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가락이 35번 잘린 성인’이라는 제목으로 이 글에 시작해보자. 당시 중세유럽(500-1500/1700)은 성물 흠숭 시대였다. 당시는 성물에 대한 주문은 밀려오는데 물건은 없고 돈은 탐나는 시대였으니 당연히 가짜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가시관이라고 나돌아 다녔던 것이 당시 열 두 마리의 암소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니 얼마나 가짜가 나돌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찌 하여 성물 숭베가 이토록 붐을 일으켰을까? 중세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고 쉽게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는 신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인에 대해 더욱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사람들은 성인성녀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믿었다. 성인이 죽고 난 뒤 그의 유골을 성물聖物로 공경하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성인의 뼈와 치아는 물론, 개인적으로 지녔던 물품도 성물로 변했다. 성인이 살아생전 기댔던 나무, 성인이 잤던 침대, 성인이 식사했던 식탁도 성물로 둔갑했다. 심지어 그들이 입었던 옷의 실오라기 하나만 손에 넣어도 성인의 유물을 지녔다는 기쁨에 도취되었다. 성물이 있으니 성지가 생기고, 성지가 생기니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많은 돈이 오가고 더불어 얘깃거리가 생겨났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사건들이 모여 유럽 문화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신 앙인들은 성물 앞에서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떨거나, 아니면 너무 놀라서 거품을 내거나 땅에 엎어졌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성물 장사는 실패하지 않는 장사였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어느 날 주교 출신인 이고 581년에 죽은 페르레오루스 폰 우체스(Ferreolus von Uzes) 성인 무덤 옆에서 몇몇 신자가 간질병증상을 보였다. 성인이 노해서 그렇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성인 무덤에 금, 은, 가축 등 제물을 바쳤다. 알고 보니 몇몇 수도자들이 성인무덤 앞에서 사람들을 매수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성물 숭배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유골 장사 금지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후에 카를대제가 성당 안에서 성인의 유골을 지녀도 된다며 금지령을 풀었다. 1546년 마르틴 루터도 성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성물 숭배를 비판했다. 심지어 몇몇 종교개혁가는 성물을 불태우기도 했다.
죽은 성인의 유골을 팔고 숭배하다
그 렇지만 중세 가톨릭은 종교개혁을 거부하는 상징으로 성물숭배를 은근히 조장했다. 각 교구에서도 성인의 유골을 성당에 안치하려고 발버둥 쳤다. 신자를 끌어 모으려는 계산이었다. 성인의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많은 이들을 충족시킬 것인가? 고심 끝에 생각한 것이 성인의 몸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었다. 부패하지 않은 성인의 몸은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게오르그 성인은 ‘11번 축성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그의 뼈가 열 한 번 조각났다는 뜻이다. 그의 유골이 성물로 숭배 받기 위해 열한 차례 수난을 겪었다는 뜻이기도하다. 스테파노 성인은 여덟 번, 아킬레우스와 노이노우슨 성인은 ‘축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번 수난을 겪었다. 베로나의 페트루스(Petrus von Verona) 성인은 손가락이 서른다섯 번 잘렸다. ‘독일의 국민성녀’로 사랑 받는 엘리자베스 성녀도 유사한 수난을 당했다. 858년 스페인의 수도자들이 이슬람권에서 두 성인이 순교했다는 정보입수를 하고 성물을 구하러 여행을 떠났다는 기록도 있다.
왕 실의 관심도 예외는 아니었다. 1346년 왕이 된 카를 4세의 취미는 성물 수집이어서 궁중에 황제 직속 성물 담당자를 두었다. 어떤 진기한 성물을 손에 넣지 못할 경우 훔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10세기 베네치아의 한 통치자는 자신이 마르쿠스 성인의 뼈를 북아프리카에서 빼내 베네치아에 보관한 뒤부터 베네치아가 번성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슬람권에서 성인 유골을 찾아 다닐 때 가장 주의 깊게 살핀 게 돼지고기였다. 이슬람인은 돼지고기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기독교 신앙인들은 성인의 뼈를 발견하면 가장 안전한 장소인 돼지고기 속에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일반 서민, 귀족, 왕실을 가릴 것 없이 성물을 숭배하게 된 데는 연옥 사상도 한몫 했다. ‘지상에서 지은 죄를 속죄하지 못하고 죽으면 연옥에서 무시무시한 벌을 받는다, 탕감 받을 길은 성물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면 100년간 연옥에서 받을 고통을 없애 버릴 수 있다’는 교리였다.
귀족들은 금을 사듯 성인유골 사재기에 나섰다. 성인 몸은 하나다. 수요가 많으니 유골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었다. 13세기 중엽 비잔틴의 황제 볼드윈 2세가 돈이 필요하자 예수가 썼던 가시관의 일부를, 신앙심이 강해 ‘성왕’으로 불리고 나중에 성인 반열에 오른 프랑스의 루이 9세(성 루이, Saint Luis)에게 팔았다. 루이 9세는 이 성물이 들어오던 날 어의를 벗고 속옷만 입은 채 맨발로 나가 반갑게 맞았다고 한다. 이 가시관은 샤펠 성당에 보관되었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노트르담 성당으로 옮겨졌다. 1247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가시관의 한 부분을 샀을 때 가격은 13만 5000리브라(libra)였다. 당시 기사가 1년간 받았던 급료는 15리브라였다. 한 학자가 이 돈을 계산했는데 이 돈이면 ‘그 당시 살던 중세 기사가 오늘날까지 살아도 다 못 받을 금액’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엄청나게 천문학적인 가격이라는 얘기다. 루이 9세는 이런 사재기 때문에 ‘성인’ 칭호를 받았다는 빈정거림도 있다.
성지순례를 통해 죄 사함을 받다
귀 족뿐만 아니라 수도자까지 성물 숭배에 동참했다. 1200년에 죽은 후고 주교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유골을 기이한 방법으로 손에 넣었다. 손을 접고 누워있는 성녀의 팔뼈를 잘라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유골은 금으로 교환되었고, 보니파티우스 성인의 유골은 은 500개면 바꿀 수 있었다.
성물에 대한 주문은 밀려오는데 물건은 없고 돈은 탐나는 시대였으니 당연히 가짜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가시관이라고 나돌아 다녔던 것이 당시 열 두 마리의 암소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니 얼마나 가짜가 나돌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00년 전에 죽은 소녀의 뼈를 성인의 뼈로 속이고 내다 팔기도 했다. 프랑스의 어떤 귀족은 예수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한 잔을 사들였다고 좋아했다. 옷 한자락, 몇 올의 머리카락, 치아가 성모의 것이라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는 두 곳에서 각자 세발두스 성인의 몸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숭배했다.
성물의 가격이 이처럼 비싸다 보니 가난한 사람은 성물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성지에 가서 그것을 ‘만지는’ 것으로 허전함을 달랬다. 성물을 만지기라도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물을 찾아 다니는 것이 대유행처럼 번졌다. 1520년 당시의 통계에 의하면 1만 8970개의 성지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밤사이에 성지가 하나씩 생길 정도였다. 기적이 일어나는 성지라고 소문이 돌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 인 야콥(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 스페인 이름은 산티아고)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산티아고에는 순례객들이 밀려들었다. 한 해에 5십만 명 정도가 찾아왔는데 이들이 기도하고 복전함에 돈 넣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로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지금으로 700년 전인 1300년 로마에는 매일 20만의 신자가 몰려들었다. 여러 명의 성인 유골이 있었기 때문이다. 1446년 스위스의 은수자 성인 축제 때에는 14일 동안 13만 명이 참가했다는 기록도 있다.
순례객이 갖다 바친 돈으로 성인성녀의 유골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었다. 팔뼈와 발뼈에는 금을 덧입혔고 돈궤는 금으로 치장했다. 성인성녀가 살아 있다면 이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입은 옷이 무거워 죽겠다! 나도 휴식 좀 취하고 싶다!” 당시의 이런 현상을 한 수도자가 꼬집었다. “순례객은 금으로 뒤덮인 성인을 잠시 황홀하게 바라보지만 그 때 뿐, 그보다는 지갑에 손을 넣고 돈을 바칠 생각에 바쁘다.” 즉 성인에 대한 공경은 뒷전이고, 복전에 돈을 넣어 천국에 가려는 마음이 더 급한 당시의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처럼 성인에 대한 유별난 신앙이 범람하던 시대였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당시 이런 작품들이 예술문화사로 유럽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도금 장식을 했던 거장의 이름도 남아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순례객의 이동과 함께 상업이 발달하고 문화 교류가 늘어
13 세기부터는 단거리 성지순례는 시들해져 버리고 장거리 성지순례가 유행했다. 기차나 버스가 없던 시대에 독일 쾰른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성지 순례 가려면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몇 달을 길거리에서 살아야 했다. 교회숙소에서 순례객을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숙박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도둑들이 도사리고 있던 장소에는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울퉁불퉁한 길도 정비했다. 성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물을 건너다 빠져 죽는 이가 허다했던 곳에는 다리를 놓았다. 공짜는 절대 아니었다. 순례객에게 다리 사용료를 거두었기 때문에 성지로 통하는 시에서는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일반 서민만 순례에 나선 것은 아니다. 범죄자도 실형을 선고 받고 순례 길에 올랐다.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은 채 반이 되지 않았다. 사나운 짐승에게 먹히기도 했고, 도둑과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기고 죽는 사람이 많았다. 의도적으로 보낸 순례였다. 감옥에 두면 먹여 살려야 하니 돈을 절약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장사꾼은 원래 성지에서 물건을 팔 수 없었다. 그러나 장사꾼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들은 순례객을 가장하고 성지에 들어가서 물건을 팔았다. 당시 주교 테오둘프와 클라우디우스는 “죄 사함을 받으러 로마에 간다고 하지만 가는 중간에 다시 죄를 짓게 된다”고 개탄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성지순례로 인해 유럽의 문화와 기술이 서로 교류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인 해석을 하기도 한다. 몇 달씩 순례하다 보니 낯선 언어와 관습, 기술을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 덕에 수공업자는 새로운 기술 정보를 교환했고, 상업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유럽 문화사의 한 부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가짜 처방’을 쓰고, 환자에겐 명약이라고 말했는데 가짜 약을 복용한 환자가 신기하게도 잘 나을 때가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플라시보라고 한다. 인간은 늘 어떤 방편을 갈구한다. 인간에게 어떤 방편을 통해서 희망과 믿음을 채워주면 병의 놀랍지만 회복이 빠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보이는 성물에 기대는 것도 플라시보 효과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현대에 들어와서도 성물을 구입하는 사례가 종종 보고되고 있다. 1993년 5월 15일자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짜이퉁>에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으로 옮겼다는 십자가의 한 조각을 한 프랑스 여인이 거액으로 구매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무척 신심 깊은 여인인가 보다. 정말 진짜였을까? 아니면 어떤가? 부적처럼 지니고 그녀가 예수의 말씀을 잘 따르면 될 일이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이랑 출판사 20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