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ch] 홋카이도의 외갓집

금산스님 작성일 17.05.06 11: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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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여름방학 때 내가 살던 도쿄를 떠나

홋카이도 외갓집에 혼자 놀러갔던 적이 있다.

 


외갓집은 멜론으로 유명한 마을 근처에 있었다.

국도 하나를 빼면 길도 다 비포장인 완전 시골이었다.

 


하지만 그 시골이야말로,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게는 신선한 매력이었다.

 


어머니는 대학을 다니러 홋카이도를 떠난 후,

그대로 시집을 가버렸다.

 


외갓집에는 외할머니말고도 어머니 대신 집과 밭을 물려받은 삼촌과 더불어,

아흔 넘은 숙모할머니까지 모두 세 분이 살고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었었다.

 


술버릇과 여자버릇이 나빴던 외할아버지는,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들 사이에서도 소외당한 분이었다고 한다.

 


생전 워낙에 망나니였던지,

불간에는 외할아버지 영정조차 없었기에 나는 외할아버지 얼굴도 몰랐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외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반쯤 금기시 되고 있었다.

잔치에서 다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잔뜩 화를 내며 외할아버지 욕을 해댄 탓에,

대략 어떤 짓을 했는지는 주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도 모르는데다

이미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내가 그리워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영정도 안 모실 정도로 싫어하는데,

어째서 숙모할머니는 외갓집에 머물고 계신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뭐, 어찌되었든 외할머니도 삼촌도

내가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반겨주셨다.

 


야산이나 논밭에 데리고 가,

시골에서만 할 수 있는 놀이도 잔뜩 알려주셨다.

 


하지만 그런 두 분과는 대조적으로,

숙모할머니는 화장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 오른쪽 서향 방에서 두문불출이셨다.

 


식사도 혼자 방에서 드셨기에, 얼굴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함께 놀아주는 외할머니와 삼촌은 무척 좋아했지만, 숙모할머니는 어쩐지 대하기 어려웠다.

 


숙모할머니는 회색 머리카락을 빗지도 않은채 까치집을 지은데다,

언제나 큰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숨기고 계셨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광경인데,

숙모할머니는 자주 노래하듯 일본어가 아닌 수수께끼의 말을 중얼거리곤 하셨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데,

화장실에 가려다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정말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뭐가 나오려다가도 안 나오는 기분이었으니,

내가 얼마나 숙모할머니를 꺼려했는지 익히 알만할 것이다.

 


하지만 숙모할머니와 평상시 만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해 열흘로 예정된 시골 생활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 피부가 다른 시골 아이들처럼 검게 타기 시작한 이레째 밤.

나는 2층에 있는 삼촌 방에서 삼촌과 함께 자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매일 놀다 지쳐 아침까지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깊은 잠을 잤었는데,

그날따라 한밤 중 귀에 익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려온 것은 현관 미닫이가 힘껏 닫히고,

누군가가 밖으로 달려가는 분주한 발소리였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멀리서부터 짧은 간격으로 들려오는 종소리.

그 종소리가 들리면 마을에 불이 난 것이라던 삼촌이 말이 떠올랐다.

 


종소리는 좀체 그치질 않고,

나는 불안해져 옆에서 자고 있을 삼촌을 깨우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불 위에 이미 삼촌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그제야 아까 전 현관문을 열고 달려나간게 삼촌이라는 걸 알아챘다.

 


소방서라고는 옆마을에나 있는데다,

그나마도 소방차도 아니고 소형 방수차만 두어대 있는 시골이다.

불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소방단이 나서서 불을 꺼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삼촌도 소방단 소속이었는데 문득 돌아보니 서랍은 열려 있고

삼촌이 멋있지 않냐고 자랑했던 은빛 방화복과 붉은 헬멧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는 의식하지 않았던 낡은 집 특유의 기분 나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얼룩이 가득한 나무판자 천장, 흐릿한 유리창..

눈에 띄는 낯선 것 모두가 방의 어둠을 강조하는 것 같아, 나는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랑 같이 잘 생각에,

삼촌방의 문을 열었다.

 


홋카이도는 여름이라도 밤에는 선선하다.

차가운 공기가 복도에서 확 밀려와, 나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삼촌방은 계단 바로 옆에 있었다.

문득 아래를 보니 마치 검은 물에 잠겨있는 것처럼 어두웠다.

 


그런데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나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된 집이라 계단 경사도 가파르고 난간도 없어,

나는 손으로 층계를 잡고 조심스레 한칸한칸 내려가야만 했다.

 


한걸음 내려갈 때마다 어둠으로 가라앉는 가파르고 캄캄한 계단은,

나를 겁에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무심코 외할머니를 불렀다.

 


[그으래.]

그렇게 대답하며, 그것은 복도에 나왔다.

 


공중에 떠올라 있는 그것은,

외할머니가 아니라 전통극에서 사용하는 새하얀 가면이었다.

 


가면 여기저기에는 작은 금이 가서 마치 주름처럼 보였다.

미소를 본떴을 터인 그 표정에서는 오히려 악의가 또렷이 전해졌다.

 


나는 공포로 몸이 굳어 위를 바라보려다,

몸이 젖혀져 그대로 뒤로 넘어가 아래층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사이 코와 팔꿈치를 계단에 부딪히고,

멈추면서 머리가 강하게 마루에 부딪혔다.

 


아픔과 충격에 새하얘졌던 시선이 겨우 돌아오자,

그 가면이 2층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혀 나는 기어가듯 거기서 도망쳤다.

도망치며 외할머니를 소리쳐 불렀지만, 돌아온 것은 [그으래.] 하는 가면의 대답 뿐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는 사이, 나는 복도 막다른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자 복도 끝에 그 가면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가면은 어느새인가 검은 안개 같은 몸으로 마루에 서 있었다.

그리고 떨고 있는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진흙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머릿속이 공포로 새하얘질 무렵,

[이텟케!] 하고 큰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복도 옆에 있는 문이 열리더니,

숙모할머니가 뛰쳐나와 나와 가면 사이에 무릎을 세우고 들어앉았다.

 


[쿠엣, 이완케. 이요맛메노코.]

내게 상냥하게 말하고, 숙모할머니는 다시 가면을 마주봤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따뜻한 숙모할머니의 눈빛은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침착하게 만들어주었다.

 


숙모할머니는 연기가 나는 도자기 접시 같은 걸 꺼내, 가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칼을 품에서 꺼내더니 가슴 앞에 대고,

노래하듯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말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숙모할머니도 가면도 가만히 있었지만,

이윽고 가면이 한걸음 앞으로 나아왔다.

 


순간 숙모할머니의 목덜미에 땀이 흐르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뒤에 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숙모할머니의 얼굴은 고통과 초조로 일그러져 있었으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숙모할머니 등에 붙어, 숙모할머니의 등을 필사적으로 쓰다듬었다.

문지른다고 사태가 호전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이야이라이케레. 람피리카폰헤카치.]

숙모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미소짓고, 다시 가면을 마주보았다.

 


[호시키에카시카무이, 에라에라이, 에르사! 웬카무이, 웬키쿠키쿠!]

숙모할머니는 노성을 지르며, 칼을 칼집에서 뽑아 마루에 찔렀다.

그러자 도자기 접시 같은 것에서 솟아나던 연기가 서서히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연기는 어렴풋하게 커다란 남자의 형상을 빚어낸다.

숙모할머니는 그 연기에 인사를 하더니 가면을 가리켰다.

연기는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서서히 가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가면 뒤, 검은 안개 같은 것과 얽히더니 서서히 현관 미닫이문 틈새로 사라져갔다.

남은 것은 진흙 같은 덩어리와 둘로 쪼개진 가면 뿐.

 


[온카무이, 온카무이. 아훈체로, 카리, 카무이모시리, 파예, 얀.]

그렇게 말하고, 숙모할머니는 고개를 숙여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쉰 후 등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숙모할머니의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숙모할머니는 소리 없이 울고 계신 듯 했다.

 


[어휴, 작은 불이어서 다행이었어, 정말.]

그렇게 말하며 삼촌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나는 긴장감이 풀리며 울음이 터져나왔다.

 


숙모할머니의 등을 계속 쓰다듬으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후 불끄는 걸 도우러 갔던 외할머니도 조금 늦게 돌아오셔서,

한동안 이것저것 정리에 나를 달래는 것까지 집안은 소란스러웠다.

 


정리가 다 끝날 무렵 간신히 내가 울음을 그치자,

외할머니는 숙모할머니의 말을 통역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원인은 마을에 난 불 때문이란다. 방화인지 뭔지, 누가 나쁜 마음을 먹고 불을 낸거야.

 그 나쁜 마음에 이끌려 나쁜 신이 이 마을에 나타났다가 우연히 우리 집에 온거란다.]

외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잘못했어. 불이 났다길래 당황해서 자다 말고 뛰쳐나가 우리 손주를 놓고 왔으니..

 불안해서 부른 소리에 나쁜 신이 대답해서 힘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 같구나. 미안해. 무서운 일을 겪게 해서.]

외할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숙모할머니는 진작에 요사스런 기운을 느끼셨다지만, 나이 때문에 바로 나오질 못하셨대.

 그래도 어떻게 늦지 않게 나오기는 하셨는데, 너무 완고한 신이라 아무리 돌아가달라고 부탁해도 듣질 않더란다.]

숙모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을 무렵, 네가 등을 쓰다듬어주니까 따뜻한 힘이 들어오더래.

 그래서 그 힘으로 선조님들한테 호소했단다. 그랬더니 선조님들이 그 나쁜 신을 신들의 나라로 데려가주셨대.

 어머, 할머니는 몰랐는데 우리 아기도 고생이 많았구나.]

 


[토아안, 헤카치, 아나쿠네, 람피리카, 헤카치.]

[어머나, 숙모할머니가 너를 보고 아주 솔직하고 올바른 아이래.]

나는 칭찬을 받아 수줍어하면서도,

왜 숙모할머니가 일본어로 말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외할머니는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숙모할머니에게 무언가 말하고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크게 헛기침을 하셨다.

 


[너한테는 조금 말하기 이를지도 모르지만, 좋은 기회니까 다 알려주도록 하마.]

외할머니의 대답에, 나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숙모할머니의 조카, 그러니까 너희 외할아버지는 아이누족이라는 부족 출신이었단다.

 물론 숙모할머니도 아이누족이고. 아이누라는 건 먼 옛날부터 이 홋카이도에 살던 사람들이야.

 하지만 여러 일이 있던 끝에 땅을 빼앗기고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된거란다.]

 


 [외할아버지는 아이누였지만 학교도 다녔고 일도 했어. 그리고 할머니와 결혼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젊을 때 너무 노력했던 탓에, 지쳐버린 나머지 나쁜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단다.

 그래서 일찍 세상을 떠난거야. 하지만 나쁜 짓을 저지른 영혼은 선조님들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 계속 외할아버지 대신 선조들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하는거야.]

 


 [그래서 아이누의 무녀였던 숙모할머니가 스스로 지원해서 선조들과 맹세했어.  샤모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아이누답게 산다는 맹세를. 아이누 말만 말하고, 하루 대부분을 용서를 빌며 지내는 맹세였단다.

 샤모라는 건 우리 같이 평범한 일본인을 말하는거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는 말도 많았지만, 숙모할머니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위해

여러모로 중요한 맹세를 지켜왔다는 건 어린 나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의 영혼이 선조들에게 올바른 아이누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집에도 외할아버지 영정은 두질 않았던거야. 제삿날도 기리질 않고. 그건 일본인의 습관이거든.

 외롭고 미안했지만, 외할아버지를 위한거라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외할머니 눈가에는 작게 이슬이 맺혀있었다.

 


[토오안, 폰쵸, 아나쿤, 코야이누파.]

외할머니 등 너머, 숙모할머니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외할머니는 놀라며 [정말로?] 라며 몇번이고 숙모할머니에게 물었다.

 


계속 고개를 끄덕이는 숙모할머니를 보고,

외할머니는 굵은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외할머니 등을 쓰다듬으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려달라고 재촉했다.

 


[실은 나는 아이누 말을 모르거든. 집에서 아이누 말을 아는 건

 원래 아이누이신 숙모할머니랑, 같이 지내며 아이누 말을 배운 외할머니 뿐이시란다.]

곤란한 듯 벅벅 머리를 긁는 삼촌을 밀치고, 외할머니는 내 손을 강하게 잡아끄셨다.

 


[고맙구나. 네가 상냥한 마음으로 숙모할머니 등을 쓰다듬어준 덕에, 선조님들이 외할아버지를 용서해 주셨대.

 올바른 마음을 지닌 후손을 남겼으니,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다는거야. 정말로 고맙구나.

 너를 도와준 선조님들의 영혼 속에, 외할아버지 영혼도 함께 있던 걸 숙모할머니는 느끼셨대.

 정말로.. 아니, 드디어 그 사람도 돌아갈 곳이 생겼구나..]

 


그렇게 말하고, 외할머니는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하셨다.

당황하는 나와 삼촌을 보며, 숙모할머니는 말없이 우리에게 방으로 물러날 것을 권하셨다.

나와 삼촌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와 2층 삼촌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상상도 못할 공포 때문에 느낀 피로 때문에,

삼촌은 불을 끄느라 지친 탓에 둘다 금새 골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외할머니는 조금 목이 쉰 걸 빼면 평소처럼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날은 처음으로 숙모할머니도 상에 같이 앉아계셨다.

 


[이걸 보면 놀랄까 싶어서 지금까지 안 벗었단다. 미안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마스크를 벗은 숙모할머니 입가에는 피에로처럼 입술을 강조한 무늬가 배어있었다.

 


검푸른 색에, 보기에는 마치 문신 같았다.

그 문신은 구레나룻 아래까지 이어진 무척 큰 것이었다.

 


[입 찢어진 여자 같지? 이건 챠로누이라고 하는 아이누 여자 화장이란다.

 처음보면 겁에 질릴 거 같아서 걱정됐거든.]

숙모할머니는 평범하게 일본어를 말하고 계셨다.

 


그날부터 나머지 이틀간, 나는 숙모할머니에게 철썩 붙어

아이누에 대해 뭐든지 좋으니 알려달라고 온갖 질문을 퍼부었다.

 


숙모할머니도 그 많은 질문에 싫은 표정 한번않고,

여러가지를 일본어로 가르쳐주셨다.

 


[수다 떠는 것도 참 즐겁구나. 그동안은 신들에게 용서만 빌었거든. 우리 꼬마 도령과 이야기하는게 훨씬 재미있어.]

그렇게 말하는 숙모할머니 얼굴은, 입 문신 때문에 얼굴 전체로 웃는 것처럼 보였다.

 


도쿄에 돌아가는 날,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숙모할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숙모할머니는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내 머리카락을 계속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셨다.

 

 


하지만 몸상태가 좋지 않으신지, 계속 기침을 하고 계셨다.

이대로 돌아가면 숙모할머니와 두번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하지만 확신에 가까운 예감 때문에 나는 숙모할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괜찮단다. 꼬마 도령은 올바른 마음을 지녔으니까. 어디 있던 선조님들께서 지켜봐 주실게야.

 이 할미가 이 세상에서 할 역할은 다 끝났단다. 그건 모두 꼬마 도령 덕택이었어.

 그러니까 할미는 이제 선조님들에게 돌아가서, 언제나 꼬마 도령을 지켜볼 거란다.

 쓸쓸해 하지 마려무나. 그저 오래된 옷을 벗고 가벼운 영혼이 되는 것 뿐이란다.]

숙모할머니는 역시나 웃고 계셨다.

 


그리고 결국 시간이 오고,

나는 숙모할머니에게 달라붙은 채 삼촌 차를 타고 공항에 왔다.

 


몇 번이고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나를 배웅하며,

공항 게이트 너머 숙모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오맛, 산테크. 야에라이케레. 란마노, 라무피리카, 이라무맛카, 에픈키네, 얀.]

손을 흔드는 숙모할머니에게, 나도 배워 알고 있는 아이누 말로 답하며 죽어라 손을 흔들었다.

 


[오맛, 우타리!]

나는 몇 번이고 [오맛!] 이라고 외치며, 탑승시간 직전까지 숙모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숙모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사인은 폐렴이었지만, 외할머니 말로는 마지막에 기침 하나 없이 편안히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뤄졌다.

그것은 외할머니 나름대로, 아이누로 평생을 보낸 숙모할머니에게 바치는 경의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숙모할머니 장례식에서,

외할머니에게 숙모할머니가 그 날 이후 아이누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숙모할머니가 아이누로서 보낸 일생은, 그날 후회없이 끝났을거야.]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셨다.

 


장례식이 끝난 후, 흰나무 널이 눈부시게 빛나는 숙모할머니 영정은

역시 새로 깎은 액자에 끼워진 외할아버지 영정 옆에 놓여졌다.

외할머니와 나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처음 본 외할아버지 얼굴은 숙모할머니와 무척 닮은, 갸름하고 싹싹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영정 옆에서 웃고 있는 숙모할머니 영정에는,

검디 검은 챠로누이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출처: VK's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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