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3...by 하드론

jinu012 작성일 15.04.18 09: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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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의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박형사가 나를 돌아 보았다. 

갑자기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 나는 누구에게 시선을 맞춰야 할 지 고민했다. 

무당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경계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형사의 질문에 무당은 잠시 말을 아낀 후 입을 열었다. 


"저 친구에게서 너무 강한 기운이 느껴져. 혼령이 한 둘이 아냐...." 


박형사는 연신 무당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표정 변화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형님, 불러낼 수 있습니까?" 


박형사는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무당의 허락을 받는데만 급급했다. 

무당은 여전히 나에게서 매서운 시선을 흩뜨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봐, 젊은 친구. 이리 와 앉게." 


나는 잠시 박형사와 무당의 표정을 살핀 후 박형사 옆에 무릎을 꿇었다. 


"둘 다 편하게 앉아. 내가 무슨 니들 부모냐?" 


우리는 자세를 편안히 갖추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손을 잡게나 젊은 친구." 


그는 두 손을 내 앞으로 나의 응답을 기다렸다. 

나는 다시 한번 박형사의 표정을 살핀 후 아무 말없이 그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내 손을 잡은 무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알 수없는 주문같은 말을 작은 숨소리로 웅얼거리지 시작했다. 


몇 십초가 지났을까? 

무당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웅얼거림의 소리도 서서히 커지는 듯 했다. 

그의 미세한 손 떨림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사나운 맹수가 포효하는 것처럼 미간과 콧등에 수많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흡혈귀처럼 하얀 이를 조금씩 드러내며 입을 벌리기 시작했고,

 

그의 웅얼거림은 점점 '아'발음만 들리는 기괴한 음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순간... 


"탕!!!!!!" 


그가 갑자기 탁자에 손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조금 전의 기괴한 소리를 내던 흉측한 표정보다 더 섬뜩해 보였다. 


"안돼....." 


그의 엉뚱한 말에 박형사가 물었다. 


"뭐..뭐가요? 불러낼 수 없다는 말입니까?" 


무당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불러내면...우린 모두 죽어..." 


지금 이 순간 내 생각도 그렇다. 

그 놈이 다시 나타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형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린 그 놈을 불러내서 그 놈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니 들이 찾아....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혼령이 아냐...." 


"뭘 찾으란 말입니까?" 


"그 놈 시체를 찾아!! 

찾아서 불태우든가, 천도제를 지내주든가 하란 말이야!!" 


나는 이 방에 들어와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것 같다. 

난 그에게 물었다. 


"그 놈...아니 귀신이 보일 때마다 안개가 껴요. 

그냥 맑은 상태가 아니고..." 


"귀신은 사람의 기를 빼앗아가. 

귀신의 존재가 느껴지면 사람은 여러가지 현상으로 반응을 하지. 

어떤 이는 소름끼치는 한기를 느끼기도 하고, 어떤 이는 피를 흘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기절을 하기도 하지.... 

그런데 자네는 특이한 경우이지만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애..." 


"이대로 있으면 전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거나 아니면 니가 죽든가 하겠지..." 


너무나 충격적이고 무서운 말임에도 무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았다. 

무당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니 몰골을 보니, 요 근래 온갖 험한 꼴을 많이 당한 것 같군. 

살고 싶으면 어서 그 놈을 찾아." 


"도와주시면 안되나요? 아저씨도 능력이 있잖아요." 


"법사라고 불러. 무슨 생뚱맞게 아저씨야? 나도 체면이 있는데..." 


"무슨 얼어죽을 법사고, 체면이예요? 귀신 하나 쫓아내지도 못하면서...." 


"이런 망할 자식을 봤나!!" 


무당은 입을 삐죽거리며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난 뭐 대단하신 분인 줄 알고 왔는데, 스포츠 신문에나 광고내는 무당하고 같네요." 


"뭐? 이 자식아? 이런 호..로..자..식..을 봤나!!!" 


그는 나에게 덤빌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욕설을 내뱉았다. 

지금의 그의 모습은 무당이라기 보다는 동네 불량배에 가까웠다. 


"야 임마!! 너 지금 뭐하는거야!!" 


박형사가 호통을 쳤다. 

그의 호통에 우리는 잠시 냉전을 유지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 친구 부탁 좀 들어주시죠?" 


"당장 꺼..져!!" 


무당은 자세를 옆으로 돌린 채 박형사와 시선도 맞추지 않았다. 


"젊은 놈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이러다 이 놈 죽을지도 모릅니다. 

목숨 하나 살려주신다 생각하시고 좀 도와주세요." 


박형사는 나보다 더 간절한 입장이 된 것처럼 무당에게 애원했다. 


"당장 꺼지라고 했다. 더 이상 말 걸지마!!" 


무당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에 나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 위해 박형사에게 말을 던졌다. 


"형사님, 그냥 가요. 뭐 하나 얻어낼 것도 없는데...."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 박형사의 동료인 강형사가 연신 담배질을 하며, 우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씩씩거리며 나오는 것을 본 강형사는 무슨 일이냐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도 없이 그냥 차에 올라탔다. 


무당을 달래고 있는지 아니면 무슨 할 말이 더 있는건지 박형사는 5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박형사가 조용히 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잡시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죄송해요. 형사님." 


십여분 동안 아무 말없이 달리는 차량 안에서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박형사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 혼쭐이라도 날 것 같았지만 박형사는 업무적인 얘기로 답했다. 


"그 놈을 어떻게 찾을까?" 


"......." 


"조폭놈들이 그 놈한테 몰살당한 걸로 봐서 무슨 원한이 있는게 분명해. 

그 놈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어. 

그리고 그 놈 시체는 그 스탠드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몰라." 


"우리가 거기에 가보면 되잖아요." 


"그 놈들의 비밀 창고 같은 게 하나 있는데 도대체 접근할 수가 없단 말이야. 

증거가 없어서 위에서도 수색영장을 발부해주지도 않고...." 


"이번 살인 사건으로 물고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러면 영장 나올 것 같은데요." 


"만일 그 놈들이 마약사건 조사를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한 가지 희망도 사라지는거야. 

살인사건 때문에 형사들이 들락거리는 데 그 놈들이 뭔가 대책을 세워놨겠지." 


박형사는 팔짱을 끼고 대책을 세우는데 머리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 놈의 시체에 다가간다면 무슨 반응이 나오겠죠?" 


나의 말에 박형사는 팔짱을 풀고 나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만일 저에게 그 놈이 붙어다닌다면.....제가 그 놈의 몸뚱아리에 가까워지면 무슨 반응을 할 겁니다. 

그러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거구요." 


"너..설마.." 


"네. 저를 그 곳에 들여보내 주세요. 형사님들은 바람잡이나 해 주시구요." 


"너 그 놈들한테 잡히면 죽을 수도 있어."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죠. 기왕 죽을거면 이유나 알고 죽어야죠." 


나의 말에 박형사는 한참 동안 내 표정을 살폈다. 

박형사는 뒤에 앉아있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를 몰고 있는 강형사에게 물었다. 


"강형사..너 저번에 입수한 그 스탠드바 건축도면 가지고 있지?" 




경찰서에 도착한 나는 박형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후 그 스탠드바의 건축도면을 익혀갔다. 

두 세시간 동안 도면을 익히면서 작전을 세워갔다. 

충분히 숙지가 되었다고 판단이 서자 우리는 곧바로 차를 몰아 그 스탠드바로 향했다. 


그 스탠드바는 화려한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영업시간이 아님에도 형형색색의 네온등이 정문을 장식하고 있었고, 

 

화려한 드리워진 커튼 뒤로 붉은 카페트가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를 먼저 맞은 것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검은색 양복의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깍두기 머리는 아니고 말끔하게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호남형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박형사와 강형사를 알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이 친구는 누굽니까?" 


경계하는 듯한 그들의 눈빛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박형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여기 살인사건 목격자야." 


무서운 눈빛을 가진 그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놈이 우리 형님한테 전화했던 그 놈이오?"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형사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그를 달랬다. 


"현장조사만 하고 갈거니까 너무 그러지마." 

"잠깐 기다려요." 


그 청년은 우리를 제지하더니 우리에게서 잠시 떨어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투로 보아 그보다 윗사람인 것 같았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20분 안에 끝내쇼. 우리도 할 일이 많으니까." 


우리는 내부로 진입했다. 

긴 복도 입구에 진입하자 박형사가 나에게 뭔가를 건넸다. 

접혀진 종이였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부적같았다. 


"이게 뭐예요?" 

"형님이 주신거야. 모진 귀신이 나타나도 니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거래." 


오전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성의라고 생각하고 나는 말없이 그 부적을 받아들었다. 

긴 복도를 지나자 큰 홀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조명, 벽지, 바닥재, 진열장...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실내는 아름답고 화려했다. 

우리는 그 홀을 가로질러 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몇 개의 갈라진 복도가 눈에 들어왔고, 각 복도마다 조그만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맨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박형사가 말을 했다. 


"저기야...그 놈들이 죽은 곳..." 


그곳을 보자 나는 가슴이 저미어왔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저 곳이 그 피의 살육이 벌어진 곳이라니......... 

나의 휘청거림을 느꼈는지 박형사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그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익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처럼 꾸며진 그 살육의 장소였다. 

이미 현장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상태라 시각적인 공포는 주지 못했지만, 

 

지워졌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오금이 저리는 듯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시간없어. 시작해!" 


박형사의 명령에 강형사는 의자와 탁자를 쌓아올리고, 

 

그 곳에 올라가 준비해온 공구로 우리 키의 1.5배 정도 위에 설치되어 있는 환풍구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좁은 환풍구 통로가 열리자 나는 쌓여진 탁자와 의자를 타고 올라갔다. 

순간 박형사가 나를 잡으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와야 한다." 


나는 묵언의 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 통로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 통로는 무릎을 꿇고 기는 것도 모자라 몸을 완전히 눕히고 포복으로 기어야 할 정도로 좁았다. 

나는 매직펜 크기의 손전등을 입에 물고 최대한 소리를 감추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실내의 불빛으로부터 멀어지자 통로안은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되었다. 

유일한 빛이라고는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 뿐이었다. 

매케한 먼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기침을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잠시 코를 움켜쥐었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새 듯한 숨이 뿜어져나왔다. 

진정이 되자 나는 다시 몸을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저 어둠의 통로에서 정체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쓰으윽...쓰으윽...." 


작지만 그 괴상한 소리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쓰으윽...쓰으윽...." 


그 소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나는 그 소리의 정체가 

 

지금 내가 배를 밀고 전진하고 있는 소리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앞의 어두운 통로 속에서 누군가가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내 입의 떨림에 맞추어 손전등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쓰으윽...쓰으윽...." 


2미터 앞까지 뭔가가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 입에 물려 있는 손전등의 빛에 비추어졌다. 


새하얀 얼굴에 늘어진 검은 머리...그리고 그 하얀 얼굴에 수많은 세로선을 긋고 있는 핏줄기..... 

귀밑까지 찢어지도록 입을 벌리고 활쫙 웃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입속의 하얀 치아 틈 사이로 채워져 있는 핏물.... 

어디서 본 여자다. 

그 병원에서 봤던 간호사였다. 

그제서야 나는 알아챘다. 

내 앞길을 뿌옇게 만든 것은 먼지와 섞인 안개였다는 것을.... 

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 물려진 손전등이 그것을 막았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은 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거친 말을 내뱉았다. 


'후...씨..발...마중 나오지 않아도 되거든?' 


그녀가 코 앞까지 다가오자 무서운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좁은 통로 속에서 간신히 팔을 돌려 미친 듯이 그 부적을 찾았다.  

  


"아...씨..발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그제서야 그 부적을 성의없이 받아 챙겼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왔다. 

여자의 얼굴이 내 머리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커다란 먹이를 통째로 삼키려는 뱀처럼 여자는 입을 쩌억 벌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몰려왔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차근차근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내 두 손은 그 부적을 찾기 위해 좁은 통로 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종이의 촉감..... 

바지 주머니속의 오른손에 느껴지는 종이 촉감.... 

난 그것을 잡자마자 팔을 비틀어 그것을 두 손으로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여자에게 보였다. 


"꺄~~~~~~~~~~~~~~악!!" 


온몸의 털이 쭈삣서는 듯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여자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같은 적막감..... 


'무당이 날 한 번 살려주는구나.' 


나는 길게 숨을 몰아쉬고, 다시 조금씩 앞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는 건축도면에서 본 대로 오른쪽 길을 따라 몸을 이동했다. 

그 어둠의 통로를 조금씩 지날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를 전진한 걸까? 

끝도 없어 보일 것 같은 좁은 통로의 끝자락이 보이는 듯 했다. 

서서히 작은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내 머릿속에 기억된 도면대로 진행했다면 저 곳이 바로 박형사가 말한 그들의 비밀창고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앞으로 전진했다.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마저 전원을 끄고, 그야말로 귀신처럼 다가섰다. 

체크무늬처럼 환풍구 창살 사이로 빛줄기가 뻗어나왔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환풍구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너무나 어두운 곳에서 봐서 밝아보였던 걸까, 창고 안은 생각보다 어두었다. 

많은 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운송용 지게차도 한 대 보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준비해온 손가락보다 짧은 드라이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환풍구 창살 사이로 간신히 손가락을 내밀고, 환풍구를 고정하고 있는 나사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쌓여진 상자를 디딤돌 삼아 나는 조금씩 발걸음을 아래로 내딛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대부분이 술상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손톱보다도 작은 빨간색 딱지가 붙은 술상자였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손으로 들어 내부를 열어보았다. 

알 수 없는 주사약들이 들어 있었다. 


[펜타닐(fentanyl)] 


나는 그 옆의 술병을 열었다. 

거기엔 귀에 익숙한 주사약들이 들어 있었다. 


[염산페치딘(Pethidine Hydrochloride)] 

[모르핀(Morphin)] 


한 눈에 봐도 정상인 상황이 아니었다. 

술상자 속에 들어있는 주사약이라니... 


나는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모드로 그것들을 돌려가며 찍었다. 

그러던 중 상자들이 쌓인 뒷편에 유난히 커 보이는 나무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것을 열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나무로 만든 뚜껑을 밀어냈다. 

시큼한 소독약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검은 비닐 같은 것에 뭔가가 덮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지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다. 

나는 천천히 비닐을 벗겨냈다. 

놀랍게도 그 간호사의 시체였다. 

나무상자안에서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령으로 나타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자의 사각진 곳에 머리를 옆으로 기댄 채, 다소곳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눈은 많이 졸린 듯한 표정을 짓고 물끄러미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큰 상처가 보였고, 얼굴로 흘러내린 피는 딱딱히 굳어버린 상태였다. 


바로 그 때.....창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았지만 개방된 그 곳에서 마땅히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여자가 들어있는 상자안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뚜껑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상자를 닫았다. 

여자와 단둘이 있던 시간 중에 이렇게 공포스러운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무 상자의 틈 사이로 몇몇의 건장한 남자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내부로 들어오자 서로 마주보며 2열로 줄을 서더니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뒤 이어 두목으로 보이는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졸개들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적어도 40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모두들 90도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윗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형사들이 왔다며?" 


두목의 물음에 건장한 청년이 대답을 했다. 


"네. 회장님." 

"무슨 일이야?" 

"저번 흑검 형님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왔답니다." 

"몇 번이나 왔다갔는데 왜 또 왔어?" 

"아무래도 저희 클럽에 대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두목은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그는 긴 연기를 내뿜었다. 


"몇 놈 왔어?" 

"두 놈은 형사고, 한 놈은 흑검형님이 죽은 자리에 같이 있던 놈입니다." 

"흑검에게 전화했다는 놈?" 

"네. 회장님." 

"도대체 그 놈 정체가 뭐야? 경찰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아무리 뒷조사를 해 봐도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형사 놈들 어떡할거야? 처리할거야?" 

"그게 좀...형사라 아무래도..." 

"사고로 위장하면 되잖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오늘 밤 이 물건들 다른 창고로 옮겨. 형사놈이 죽으면 여기까지 조사하러 나올거야." 

"네. 회장님."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내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우릴 죽이겠다고?' 

 

두목은 연신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흑검..새..끼..는 왜 지 애들과 싸우다 죽은거야?" 

"......." 


모두들 답을 내 놓지 못하자, 그는 불이 붙은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어? 뭐야... 저건?" 


두목이 개방된 환풍구를 본 것이다. 


"젠..장....."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땅히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중간보스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누군가에게 명령을 했다. 


"야! 손전등 갖고 와봐!!" 


그는 쌓여진 상자 위로 올라가 커다란 손전등으로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의 눈에 내가 쓸고 다닌 바닥의 흔적이 보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씨..발...짭..새..새..끼..들....우릴 가지고 놀았어." 


나는 서둘러 박형사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들켰어요! 도망쳐요!!- 

"야!! 너 안으로 들어가서 어디에서 들어왔나 확인해!!" 


중간보스의 명령에 호리호리해 보이는 한 청년이 환풍구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새..끼..들 잡아!!" 

"예!! 형님!!" 


졸개들은 떼거지로 달리는 발발굽 소리같은 구두소리를 내더니 문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두목과 그 중간 보스는 청년이 들어간 환풍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크아~~~~~~~~악!! 크아~~~악!! " 


환풍구에서 새어나오는 끔찍한 비명소리에 그 둘은 넋나간 모습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중간보스 놈이 환풍구 안으로 몸을 우겨넣어 먼저 들어간 그 놈의 다리을 잡아당겼다. 


"쿵!!" 


환풍구에서 상자를 거쳐 다동그라지 듯이 그 호리호리한 청년이 떨어졌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몇 차례나 얼굴을 회칼로 그었는지, 

 

이목구비가 제 위치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오른손에 피로 젖은 회칼을 든 채 그는 마지막 숨을 몇 차례 헐떡거리고 있었다. 

두목과 중간보스는 할 말을 잃고 경기를 일으키는 시체로부터 몸을 뒤로 물렀다. 


"뭐...뭔 일이야? 이.. 이자식 왜 이래?" 


공포에 질린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여자의 표정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빨을 살짝 드러낸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당장이라도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은 내 입을 간신히 틀어 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피가 역류하는 듯 했다. 

두목과 그의 중간보스는 서둘러 창고를 빠져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조용히 발을 내 딛고 나는 남자 시체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는 갈라진 틈 사이로 연신 붉은 액체를 쏟아내고 있었고, 목구멍에서는 피거품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죽어가는 남자 위로 내 등 뒤에서 생성된 검은 그림자가 올라왔다. 

모두 다 나간 게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재빨리 몸을 던져 그에게 달려 들었다. 


"야~~ 개..새..끼..야!!!" 


그의 복부를 감싸고 미..친 듯이 밀어냈다. 

그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간 보스놈이었다. 

나간 척 하고 나를 기다린 것이다. 

나는 오른 주먹을 치켜 올려서 그에게 날렸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그 주먹을 피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워 사정없는 발길질을 나에게 날리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놈!!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고?"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그 놈에게 달려 들었다. 

그 놈이 손에 무엇을 들고 나를 내리쳤는지 모르지만,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내 몸은 얼굴을 난자당한 그 흉측한 시체 위로 고꾸라졌다. 

여기까지만 기억이 난다.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금 난 어두운 밀실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옆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더듬거리며 그 정체를 확인했다. 

만져지는 옷의 종류의 보아 박형사가 틀림없었다. 


"박형사님...." 


나는 간신히 새어나오는 숨소리로 그를 불렀다. 


"박형사님...." 


나는 주머니 속을 뒤지며, 작은 손전등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그 놈들이 다 털어간 것 같았다. 

지갑, 휴대폰, 손전등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나는 박형사의 주머니를 뒤졌다. 

나와 같이 텅 빈 그의 주머니 속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라이터가 만져졌다. 

나는 라이터를 켰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박형사가 

 

불빛의 자극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몇 번의 기침을 토해내고는 눈을 떴다. 

그 옆에 있는 강형사는 상황이 더 안 좋아 보였다. 

오른쪽 팔이 3등분으로 꺽여 있는 것이 보였다. 

팔이 부러진게 분명했다.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숨은 끊어지지 않고 의식만 잃은 것 같았다. 

그들을 모두 확인한 나는 주변을 살폈다. 

두 평도 안되는 공간 속에 우리는 갇혀 있었다. 

문으로 보이는 곳을 발로 힘껏 밀어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열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유난히도 차겁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철로 만들어진 구조물 같았다. 


"우린 이제 죽었네...." 


허탈한 심정을 대변하듯 깊은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강형사 좀 똑바로 눕혀줘." 


박형사는 아픈 몸을 일으켜 세워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강형사가 체온을 잃지 않도록 그 웃옷을 덮어주었다. 

나는 강형사의 꺽인 팔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자세를 바로 잡아 주었다. 

그의 부러진 팔을 바로 잡는 동안 마치 내가 다친 듯 뼛속까지 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강형사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숨소리처럼 새어 나왔다. 

어느 정도 자세가 바로 잡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리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댔다. 

라이터를 끄자 그 방안은 다시 칠흑같은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넌 어떡하냐? 억울해서..." 


박형사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나야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히지만, 너는 기껏해야 동네 공동묘지 아니냐?"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갖는 모습으로 보아 박형사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놈들이 우리를 왜 안 죽인거죠?" 

"좀 더 우리한테 정보를 뽑아낸 다음 죽이겠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입을 다물었다. 


"아....딸내미 시집가는 거는 보고 죽고 싶었는데...." 

"딸이 몇 살인데요?" 

"이제 10살인데, 엄마가 일찍 죽어서 지가 빨래도 하고, 밥도 알아서 해먹고 다니지....큭큭큭.." 


무슨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그는 목이 메이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흐느끼는 소리를 나는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부디 좋은 놈 만나야 할텐데....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양..아..치..같은 건달놈 만나면 큰 일인데...." 


그 말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런 놈 걸리면 내가 귀신이 되어서도 좇아가 죽여버릴거야." 


그 딸내미의 미래의 배우자도 아닐텐데 나는 괜한 죄책감에 그를 달랬다. 


"헤헤...그럴리가요? 좋은 사람 만나겠죠." 

"그래야지.." 

"그런데, 문자는 받았어요?" 

"확인하고 문을 나섰는데 그 때 들이닥치더라구." 

"무슨 형사가 깡패 새..끼..들 하나 못때려 잡아요?" 

"훗...." 


나의 푸념에 박형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형사 한 두 명이 깡패 수십명 때려 잡는 거?...후후...그런 건 다 영화 속에나 있는 거란다. 

깡패들 때려잡으려면 형사기동대, 기동타격대..다 출동하는거야. 

누군 칼 맞으면 안 아픈 줄 아냐? 

저 튼튼한 강형사도 그 놈들의 방망이 찜질에 팔이 부러진 것 아니냐. 

그나저나 넌 한창 나이에 안 됐다. 괜히 형사 사건에 말려가지고..." 


그의 말을 듣자 푸념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 놈의 귀신은 결정적일 때는 안 나타나네....." 

"너 창고 안에서 뭐 봤냐?" 

"엄청난 양의 주사약하고, 여자 시체 하나 봤어요." 

"뭐? 여자 시체?" 

"그 시체는 제가 전에 병원에서 봤던 그 귀신이였어요." 

"그 놈 시체는 못 봤어? 깡..패 놈..들 몰살시킨..." 


"없었어요. 그리고 그 놈이 느껴지지도 않았어요. 

그 무당이 준 부적 때문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그 놈이 어디로 갔던가, 아니면 묻힌 곳이 여기가 아닐 지 몰라요." 


"결국 거기가 마약 창고 겸 살육의 장소였군." 

"오늘밤.. 그것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했어요." 

"뭐? 오늘 밤?" 

"그리고 유일한 증거인 제 핸드폰도 빼앗아 갔어요..." 


더 이상 아무런 답안이 없었다. 

우리 둘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뱉고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둠 속이라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난 건지, 몇 시간이 지난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당탕탕!!" 


무엇인가 격렬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그러더니 갖은 욕설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새..꺄!!" 

"퍽!!" 


몇 초 동안 그 소란이 진행된 후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 자식이 나타난 건 아닐까? 

잠시 후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철제 문이 열렸다. 

강렬한 빛이 우리에게 쏟아졌고, 그 빛줄기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그 실루엣은 우리에게 말을 했다.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살고 싶으면 묻지 말고 따라와..." 


박형사와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강형사를 가리키며 그에게 외쳤다. 


"이 사람 좀 도와줘요!!" 


그의 SUV차량에 탑승한 우리는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어느 덧 시간이 밤 10시가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당신 누구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형사가 그에게 물었다. 

운동모자를 쓰고 운전에 여념이 없는 그 낯선 남자는 살짝 미소를 띄우더니 입을 열었다. 


"박형사님...서운합니다. 제 목소리도 잊어먹고?" 

"뭐? 당신 나 어떻게 알아?" 


박형사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전화로만 들어서 잘 못알아듣나?" 


그의 말에 갑자기 박형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마두?" 


그 낯선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죽었어! 내 눈으로 봤다구!!" 


박형사의 말에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죽은 지 어떻게 알았죠?" 


그제서야 박형사는 눈치를 챘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씨..발!! 핸드폰만 니 거였군." 


박형사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그럼 죽은 놈은 누구지?" 

"내 조직원이요." 

"니가 죽인거야?" 

"아뇨.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요. 그냥 그 놈이 죽은 겁니다." 

"무슨 말이야?" 


"나연이와 그 놈한테 얼마동안 시달리면서 난 정말로 죽을 것 같았소. 

며칠 동안 집을 비워두었죠.

그런데 동생처럼 아끼는 놈이 하나 있는데 그 놈이 집을 이사를 해야 하는데 

날짜가 안 맞아 들어 갈 집의 이삿짐이 안 빠진거요. 

 

그래서 내 집에 3일 정도만 머물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거요. 

처음엔 귀신 나타난다고 경고도 했소. 그런데 그 걸 누가 믿겠소? 

그 녀석이 그 집엘 들어가서 3일 째 되는 날 투신한거요. 

우리들 폰은 모두 사용 용도가 다른 대포폰이요. 

내가 가지고 있는 폰만 5개요. 

형사님한테 전화할 때 쓴 건 집에 놓고 나왔소." 


"그럼 내가 사건 조사하러 빠에 들락거렸을 때 마두가 누군지 너의 조직원들이 알았을텐데?" 


"형사님은 지금 마두라는 이름이 우리 세계에서 쓰이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는거요? 

조직에서 사용되는 내 이름은 '백사'요. 

'백사'라는 이름으로 형사님한테 전화한 것 들키면 

 

난 바로 한강이나 서해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거요. 

안 그래도 당신한테 장부를 넘기기로 한 날, 난 장부를 손에 쥐기 위해 빠로 들어갔는데 

그날 따라 보안이 철저한거요. 

여러가지 방법으로 창고 장부를 얻어내려고 했는데 실패했소. 

밤마다 귀신놀이를 하고 빠에 드나드는 내 모습이 어떠했겠소? 

꼭 그 장부 때문이 아니어도 나의 행동과 몰골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소.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조직원들이 조금씩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겁니다. 

곧 그들의 엄청난 정보력이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도망을 칠까, 아니면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아니면 발뺌을 할까 여러가지 방법을 구상하던 와중에 

마침 그 동생 놈이 죽은거요. 

그리고 경찰들은 그 핸드폰의 통화내역을 보고 그 동생놈을 마두라고 여긴거요. 

마두란 실존 인물도 아니니 우리 조직원들은 그 동생놈이 이름까지 바꿔가며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여긴 겁니다." 


"염..병..할...완전히 삽질했군.." 


박형사는 자신의 머리를 치며 자책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럼 지금 그 장부가 있나?" 


박형사의 물음에 백사라는 남자는 갑자기 박형사에게 휴대폰을 던져 주었다. 


"회장이라고 불리는 두목의 개인 사무실 금고에 있소. 

오늘 밤 그들이 약물, 시체, 장부....모든 증거를 옮길 예정이오. 

오늘 밤이 지나면 영원히 그들을 잡을 수 없소. 

지금 경찰 병력을 출동시키시오."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없이 박형사는 조용히 버튼을 누르고 통화를 시도했다. 


"나 박형사야...내 걱정 안해도 돼...무사해.. 

지금 그 스탠드바로 형기대, 타격대 모조리 쏟아부어!! 

업소 안쪽에 창고까지 모조리 압수수색해!! 

영장은 나중에 발부받아!! 

내가 책임질테니까 지금 출동해!!" 


통화를 마친 박형사는 백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가는 건가?" 

"그 놈이 있는 곳...." 

"뭐?" 


박형사는 나를 한 번 뒤돌아보더니 표정을 살폈다. 


"잠깐 그 전에 먼저 뒤에 있는 강형사부터 병원으로 옮겨줘." 

"좋소이다. 그 정도야 뭐...." 


가까운 병원에 들린 우리는 응급실로 강형사를 옮기고 백사의 차량으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장부에는 뭐가 있지?" 


박형사의 질문에 백사는 잠시 쓴 웃음을 지었다. 


"몇 년전에 우리 클럽에 김나연이란 갓 스물 넘은 미모의 어린 친구가 들어왔소. 

그냥 빠에서 얼굴로 승부하면서 대화도 나누고, 술도 따라주며 손님을 접대하던 여자였소.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보다 말도 잘하고, 옷도 잘 차려입더이다. 

1년 정도 지나자 그녀의 요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소.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놨지. 

그녀와 말 한마디를 나누기 위해 밤새 부산에서 달려오는 손님도 있었고, 사업체 출장근무를 포기하고 

날이 새도록 그녀와 얘기하는 손님도 있었소. 심지어 일본에서 오는 손님도 있었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수 백만원의 술값은 문제가 아니었소. 

우리 조직은 엄청난 그녀의 힘을 느끼자 손님들을 회원제로 바꾸었소. 

최고급 손님들만 받은거요. 그것도 그녀를 만나는 시간을 정해서....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잘못이었소." 


백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 다음에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큰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라는 친구가 우리에게 요구를 하나 하는거요. 

그녀와 잠자리를 주선하면 좋은 거래를 하나 하겠다고 합디다. 

그의 말은 조직 입장에서는 실로 군침이 도는 것이었소." 


박형사가 잠시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병원 마약이었군." 


"그렇소. 병원으로 유입되는 마약 진통제들을 유통시켜 주겠다는 것이오. 

그것도 공짜로 말이오. 

우리는 흔쾌히 승락했소.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거요. 나연이가 그 원장과 잠자리를 거부한거죠. 

우리 조직은 포기할 수 없었소. 

상품가치가 떨어질까봐 나연이에게 손만 대지 않았지 온갖 협박을 다 동원했소. 

심지어 가족들까지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소. 

그래도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소.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갑자기 결근을 한거요. 

도망을 친거죠. 우리 조직의 정보력은 이미 경찰 내부까지 닿아 있어서 찾는 건 시간문제였소. 

이틀만에 나연이가 잡혀왔소. 

그런데 잡아오는 와중에 나연이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나연이의 아버지가 조직원들의 손에 당했소.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죽게 된겁니다." 


"씨..발 놈들...깡..패..새..끼...들은 사회의 암..덩어리라니까....다 싸그리 총살시켜버려야 해." 


박형사의 분노섞인 탄식이 쏟아졌다. 


"후후....그 세계 생..리가 원래 그런거요. 

하여튼 나연이는 반..실..성 상태로 돌아왔죠. 

일을 시켜야 하는데 도대체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때 그 원장놈이 약을 하나 추천해 줍디다. 

펜타닐(fentanyl).... 

모르핀보다 100배나 센 진통제라고 하는데 효과는 끝내줍디다. 

나연이가 손님들을 접대하기 시작한거요. 

원장놈이 나연이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나돌자 

 

발..정..난 개..들..처럼 사방에서 고위층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기 시작했소. 

우리 조직은 바보가 아니오." 


"혹시 모를 내일을 위해 장부에 그들을 기록해 두었겠군." 


"그렇소 사육하듯이 길러지는 나연이가 언제 한 방에 훅 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힘있는 자들을 옭아맬 족쇄를 만든거요. 

그들이 우리를 배신할 수 없도록 말이오. 

특히 그 원장놈의 경우는 나연이과 함께 밤을 보낼 때 우리가 비디오까지 촬영해 두었소. 

그 장부에 기록된 명부를 보면 당신도 깜짝 놀랄거요." 


"경찰 고위층도 있나?" 

"내가 그나마 경찰에게 일말의 믿음을 갖는 것은 당신네 소속은 거기에 없었다는거요." 


나는 순간 궁금한 점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창고의 여자 시체는 뭐예요?" 

"간호사?" 

"그래요. 간호사...." 


"원장하고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야. 원장이 나연이에게 맛들려 있는데 그 여자가 눈에 들어오겠냐? 

게다가 그 원장 놈이 병원 장부 조작하다가 그 여자한테 들킨거야. 

그 여자는 그걸로 원장을 협박하면서 다시 만나주길 바랬고.. 

그 때 원장이 하고 싶었던 건 뭐였겠냐? 뻔하지 뭐.... 

결국 원장이 부탁해서 조직원들이 처리한거야..." 


"씨..발..새..끼..들...오늘 내로 니 들 모두 평생 콩밥이나 먹을 준비나 해라.." 


박형사는 마치 총이라도 있으면 쏴죽일 기세로 그를 몰아 붙였다. 


"너무 흥분하지 마쇼. 형사나리...나는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개..새..끼..들...." 


어느새 차량은 큰 대로에 진입했다. 

백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 상류층 모임을 '사일런트 엔젤'이라고 불렀소." 


뒷좌석에 앉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귀가 쫑긋 서는 기분이었다. 


"사일런트 엔젤이 그거였군요. 그 말 한마디에 난 죽을 고비를 몇 번을 겪었고..." 


"시간대를 정해 그녀를 만나니 나연이를 상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서로 모르는거요. 

물론 그들도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오. 오로지 나연이를 만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우리는 나연이의 상품가치를 길게 끌어야 했소. 

그래서 약도 펜타닐에서 비교적 약한 염산페치딘으로 바꾸었소. 

그런데 그게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거요. 

나연이가 현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거요. 

나연이를 감시하면서 보살핀 사람은 나였소." 


그는 갑자기 지난 기억에 대한 아픔이 밀려오는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처음에 업소에 들어온 날부터 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소. 

그녀가 출퇴근을 할 때는 매일 같이 차로 동행했소. 

조직에서 시킨 일이었지만 나에게 일이 아니었소. 그냥 행복 그 자체였소. 

그녀와 같이 있는 1초, 1초가 나에게 너무나도 즐겁고 짜릿한 시간이었소. 

한 번은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차 안에서 작은 초콜렛 케익 상자를 하나 건넵디다. 

살아오면서 온갖 험하고 거친 일을 모두 겪으면서, 

 

오로지 독기와 증오, 투쟁만으로 얼룩진 나에게 나연이는 하나의 커다란 오아시스였소. 

그 순간 나연이를 품고 싶었지만 그것은 곧 우리 서로에게 종말을 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나는 우리 조직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오랜 시간이 흘러가도 난 나연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버릴 수가 없었소. 

나연이가 그렇게 망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나의 심정이 어떠했겠소?" 


어느덧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나연이가 어느 날 저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합디다. 

저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소. 

조금만 견뎌보자고 그녀를 위로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소. 

그런데 얼마 후 난 내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된거요. 

사일런트 엔젤 중에 시의원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놈 보좌관이란 녀석이 항상 따라다녔소. 

아주 핸섬하고, 매너있고 굉장히 유식한 놈이었소. 게다가 참 착해 보였소. 

이름이 박태수란 놈이었는데 그 놈도 나연이에게 푹 빠져 버린거요. 

의원놈이 그녀와 술자리를 하는 동안 보통은 밖에서 기다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자리에 동석을 하는거요. 

나연이가 의원놈을 설득해서 그런 거라오. 

나는 육감적으로 알아챘소.

그녀도 그 보좌관 놈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나를 떠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소..." 


백사는 잠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저 깊은 곳으로 사라졌던 독기와 증오, 분노가 그 놈을 보는 순간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소.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 나는 ㅇㅇ대로로 그를 유인했소." 


"죽였군." 


박형사가 끼어들어 그가 할 말을 대신 해주었다. 

백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놈을 죽이고 나니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고, 이젠 자신감까지 붙었소. 

모든 것을 터뜨리고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기로 작정한거요. 

그래서 당신한테 연락을 한거요." 


"너를 죽이겠다고 나타난다는 놈이 박태수 그 놈이야?" 

"그렇소" 


백사는 힘없이 대답을 했다. 


"박태수.....결국 그 사람이었군요...." 


나는 진실에 맞닥뜨렸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떠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지 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몇 초간의 침묵이 차량 안을 맴돌았다. 


"김나연은 어떻게 죽은거야?" 

"자..살했소...." 

"뭐? 자..살? 씨..발 거짓말 아냐?" 


"거짓말 아니오. 정말 자..살까지 할 줄은 몰랐소. 

그 보좌관 놈이 안보이자 우리가 처리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은거요. 

그 만큼 그 놈을 사랑했으니까 그랬겠죠....." 


"그래서 사체를 정화조에 버린거야?" 


백사는 박형사의 물음에 대답을 거부한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나연이가 우리 업소에서 죽은 걸 엔젤들이나 경찰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이었소. 

우리는 나연이의 일가 친척에게 다가가 얼마의 돈을 쥐어주고 실종신고를 하라고 했소. 

우리 입장에서는 나연이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되니까 

 

경찰들에겐 큰 의심을 사지 않을거라 생각했소. 

그 친척들이 우리의 행동을 의심할 만도 했는데, 돈 앞에는 꼼짝 못하는거요. 

우리도 쓰레기였지만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소. 

나연이와 떨어져 사는 아버지를 그 누구 하나 돌봐 주지도 않았으면서, 

 

우리가 돈을 건네자 나연이의 실종을 자기 일처럼 슬퍼하는거요.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거요.." 


"뭐가?" 


백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전방을 주시했다. 

자신이 운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걸까? 


"아저씨...정신차려요!!" 


나는 그의 정신을 깨우려 소리쳤다. 

그제서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린 분명히 산속 깊은 곳에 묻었소. 

그런데 나연이가 정화조에서 발견된거요. 

우리가 나연이를 묻은 산과 정화조는 가까이 있지만 

 

이건 누군가가 옮기진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오." 


밤 10시가 훨씬 넘었음에도 대로에는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량이 넘쳐났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 

익숙한 이 길..... 


"이봐요. 아저씨....지금 여기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보냈다. 


"항상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는거야...." 


이에 박형사가 그의 말을 제지했다. 


"야! 너 무슨 말 하는거야?" 


그는 아무 대꾸없이 파손된 가드레일 옆에 차량을 급정지시켰다. 

내가 사고를 낸 지점이었다. 

그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그 정화조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둘러 따라 내린 우리는 무표정한 그의 옆모습을 살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임무는 여기까지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임무라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을 아시오? 이젠 맘 편히 떠날 수 있겠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박형사는 게속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야?"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눈빛으로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화조가 너무 얕다고 생각해 본 적 없소?" 


순식간이었다.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대로로 뛰어들었고, 고막을 찢는 듯한 타이어의 스크래치음이 들렸다. 

큰 트럭에 치어 공중으로 떠오르는 그가 보였다. 

10미터 이상을 날아간 그의 몸이 힘을 잃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나동그라졌다. 

트럭에 뒤이어 여러 차량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섰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박형사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서서히 사람들 틈 사이로 그가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고의 처참함이 아니었다. 

처참함으로 따진다면 핏물로 머리를 감은 듯한 나와 박형사의 얼굴이 더 구역질을 유발할 것이다.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 하나는 엿가락처럼 휘어 머리까지 닿아있는 지금의 그의 자세도 아니었다. 

정작 우리의 눈을 의심케 만든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악스런 그의 모습이었다. 


수개월을 굶은 사람처럼 볼은 함몰되어 있었고, 몸의 수분을 쫘악 빨아낸 듯 몸은 말라 있었다. 

짙은 다크써클로 둘러싸인 눈알은 그 크기를 보여주기라도 하는냥 얇은 가죽이 된 눈꺼풀로 간신히 덮여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혈기왕성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저승사자 같은 청백색의 얼굴빛은 그가 조금 전에 죽은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묘한 미소를 띠며, 죽어있는 그의 모습 앞에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박형사는 숨소리같은 속삭임으로 넋두리를 했다. 


"씨..발...이젠 형사질도 못해 먹겠네.." 



웃대...하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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