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실화] 경산 코발트 탄광 학살 사건

미랄라군1 작성일 20.05.01 14: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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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 탄광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사건' 아시는 분 계신가요?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사건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알고싶다 등 언론이나 미디어에 여러차례 공개된 적이 있어서 아시는 분들도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TK지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서 TK 지역이란 대구광역시의 이니셜 T, 경상북도의 이니셜 K를 합친 것입니다.



(TK지역사람 중 3명 중 1명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 이 이야기를 읽어보신다면,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여러분들의 이해가 좀 더 명확해질거라고 생각합니다.



6.25 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대한민국의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경산 안경공장 학살사건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6.25 전쟁 기간 중에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 경부터 9월 20일 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경북 경산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 광산에는 수평 갱도와 수직 갱도가 있어 이곳에서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코발트광산은 1930년대 후반 일제에 의해 개발된 군사용광산이며, 일명 보국광산으로 불리웠습니다. 40년대 초반 폐광될 때까지 대동아전쟁 등에 소요되는 군사용 코발트를 공급했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직전 폐광된 후 방치되어 오다 대규모 민간인학살 적합한 장소로 지목되어 학살이 벌어지게 된 것 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근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의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의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7월에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 중 1,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50년 당시 경산, 청도, 영천, 창녕, 밀양 등의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직후 검속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아직 유해발굴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정 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 학살당한걸로 보입니다.




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이란거 아십니까?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 이 단체는 1948년 12월에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자 또는 전향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이 단체에 빠짐없이 가입시켰습니다.



근데 웃기는건 지역 경찰들이나, 공무원에게 할당 비슷하게 내려져서 대부분은 농민들,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도 많았습니다.



연령대는 1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했습니다.



거기다 문화예술인, 이승만정권이외의 사회정치세력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히 다시말하자면,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중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된 사람들도 대부분 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1949년말까지 이 단체의 가입자 수는 약 30만 명이나 됐고, 서울에만 1만 9,800명정도 있었습니다.



웃긴건 심심하면 불려나가서 기합과 반공교육을 받았다는 거죠. 집합시켰는데 안가면 주위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거기다 이 보도연맹의 체제는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체제를 모방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제 잔재가 그대로 남은 것인 동시에 절대 '민주'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우익세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보도연맹관련자들이 전국에서 학살됐는데, 약 20만명정도가 학살당한것으로 추정합니다.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 여주인공이 이것과 관련되어 학살당합니다.



피해자들은 거의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시민들인거죠.



학살 당시 목격담으로는



보도연맹원들은 예비검속 조치에 따라 자발적으로 경찰서로 가거나 집에서 그 지역 지서 경찰들에게 끌려가 경찰서나 담배창고, 수리조합 창고 등에 구금되어있다가 광산으로 끌려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또 그 당시 목격자들은 흰옷을 입은 약 30명을 실은 군용트럭이 하루에 10대, 열흘 정도 경산역전을 지나 평산동 쪽으로 갔다는 증언이 있으며 인원은 약 3000명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60년 당시 경산중앙초등학교에서 열린 위령제에 약 400명의 유족들이 참가했다는 증언과 60년 4대 국회 양민학살특위에 신고한 학살자 수도 356명이어서 청도지역 보도연맹원과 합치면 5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경산경찰서에 근무했던 황모 씨가 생전에는 진술을 거부하다 임종하기 전에 자식에게 광산에서 약 3,500명이 죽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답니다.



밤 중에 불려나가서 도시 인근의 야산이나 바다 혹은 폐광등에서 총살당하거나, 일제시대 순사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도로 참수를 했다는 말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에 저런 사건이 벌어졌다니 사실이라면 얼마나 처참한 일이겠습니까?



다만 해방되었는데, 일제잔재로, 일제무기로, 그 일본도의 주인은 뭐하는 인간이었을지.........




피해자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원으로서, 보도연맹에 가입할 당시 이름과 주소까지 기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학살 방식은



이후 2~3명 단위로 손과 발을 철사나 밧줄로 한데 엮고 수직 갱도 앞에 세워집니다.



그리고는 앞에서 밀어서 혹은 갱도 쪽 사람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해 중심을 잃고 수직 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고 합니다.



정말 끔찍한 방법입니다.



게다가 일부 인원이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발굴 과정에서 76mm 고폭탄까지 발견된 걸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한 걸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일부는 삶에 대한 의지로 갱도 위로 기어나오려다 힘이 다해 죽은 사체로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는 탄약을 아끼고 집행의 간편화를 위해, 세계대전 및 동시기 보도연맹원들을 바다 위에서 처형할 당시에도 암암리에 쓰였던 방식이라고 합니다.



다만 대부분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익사가 되는 깊은 강가, 바다 위에서만 했으며, 돌이나 무게추를 함께 엮은 뒤 던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학살 이후 이 지역에는 개울이 핏빛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이 1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는 굳게 잠겨있으며, 허가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관련 군 *경 부대로는




해공(해병대는 해군 산하라서 독립된 정보부대가 없습니다.) 정보부대 중 이 사건에 당시 육군본부 지구정보파견대 CIC 소속(현재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었던 22헌병대도 연루된 걸 보아, 사용된 무기류는 최대로 38구경 리볼버, M1919 브라우닝, M1911, M1 카빈, M1 개런드, 소이탄, MK2 파인애플형 파편 수류탄 등, 혹은 기타 대검류 등으로 추정됩니다.



시체를 태우려는데 소이탄을 안 썼을 리가 없으며,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기관총을 사용 안했을 리 만무한걸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최대로 사용한 무기종은 8종으로 추정되는데,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였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인 아픈 흑역사의 일면으로 남은 사상태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결정서에 따르면 "육군본부 정보국 CIC와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후 집단학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학살사건 이후




1960년 6월경에 이르러서, 사건이 발생후 처음으로 유족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강제해산시켰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위령탑은 쇠망치로 부서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정희정권에 의해 기존 자료마저 빼앗기고 소각되었고 유족들은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벌받았습니다.



또한 이후 유족들은 해외여행이나 공무원시험에 합격해도 발령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후 유족들이나 지역주민들은 쉽게 말할 수 없었고, 쉬쉬 했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지나서 김대중 정권당시 민간인학살에 관한 여론이 생기게 되었고(1999년 노근리 학살사건등)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는 듯 했지만, 서울과 지역의 유력 일간지등은 경산 코발트사건을 외면한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경산 경찰서를 찾아 사건 당시 문건과 관련 서류 공개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기도 했고, 유엔에서 파견단이 오기로 했으나 정부에 의해 입국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2006년 4월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2009년 12월 1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을 '국가에 의한 양민 학살'로 결론 내렸습니다.



학살이 일어난지 60여년 만에 국가가 인정한 것이지요. 이것은 과거사위의 권고내용입니다.



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국가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집단 학살한 것에 대해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위령사업 지원과 같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아직까지도 수많은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경산코발트광산의 경우 현장을 잘 보존하여 군인과 경찰, 공무원을 비롯해 초?중ㆍ고등학교 학생과 일반인에게 공개함으로써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게 2009년 말이었습니다.



사실 과거사위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에게는 '눈에 거슬리는' 곳 중 하나였을겁니다.



학살은 코발트광산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골짜기에서도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전체적인 유해발굴은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간 발굴 수습된 코발트광산 유해는 총 500여구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2009 3년간 수습한 420구만 충북대박물관을 거쳐 현재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되었을 뿐 나머지 유족들이 발굴한 유해 80여구는 현장 컨테이너 창고에 길게는 19년 짧게는 15년씩 방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행전안전부는 그동안 경산 홍성 등 지역유족회가 보관하고 있던 유해 130여 구를 올해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키로 하고 각 유족회와 시기를 조율해 왔다고 합니다.



임시 안치되는 유해는 경산 82구, 홍성 20구, 대전 20구, 부산 17구 등 총 139구로 현재 대전에 조성 중인 추모관이 완성되면 이곳에 옮겨져 영면을 취하게 됩니다.



이에 앞서 경산코발트유족회는 지난 2010년 5월 진실화해위가 현재 충북대에 보관 중인 유해 계약기간 만료에 따라 새로운 시설에 안장하는데 따른 유족들의 의견을 구하자, 유족회는 ‘이미 발굴된 500여구 외에도 현재 갱내에 수천 구가 방치돼 있는 관계로 나머지 미 발굴된 유해를 마저 발굴해 충북대에 보관 중인 유해와 함께 화장해 안장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고 합니다.



과거부터 요쳥했던 유족들의 요구가 10년 만에 받아들여져 유해들이 영면에 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에서는 2016년에 유해이송에 앞서 이날 천도재를 시작으로 전통제례의식을 갖춰 먼 길을 떠나는 유해들에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유해들이 떠나면 유족회는 그동안 유해 임시보관소로 쓰이던 컨테이너 창고를 정비해 3D모형과 유해 사진을 전시해 순례객들의 이해를 도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평산동 코발트광산은 매년 국내외 제노사이드 연구자와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2000여명 이상 현장을 방문해 반전 평화 인권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코발트광산유족회는 지난 2016년 국비 500여 억원이 투입되는 행안부의 추모공원 조성 공모사업에 주민반대를 이유로 경산시가 응모조차 하지 않자 경산시에 소규모 역사평화공원이라도 조성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를 했다고 합니다.



유족회는 지난 2013년 조성된 역사체험관광지조성사업 및 2016년 위령탑 건립에 이어 추가로 수평2굴이 포함된 기재부 소유 임야 800여 평과 수직 1, 2굴이 편입된 개인임야 1000여 평, 위령탑 인접농지 1000평을 추가로 매입해 총 3000평 정도의 소규모 역사평화공원을 조성해 일제의 지하자원수탈에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나아가 한국전쟁 직후 숨진 3500여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과 추모, 기억과 교육의 장소로 코발트 광산 일대가 활용하는 데 경산시가 적극 나서주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경산시는 지난 2013년 도비와 시비 7억 9000만원을 투입, 1차로 평산동 폐코발트광산 수직2굴 주변 정비사업에 착수해 갱도 내 안전도검사와 갱도 바닥정비, 수평2굴 갱도 내 조명, 수평2굴 입구 관람데크 및 안내판, 현장순례단 안내물품 보관창고 설치, 진입로를 정비,주차공간을 조성한 바 있으며, 이후 2016년 시도비 3억원을 들여 위령탑을 건립한 바 있습니다.



코발트 광산을 현재 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이곳에 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경산시의 소극적인 자세 때문에 진척이 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경산시에서는 “2016년에 건립한 위령탑 바로 옆의 사유지를 사들이는 문제 때문에 기념관과 공원 조성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전체 유해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남아있는 유해들이 많다고 하는데



진실화해 특별법이 지난 2010년에 종료되었기 때문에 추가로 유골을 발굴할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하며 추가로 발굴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법회에서 특별법을 재정하는


등의 절차가 선행되어야만 남은 3000여구의 유골들을 발굴할수가 있다고 전해왔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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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 : 그것이 알고 싶다 956회 참고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193951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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