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제사로, 올해부터 어느 시골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약제사는 나까지 모두 셋으로 막내인 나는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어느날, 평소처럼 저녁이 되어 외래 진료는 끝나고,
병동에서 온 오더를 보고 주사약 제조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오더가 까다로운 게 많아,
병동에 직접 문의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자니 시간이 꽤 늦어버렸다.
게다가 그 날 안에 약품 회사에 발주를 넣어야 할 약이 있어서,
그 발주서까지 만들어야 했다.
식당에 저녁 주문을 넣어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발주서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전화가 왔다.
하지만 수화기를 들어도 아무 말이 없다.
[약제실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전화기에는 A병동 간호센터로 번호가 찍힌다.
전화기가 고장났나 싶어, 일단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온다.
받아보면 아까 전처럼 아무 말이 없다.
이게 두세번 반복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약제실에서 나와 A병동에 찾아가보기로 했다.
A병동은 5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른다.
2층, 3층, 4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 순간, 나는 떠올렸다.
이 병동, 아직 공사 중이라 문을 안 열었었지..
여기저기 테이프가 굴러다니고 어두컴컴한 플로어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엘리베이터 문 정면에 있는 간호센터에, 간호사 같은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화재 경보기의 붉은 램프 불빛에,
간호 모자를 쓰고 가디건을 입은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무얼하고 있는건가 싶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다,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
그 간호사의 몸이 반쯤 투명해,
반대편에 있는 게 비쳐보이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마구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다시 열릴 때까지 그저 눈 감고 견뎠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오듯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발주는 해놔야했다.
종종걸음으로 약제실로 돌아가 미친 듯 발주서를 쓴 후 팩스에 넣으려는 순간, 또 전화가 왔다.
벨소리와 함께,
붉은 램프가 깜빡인다.
무시했다.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보고 싶지 않았다.
팩스가 보내진 걸 확인하고,
나는 불도 안 끈채 약제실에서 나와 문을 잠궜다.
불 꺼진 약제실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하니, 사무과 직원이 [왜 불을 켜놓고 퇴근하세요.] 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사과를 하면서,
나는 [A병동에도 전화가 걸리나요?] 라고 물었다.
[어? 의료국에서도 같은 문의가 있었는데.. 아직 공사중이니까 당연히 전화는 안 되죠. 왜들 그런걸 물어본담.]
출처 :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