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최악의 패싸움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해당사건은 1966년 8월 8일에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 군인 129명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대한민국 공군 비행학교를 새벽에 습격하여 해병대와 공군간에 패싸움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해병대측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개요
1966년 8월8일 해병대 장교들이 새벽에 공군 비행학교(현 제 5 공중기동비행단 및 김해국제공항)를 기습했다가 반격을 당해서 오히려 해병대가
더 얻어터지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사건입니다.
가볍게 생각하면 공군vs해병대의 자존심대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희대의 뻘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병대가 새벽에 자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하고도 오히려 반격을 받고 쳐발리는 굴욕을 당한 해병대의 창피한 흑역사라고 합니다.
7일 저녁 : 사건의 시작
1966년 8월 7일, 부산발 진해행 마지막 버스가 김해 비행학교 후문 근처인 덕두정유소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 안에 있던 술 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버스에 타려던 공군 장교 3명을 버스에 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이에 공군 장교 3명이 뒷문으로 버스에 탑승하자 해병대는 차안에서 시비를 걸었고, 공군장교들이 이들을 묵묵부답으로 상대하지 않자 발끈한 해병대 장교들은 한 공군장교의 작업모를 빼앗아 서로 던지며 희롱했다고 합니다
이에 참지 못한 공군장교가 해병대 장교의 몸을 밀쳐 자신의 작업모를 되찾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어 숫적으로 열세였던 공군장교들은 집단 폭행당한 후 차밖으로 팽개쳐집니다.
이 해병대 장교들은 해병대 장교로 임관된 뒤 해병학교 35기 기초군사반 과정에서 보수교육을 받던 중 1박2일 외박을 나와 있던 해병대 소위들이었고, 공군 장교들은 비행학교에서 조종교육을 받고 있던 피교육 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마침 버스 앞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공군 상병이 비행학교의 정성규 소위 등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공군 장교 16명이 보복하려고 군용 트럭으로 문제의 버스를 추격하여 웅천에서 버스를 세운 뒤 해병 장교들을 버스밖으로 끌어내고 마구 구타하였다고 합니다.
7일 저녁 : 공군의 추격
그리고 사건은 말도 안되게 커지기 시작합니다.
공군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장교들은 해병학교에 돌아가자 곧 이 사실을 동료 해병들에게 알립니다다.
이번엔 해병장교들이 분개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8일 새벽 128명의 해병장교가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진영역에 집결합니다.
게다가 이 때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전원 무임승차를 합니다.
무임승차 금액은 1인당 75원씩인 1만125원. 이 돈 45년 뒤인 2011년 8월 코레일에 예비역 장교가 되어 당시 가격을 지금으로 환산하여 100만원으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분승하여 김해 공군비행학교의 입구인 평강 마을에 도착했다.
128명의 해병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밭을 포복하고 이동하여, 마치 잠복전투훈련을 하는 식으로 정문을 기습했다고 합니다.
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공군헌병 김용만 병장을 납치하여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방을 안내하라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간첩으로 몰려 사살 당해도 할 말이 없겠네요.
실제로 초병을 폭행하거나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은 즉각 발포로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민간인이 아니라 누구보다 군율에 철저해야 할 장교들이 월남전 직전만 아니었다면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새벽 5시 50분 쯤에 김 병장의 안내로 약 1km 거리인 조종학생 내무반에 도착했고, 128명의 해병장교는 4개 내무반에 분산침입, 돌과 주먹으로 새벽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합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잠이 깬 조종학생들이 내무반 밖으로 도망치자 돌을 던지며 추격합니다.
이 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 사령실에 침입하고, 근무사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주번사령 최성만 중령(작전과장)에게 학교장과 전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사과 하도록 강요합니다.
8일 아침 : 공군의 반격
그러나 비행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아침 6시 20분 비상소집을 걸었다. 비행학교 전장병 약 3백여명이 연병장에 집결해있는 해병장교 128명에게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해병장교들은 연병장에 집결하기 전에, 자고 있던 조종학생 10여명을 폭행하여 이미 무력화 시켰고, 3개소 내무반의 유리창 31장 등의 기물을 마구 파손합니다.
쌍방 4백명이 얽힌 패싸움은 10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전세가 불리해져서 공군장병들에게 밀리다가 쫓기게 된 해병장교들은 공군장병들에게 "더 추격해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고 위협하고, 실제로 돌을 마구 던져 TS28A형 항공기 TA858호 좌측날개 전면 3개소, 우측프랙 1개소와 날개 끝을 깨뜨리는가 하면, TA 886호의 하우링 좌측 전면 1개소 및 프로펠러의 베어링 등을 부쉈다고 합니다.
즉 해병대 자신들이 공군장병들에게 좀 덜 맞으려고, 국가의 재산이자 소중한 국방전력인 (더구나 몹시 가난했던 당시 1960년대엔 더더욱 귀중했던) 항공자산을 고의로 파손시킨 것입니다.
명색이 해병대 장교란 자들이 자기를 헌신해서 국가의 중요재산을 지키려 하긴 커녕, 오히려 중요한 국방 자산을 담보로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한 것입니다.
8일 아침 : 해병대 도주
아침 7시 쯤, 철조망 밖으로 나간 해병장교들은 제각기 흩어져 달아납니다.
이 가운데 이의일 해병소위가 철조망 밖 늪에 빠져, 패거리들에게 구조되었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기사에는 구조되고 9시에 숨졌다고 하나, 아무래도 사인이 익사라는 점을 보아서는 그냥 물에 빠져서 사망한 듯 합니다.
피해
이 사건으로 2대의 비행기가 파손되었고, 도합 39명의 중상자가 나왔으며, 1명의 사망자(이의일 해병소위)가 나왔습니다.
이의일 소위는 66년 경희대를 졸업하고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아들 3형제중 막내라고 한다. 부검결과 익사로 판정되었습니다.
사건의 마무리
장지량 공군참모총장과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현지에 달려갔고, 국방부에서는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현지조사에 나서게 하였으며, 해병 20명과 공군 14명을 연행하여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이 잊혀지고 해병대 출신의 회고글 혹은 해병대의 각종 야사 썰들을 모아 놓은 해병대 출신들의 블로그 등에서나 언급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도배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합니다(국군끼리 패싸움이라니).
정부와 군 상층부에선 처음에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도 했으나, 당시에는 월남전 상황이라 장교들은 필요한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주동자들만 군사 재판에 회부하고 사건을 넘기고 말았다고 합니다.
해병대쪽 주동자인 전도봉도 퇴학당했지만 월남전으로 인해 복귀하였으니 실제 처벌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전도봉 소위는 일단 이 사건의 주동혐의로 현역부적합전역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전도봉 소위가 모든책임을 대표해서 떠앉기로 하고 군필을 하는 조건으로 모든 죄를 떠 앉고 나머지 재판을 받아왔던 10명의 해병대 장교들은 전원 풀려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전도봉에게 현역병입영통지서가 발부되었고 이에 전도봉은 "장교로 군복무했던 사람이 뭔 현역병이냐!"고 반박하는 바람에 계급을 그대로 인정받고 복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월남으로 파병을 가게 됩니다.
요약 : 공군장교들(3명)이 해병장교들(8명)에게 구타당함.
이에 폭행당한 공군장교들은 동료들을 데리고 와 해병장교를 집단구타함.
격분한 해병장교들 128명이 비행학교로 침투하여 공군장병 300여명과 집단 패싸움.
수적으로 불리한 해병장교들 뿔뿔히 흩어지는 도중 항공자산과 기타기물 파손.
항공기 2대 파손. 39명 중상. 해병장교 1명 사망
공군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급파되어 진상조사 착수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려 하였으나, 월남전 직전으로 장교가 많이 필요하여
해병20명 공군14명만을 조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