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사건은 1996년 6월 3일 온두라스 국적의 선적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에서 벌어진 선상 반란 사건으로 당시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 조선족 선원 1명 총 선원 11명을 심야에 1명씩 차례로 불러내어 흉기로 죽이거나 찔러서 바다에 던지는 식으로 발생한 살인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국내에 알려지자, 페스카마 호가 한국으로 입항하기 전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고 합니다.
사건의 최종 판결은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이 변호하여 1심에서 사형이었던 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건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1996년 6월 7일 부산의 남항에서 페스카마호 15호라는 선명을 가진 참치잡이 어선 한척이 출항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이 배에는 선장을 포함하여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인 10명의 총 17명의 선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고합니다.
출항 당시만 해도 아무도 이런 끔찍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겁니다.
페스카마호는 그렇게 검은 바다를 전력으로 달려서 6월 15일경 유명 휴양지인 괌 인근의 타니안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 끔찍한 사건의 당사자들을 포함한 조선족 7명을 태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족을 포함해 배의 총 인원은 24명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출항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합니다.
애초 페스카마호 15호는 승선정원이 25명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었고, 일손이 많이 부족했으므로 선장과 회사 모두 노동력을 보충하기로 합의를 봤던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현재도 이쪽 업종에서는 인건비 등등의 문제로 노동자들을 외국인으로 채우는 경우가 지금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다만 당시 조선족 선원들을 탑승시킨 결정적 이유는 이들이 그나마 다른 외국인들과는 달리 한국인 선원과의 의사소통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원만할것이라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했던것은 같이 일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언어가 아니라, 성실함과 인간성라는 인성적인 부분 역시 중요하다는걸 간과한것 같습니다.
배에 승선한 이 조선족들은 그냥 무조건 해외에서 일하면 대충 해도 큰 돈을 만질수 있을거라 생각한 그야말로 몰릴대로 몰린 마지막에 벼랑 에 선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당시 조선족들을 수사해 보니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선원자격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주로 하게 될일이 단순노동인데다가 딱히 다른 대안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그냥 이들을 고용했던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지금도 그러지 않을까 싶네요
나중에 알고보니 조선족 선원들 중에는 불법체류자 신분인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것으로 보아 그만큼 선원관리가 허술했다는 유추를 해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당시 운행한 페스카마호는 일본의 한 조선소에서 1978년에 건조된 배였다고 합니다.
총 25명의 승선이 가능한 254톤의 참치잡이 어선입니다.
페스카마호라는 선적은 해외에 두고 국내에서 관리를 하는 편의취적선이었다고 합니다.
선적은 온둘라스이고 선주는 오만회사인 오션인더스트리였다고 합니다.
이를 한국인 선사가 구입하여 원양어업절차가 간편하고 세금이 비교적 저렴한 제3국에 등록시켜, 선장을 비롯한 주요업무와 관리,감독은 한국인이고 나머지 선원은 그때그때 각국에서 충당하여 고기를 잡고 이를 판매한 이익으로 선원들의 임금과 운영비등을 대는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실제 운항에 대한 관리는 대현수산이 맡았고, 선원의 송출에 대한 부분은 제양에서 담당하고 있어서 당시 수사중인 경찰은 한국인 사장이 해외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것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6월 16일 페스카마호와 선원들은 오랜 항해를 위한 정비와 휴식을 마친뒤 함께 남태평양으로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6월27일경 첫 조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대를 했던 조선족들은 처음의 말과는 달리 뱃일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열심히 했던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처음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힘들고 지겨운 단순노동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던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한번 배에 타면 상황상 쉽게 쫓아내지는 못할것이란것을 알고 시간만 때우려 했을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렇게 위험하고도 힘든일을 하면서 이들을 더욱 화나게 했던것은 다름아닌 한국선원들의 언어폭력과 강압적인 말투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참치잡이 어선이라든지 이쪽 배를 타는 일은 저런 언어폭력과 강압적인 태도가 빈번하다고 합니다.
이는 배를 타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특히나 더 큰 불만과 분노를 촉발시킨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선원들이 폭력을 자행했다 하더라도 무려 11명을 살해한 이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찾거나 면죄부를 줄수는 없다고 보입니다.
그렇게 한국인 선원들과 조선족 선원들 사이에는 점차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추악하고 끔찍한 살인극은 이같은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선원들이 아닌 조선족들에 의해 증폭되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 또다른 갈등사항은
이들은 자신들과 한국인 선원들의 급여가 다르다는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조선족선원들은 월급제였던 반면, 한국인 선원들은 어획량에 따른 추가 인센티브를 받고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국인 선원들은 더욱 열심히 일을 하고 또 외국인 선원들을 독촉했을것이고,
조선족들은 어차피 이래저래 받는 돈은 똑같으니 굳이 더 열심히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회사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 선원들이 특별히 이들에게만 악용했던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자국의 선원들이 단순노동만을 하는 외국인노동자들보다 높은 어획량을 채운후 보너스를 받는건 회사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것을 조선족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기술도 의지도 없는 자신들도 한국인 선원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했던것 같습니다.
결국 이런 조선족들과 한국인선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일이 굉장히 힘들어지고,
조선인 선원들의 이런 불만들이 선장의 귀에 자주 들어가게 되면서 32세 최기택 선장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출항 20일째인 6월 27일
최기택 선장은 고의적으로 일을 회피하는 조선족들을 갑판으로 불러모았다고 합니다.
바로 선장의 권위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선장은 일을 못하는것은 어느정도 이해할수있었으나 고의적 태업에 대해서는 용서를 할수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위에서는 선장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할수있을것입니다.
이는 원양어선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볼수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손이나 다리 어쩌면 목이 날아갈수도 있는 극한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극도로 위험하고 한정된 작은 공간이라는 환경이 군대에서나 볼수있는
상명하복의 규율을 만들고 또 선원들은 암묵적으로 그에 동조하게 된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 두 집단간의 갈등은 이 전까지도 계속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날의 상황은 이렇게 축적된 두 집단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한것 같습니다.
두집단의 분노는 선장의 기합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선원경력이 없던 조선족들에게 나이어린 선장의 권위같은건 상관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선장의 말을 무시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 조선족 선원들에 화가난 선장은
급기야 본보기로 조선족선원 한명을 때렸다고 합니다.
기합을 주며 쇠파이프로 엉덩이를 때리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잘못으로 선장의 판단미스였던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선장의 권위를 세우기는 커녕 아예 전면적인 대립으로 악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쇠파이프를 피하다 어깨를 맞은 이씨는 곧 바로 반격에 나섰던것입니다.
선장의 얼굴을 가격한 이씨는 곧이어 참치처리용 칼로 선장을 찌르려 했던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결국 한국인 선원들이 가세하면서 사태는 일촉즉발의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양쪽 모두 참치를 다루기 위한 도구인 도끼와 칼, 갈고리등을 손에들고 대치를 하게 된것입니다.
이 두집단은 한동안 서로를 위협하다 선장의 사과와 가장 나이가 많았던 전재천의 중재로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이를 두고 전재천이 평화주의자였다거나 어쩔수없이 범행에 가담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일단 이 두 집단은 겉으로는 평화적인 해결을 보게 되는데요,
그러나 이는 내재된 문제의 근원이 명확히 해결된것이 아니라 잠시 수면아래로 가라앉았던것 뿐이라서
언제라도 봉합된 부위를 뜯고 그 심연의 악마들이 튀어나올지 모를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배위는 한국인선원과 조선족선원이 극명하게 갈려 대립하는 한마디로 극도의 대치상태의 공간으로 변질됩니다.
서로가 협동해도 일이 잘 될까 말까인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것입니다.
그러던중 어느날 인도네시아 선원 한명이 다른배로 옮겨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이제 페스카마호의 인도네시아 선원은 9명만 남게 됩니다. (배의 총인원은 23명)
당시 한국인선원과의 전면대립이후 조선족들 사이에는 알수없는 자신감이 팽배했다고 합니다.
이는 점점 선장으로 하여금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족들은 대치당시 조업을 거부하며 즉각 하선을 해줄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의 상황상 이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습니다.
그 거대한 배가 그 먼 항구까지 한번 출항하고 입항하려면 그 시간과 비용,
그리고 그동안 조업을 못해 발생하는 기회비용의 손실등 이들에겐 천문학적인 손해가 발생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손해를 선장을 포함한 한국인 선원들이 일정부분 책임질수밖에 없는 구조였기때문에
한국인 선원들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으리라고 추정됩니다.
이게 어쩔수 없는 일인것이, 참치잡이 자체가 엄연한 사업이고, 이들은 그 사업을 위해 사업주가 고용한 근로자였기 때문입니다.
잘되었을때 인센티브를 받는만큼 문제가 생겼을때의 책임또한 막중했던겁니다.
일부에서는 마치 조선족들은 그대로 하선하면 목숨같은 돈이 날라가고 인생을 망친다고 조선족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고있었지만
사실 이는 한국인 선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한국인선원들도 조선족들 못지않게 힘들고 각박한 환경에서 겨우 연명하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던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필연적인 요인을 배제한채 무조건 하선을 요구하는 조선족들에게 선장은 오히려 위축되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실질적인 갑질을 조선족들이 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한국인 선원에 대한 더욱 깊고 끔찍한 증오를 쌓아가고 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결국 돌이킬수없는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더 어둡고 깊은 심연의 저 바닥으로 내려앉아 훨씬 더 끔찍하고 잔인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일견 페스카마호에는 평화가 찾아온듯 했으나 사실 이 평화는 폭풍전야의 그것으로 보입니다.
애초 평화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평화를 가장한 페르소나,
그들은 그렇게 가면을 쓰고 남몰래 적대감을 키워가고 있었던거죠.
끔찍한 증오와 분노를 숨긴채 말입니다.
선상대치이후 다시 조업이 재개 되었으나 유의미한 실적은 없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어획량을 봤을때 사실상 조업자체가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던거죠.
조선족들은 겉으로 화해하긴했으나 계속해서 선장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또한 선장이 통제권을 상실함에 따라 극도의 나태함에 빠져있엇던것 같습니다.
조선족들은 자신들이 뭉치면 한국인 선원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것이고,
어차피 조업이 끝날때까지는 입항할일도 없을테니,
대충 입항때까지 시간만 때우다가 돈만 챙겨서 집으로 가면 될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것들이 결국 태업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던것 같습니다.
조선족들은 당시 한국인 선원들이 명령을 내리면 이를 거부하고, 항시 칼을 들고 다니며 불만이 생기면 집단으로 대항했다고 합니다.
또한 매일 한 두명은 교대로 조업을 거부하고 침대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있을수없는 일이 벌어진것입니다.
한마디로 놀고먹으려는 태도를 보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조선족들은 점점 업무태만과 명령불복종이 이어지게 되면서
또 다른 집단이 불만을 터트리게 됩니다.
바로 이 당시 양 집단이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인도네시아 선원들이었습니다.
이들로서는 당연히 불만을 가질법한 일이었을겁니다.
다 같은 선원인데 조선족들은 놀고있고, 한국인들은 자신들만 닥달하니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계속해서 참아 넘기기엔 그들도 사람인지라 한계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결국 선장과 한국인 선원들은 선상징계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한 심도 높은 회의를 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내려진 결론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조선족선원들을 전부 하선시키기로 한것입니다.
이런 결론은 선장으로서도 어쩔수 없는것으로,
조선족들은 그렇다고 쳐도 인도네시아선원들마저 조업에 나서지 않으면 사실상 조업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선장은 어차피 조선족들을 그대로 데리고는 정상적인 어획작업이 불가능할것으로 판단했던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결정된 일이고 또 더 나은 방법이 없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킵니다.
선장은 곧바로 어업기지에 귀항한다는 연락을 취하게 되고 , 회사또한 선장의 요구와 판단을 수용함에 따라,
선장은 조선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중도하선에 대한 모든 책임은 조선족 선원들 스스로가 부담한다"라는 내용을 골자로한 서약문서에 사인을 요구합니다.
이윽고 조선족과 한국인 각각 7명과 인도네시아선원 9명등 총 23명의 선원을 태운
페스카마호 15호는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서 육지로의 귀항을 재촉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다급해진것은 이제 조선족들이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은 자신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것입니다.
대충 시간만 때우고 돈을 받아서 집에 갈 생각에 행복감에 들떠있던 이들에게 이런 결론은 굉장히 충격이었던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쩌면 회사측에 위약금을 부담해야 할수도 있고,
하선의 이유가 징계라는것을 들키면 다른 어선에 채용되기도 힘들어질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불법체류자 신분인 경우 강제 송환될수도 있었으니 그 불안감이 상당했던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알고있던것들은 사실과는 다소 다른것으로,
실제로는 징계로 인하여 하선하더라도 체류비나 항공료만 공제하게 되는거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막대한 위약금을 회사측에 지불해야 할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후 태도를 바꿔 다시 열심히 일하겠다고 합니다.
선장은 단호하게 거절해버립니다.
최선장은 열심히 하겠다는 그들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이미 이들을 겪어본 선장은 이들의 말이 분명히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할거라고 판단했던것입니다.
또한 이미 회사측에 확실한 귀항의사를 밝힌후인지라 회사측에서는 조선족선원들을 대체할 다른 선원들을 선발해서, 사모아항에 대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위험부담을 안고 배를 돌릴 이유가 최선장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선장의 단호한 거절을 듣고 조선족들은 자기들끼리 오랜시간에 걸쳐 회의를 시작하는데 이게 아주 끔찌한 회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드디어 심연 깊은곳에 감춰두었던 내재된 극도의 증오심과 분노를 하나둘씩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다른 선원들을 모두 죽이고, 제 3국으로 밀입국 하는것으로 의견을 모았던것입니다.
대체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길래 사람을 죽이자는 일이 이들에겐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되었는지 그들의 과거가 의심됩니다.
8월 2일 사모하항으로의 귀환을 서두르던 배에는 갑자기 맹장이 터져 항구로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한국인 실습기관사 최동호군이 옮겨타게 됩니다.
이리하여 페스카마호에는 한국인 8명 조선족 7명 인도네시아인 9명의 총 24명이 함께 하게 됩니다.
당시 탑승한 최동호 군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면, 최동호군은 맹장수술을 하기 위해 육지로 향하는 배를 찾던중 가장 근거리에 있던 페스카마호와 접선하여 옮겨타게 된것입니다.
불과 19세에 불과했던 최동호군은 승선 6시간 만에 아무 이유없이 산채로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런데도 이들이 마치 폭력에 의해 어쩔수없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저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런 범죄자들에게도 인권을 주장한다면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군요.
실제 이들이 살해한 인원은 총 11명인데,
그들중 이들이 폭력을 저질렀다고 하는 사람 6명을 뺀 나머지 인원은 폭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었던것입니다.
6명이 무려 11명을 잔인하게 찢어죽인 사건에서 아무도 사형수가 없는 판결이라는게 놀라운 부분입니다.
아무튼 한국인선원에 순종적인 한명을 제외한 조선족들은 선장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하자,
항해사 이인석씨만 항해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선원은 모조리 죽이기로 계획한후 바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2편에 계속됩니다.
관련기사 : https://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8276&Newsnumb=2019118276
출처 :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196892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