 느껴진다.
눈을 뜨고 진실을 확인하기 전에, 약간의 두려움에 눈꼬리가 살짝 떨린다.
그리고 눈을 떳을땐,
..........
.......
"아..!"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전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것이 오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두장의 날개를 가진 것을.
자애로운 눈은 그들의 모든것을 받아줄듯 깊어 보였다.
여기까지 들리진 않지만, 조목조목히 말하는듯한 입술은 그 자체로 감미로웠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름다운 존재가, 나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내 앞에는 불과 열명 남짓이 있을 뿐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걸음 걸어 나가는 동안,
이내 아름다운 존재의 음성이 내게도 들려왔다.
아아, 이제 8명..
"USA-HM-M-873655 로구나, 좋은 곳에서 일생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부디 행복한 여생으로 남과 자신을 모두 굽어 살필줄 아는 현인이 되기를 바란다.
너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마.
첫째, 너는 억압받지 않고 네 스스로의 미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셋째, 인종적으로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섬김을 받을 것이다.
이제, 가거라"
존재가 나지막히 말하는 말은 축복 그자체였고, 모든 미의 집결체였다.
그 성스러움에 몸둘바를 모르고 무릎을 조아리고 있던 자는
아름다운 빛에 휩싸여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존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몸에 가볍게 흐르는 전율, 감동으로 가득차서 아무것도 내뱉을 수 없는 나는 그저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존재는 자애로운 웃음으로 손수 손을 뻗어 나를 뒤돌아보게 했다.
나의 등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뒤, 앞서 했듯이 내 각인을 나지막히 불렀다.
"KOR-HM-W-744856로구나"
나는 다시 뒤돌아서서 무릎을 조아렸다.
"그래, 고독과 경쟁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주위를 경계하며 살아라.
혹여나 모든 것을 극복해낸다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존재가 나에게 내리는 말들은 축복이 아니었다. 되려 지옥에 던져지는 천사에게 내리는
말같지 않은가? 존재의 말은 이어졌다.
"너에게 몇가지 선물을 주마.
첫째. 너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남들의 명령의 굴레속에서 살아야 한다.
둘째. 타인과 다르고자하는 것은 그 의지자체로도 죄이니라.
셋쩨. 스스로를 돌아볼줄 모르고 평생 번민속에서 방황을 해야 한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고한 분이시여, 어찌 저에게만 그런 무겁고 혹독한 조언과 말씀을 내리시나이까?
제게도 앞서 주셨던 축복의 말들을 내려주십시오"
아름답고 신성한 존재는 여전히 그 신비롭고 자애로운 미소를 드리운채 내게 말했다.
"너는 KOR에서 일생을 시작하게 되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