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멜 [Rommel, Erwin Johannes Eugen 1891.11.15 ~ 1944.10.15]
독일의 군인
별칭 :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
국적 : 독일
활동분야 : 군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육군원수. 연합국과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으로 알려졌으며 진정한 군인으로서 살기를
원했으나 종전이 다가오는 1944년에 자살하였다.
1891년 11월 15일 뷔르템베르크 하이덴하임안데어브렌츠 출생. 1944년 10월 14일 울름 근처 헤를링겐에서 사망.
롬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고위 관리의 딸이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독일 남부의
중산층에서도 직업장교가 인기직종이 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집안에 군인 출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제124 뷔르템
베르크 보병사단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중위로 프랑스·루마니아·이탈리아에서 싸웠다. 부하들에 대한 깊은 이해, 남다른 용기, 천부적인 리더십
은 아주 일찍부터 대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롬멜은 프랑스의 참호전을 경험한 뒤 이탈리아 산악부대로 이동하였다.
서부전선에서 경험한 참호전에서 무의미하게 쓰러져가는 부하들을 보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탈리아 산악부대를 지휘하면서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던 기동력을 살린 기습공격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철십자훈장을 수상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뒤 롬멜은 군대에 남았다. 프로이센-독일군에서는 일반참모로 복무하는 것이 진급의 정상
코스였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길 거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방군과 히틀러의 국방군에 있을 때에 그는 한결같이 일선
보병장교로 근무했다. 많은 위대한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데 각별한 재능이 있어 각종 군사학교의 교직에 임명되었
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전투경험이 젊은 병사들에게 군인정신을 강조한 그의 사상과 결합하여 그가 지은 군사교본
<보병 공전술 Infanterie greift an>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었다. 이 교본은 1937년 처음 출판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된 후 롬멜 대령은 빈 근처의 비너노이슈타트에 있는 장교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총통 사령부 경호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그것은 일선에서 싸우길 열망하는 군인에게는 별로
만족스러운 직책이 아니었다. 롬멜이 빠른 진급을 한 것은 히틀러와의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롬멜이 지휘하는 부대를
사열하던 히틀러는 친위대가 있는 한 사열을 할 수 없다는 롬멜대령의 주장을 시작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히틀러를 경호하는 임무를 맞아 히틀러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또한 독일군 수뇌부가 대부분 귀족출신이란
점이 히틀러의 평범한 출신인 롬멜에 대한 애착을 크게 했는지도 모른다. 롬멜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
1940년 2월에 제7기갑사단의 사단장직을 맡은 것이다. 그는 기갑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공격임무에서
기계화된 기갑부대의 엄청난 가능성을 재빨리 파악했다. 프랑스 해협 연안에서의 기습공격은 그의 대담성과 창의력을 알려
주는 최초의 증거가 되었다. 롬멜이 지휘한 제7기갑사단은 연합군으로부터 "유령사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부대는
구데리안과 함께 전격전, 기동전이 무엇인가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1년 후인 1941년 2월 롬멜은 리비아에서 패배 일보 직전에 처한 무능한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군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사막은 그가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대가 되었으며 동시에 월등히 우세한 적에게
패하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의 전쟁터에서 대담무쌍한 기습공격을 감행한 그는 아군과 적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로 불렸으며 굉장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한 성공에 감동한 히틀러는 즉시 그를 육군 원수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동맹군과 사이 좋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영국군에게 더 호감이 갔다.
그는 초대 중동지역 연합군 총사령관이며 북아프리카에서 그의 적수가 된 아치볼드 웨벨 경이 저술한 전투책자의
애독자였다.
그는 이탈리아 동맹군뿐만 아니라 직속 최고사령부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히틀러의 견해로는 북아프리카는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중되는 보급의 어려움으로 지친 부대를 철수하게 해달라는 롬멜의 요청을
무시하고 1942년 여름 히틀러는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롬멜이 이끈 독일-이탈리아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96㎞ 떨어진 이집트의 엘알라메인에서 몽고메리가 지휘하는 영국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 무렵 그는 아랍 세계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아랍 세계에서 영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자'로 비쳤기 때문이다.
고국에서는 선전성을 통해 그를 무적의 '국민의 원수(元帥)'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대(對)이집트 공격은 그의 재능으로서도 역부족이었다. 피로와 질병으로 약해진 롬멜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사이 몽고메리는 엘알라메인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비록 전선에 복귀는 했지만 1942년 10월말 그는
엘알라메인의 제2차 전투에서 패하여 튀니스의 독일군 교두보로 퇴각하였다. 1943년 3월 히틀러는 그를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 후 아프리카전선은 수 개월을 버텼을 뿐이다.
1944년 롬멜은 연합군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프랑스 해협의 해안방위 책임을 맡았다. 이때 기동전으로 승리를 얻었던
롬멜은 해안 방어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비상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그는 적이 대규모의 교두보를 설치하는 것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저지해야 하고 반격에 대비하여 해안의 방어선 뒤에 강력한 예비대를 배치해 두어야 하며 적군을
바다로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침공전의 운명은 첫날에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룬트슈테트는 연합군을 내륙 깊이 유인하여 기갑부대로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항공전을
경험한 롬멜은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갑부대 이동에 제한을 받을 것이며 적이 교두보를 구축하기 전에 해안에서
적군을 격파해야 한다고 했다. 롬멜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대륙과 가장
가까운 깔레에 상륙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롬멜의 주장은 1944년 6월 6일이 되면서 모두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전멸당하는 것 뿐이었다. 롬멜은 상륙당일 아내의 생일로 베를린에 있었다.
전선에 복귀했을 땐 이미 전선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일찍이 1943년 가을에 정치적 욕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직업군인이었던 롬멜은 전쟁을 도저히 승리로 이끌 수 없다
는 것을 확신했다. 또한 그는 히틀러가 그 사실을 직시할 자세도, 연합국들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는 불가피한 결론을 내릴
준비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롬멜은 총통에 대한 군인으로서의 충성과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심하게 갈등했다. 1944년 봄 비밀리에 결성된 히틀러 반대파에 가입한 롬멜의 친구 몇 명이 그에게 접근하여 히틀러가 축출
된 뒤에는 롬멜이 국가 원수직을 맡아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독일을 전쟁으로부터 구출하려
는 공모자들은 히틀러 암살계획을 롬멜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롬멜이 정치적인 목적의 살인을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내리는 일체의 처형명령을 한결같이 무시했던 것이다.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몇 번이나 히틀러에게 전쟁은 패했다는 것과 연합국들과 강화를 맺어야한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했다. 1944년 7월 17일
전투가 한참 치열할 때 롬멜의 차가 영국의 폭격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아 길에서 탈선했다. 차는 공중으로 튀어올랐고 그는
머리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후 8월에 집으로 돌아가 요양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 사이 1944년 7월 20일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음모는 실패하고 롬멜이 음모자들과 접촉한 사실이 밝혀졌다.
히틀러는 '국민의 원수'가 자신의 적으로 법정에 출두하고 법정에서 교수대로 보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2명의 장군을 롬멜에게 보내 그가 재판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와 그의 가족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
과 함께 자살을 권유했다. 10월 14일 롬멜은 음독자살하여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는 최고의 예우로 치러졌으며 "
사막의 여우, 롬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