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반하지마라 작성일 07.10.26 19: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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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latvia)
유럽 북동부 발트해(海)의 동해안에 있는 나라.
위치 : 발트해 동부
면적 : 6만 4610㎢
인구 : 242만 8000명(1999)
인구밀도 : 37.6명/㎢(1999)
수도 : 리가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라트비아어
통화 : 라트
환율 : 0.58라트 = 1달러(1999)
1인당 국민총생산 : 2,430달러(1997)
면적 6만 4610㎢. 인구 242만 8000명(1999). 인구밀도 37.6명/㎢(19990. 정식명칭은 라트비아공화국(republic of latvia)이다. 수도는 리가이고 공용어는 라트비아어이다. 북쪽은 에스토니아, 남쪽은 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 연방과 접하고, 남동쪽은 벨로루시와 국경을 이룬다. 발트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의 하나로서 위치·인구·영역의 규모에서 세 나라의 중간이다. 발트3국은 동쪽 배후에 러시아 연방을 업고 발트해로 나아가는 지리적 위치에 있고, 라트비아는 좋은 항구가 발달한 리가만(灣)을 안고 있어 발트3국의 중심적 위치에 있다. 현재의 영역은 1945년 러시아에 할양된 파탈로포 지역을 제외하면 1940년의 영역과 동일하다.


라트비아의 자연
라트비아의 지형은 지질구조상 선캄브리아 동유럽평원의 일부를 형성하며, 대체로 평탄한 저지와 높지 않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파랑성 평야이다. 구릉은 빙하가 이루어 놓은 빙퇴석이 많다. 지형에 따른 지역구분은 해안저지와 서부, 중앙, 동부 내륙지역이 있다. 해안저지는 발트해와 리가만을 둘러싼 평야지대로 해안은 단조롭지만 몇몇 자연항이 발달하였다. 서부는 쿨사고지에 파랑성 기복이 나타나지만 대체로 평탄하다. 중앙부는 남서부의 평야에서부터 라트비아 최고봉인 312m의 고지에까지 높지 않은 기복이 있는 지역이다. 동부지역은 벨로루시 남동부에서 인접하는 고지대이며 1,000개 이상의 빙하성 호수가 있다. 1만 2,000개 이상의 하천이 있지만, 주요 수로는 중앙부를 흘러 리가만으로 들어가는 다우가바(서드비나)강(江)과 동부 고지대에서 발원한 가우자강이 있다.
기후는 해양의 영향으로 해안은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 온난하나, 내륙부는 습윤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긴 편이다. 1월 평균기온은 서부 해안이 -2.6℃, 내륙은 -6.6℃를 나타낸다. 7월 평균기온은 해안이 16.8℃, 내륙이 17.6℃로 서늘한 편이다. 수도 리가의 평균 연강수량은 567mm이며 6, 7, 8월에 많다. 고위도에 위치하여 증발량에 비하여 강수량이 많기 때문에 습지가 많고 토양은 갈색 포드졸이다. 영토의 2/3 이상이 삼림·목초지, 방목지, 습지, 황무지 등이다. 우랄산맥 서쪽에서 북유럽으로 전개되는 유럽혼합림지대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어 삼림이 발달하였는데 소나무·*나무·자작나무가 주요 수종이다.


라트비아의 주민
1998년말 현재 라트비아의 인구구성은 전체 인구의 56.65%가 라트비아계이며, 러시아계가 30.33%, 벨로루시계가 4.33%, 우크라이나계가 2.73%, 2.25%가 폴란드계이다. 1935년의 라트비아인 비중 75.5 %에 비하면 러시아계의 유입과 라트비아계의 출생률 감소로 라트비아계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도시거주 인구의 비중은 1996년 현재 73%에 달하며 전체 인구의 거의 50%가 리가와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한다. 라트비아는 1988년 공용어를 러시아어로부터 라트비아어로 바꾸었다. 라트비아어는 인도-유럽어족으로서 발틱어의 일원이다. 라트비아의 민족문제는 최대 소수민족인 러시아계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소련의 지배시기에 라트비아인에 비해 특권적 위치로 이주해 들어온 러시아계는 라트비아의 러시아화 정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9년 발효한 라트비아 공식 국가공용어법에서는 국가공무원에게 3년 안에 라트비아어를 익힐 것과 중등 고등교육기관에서 라트비아어를 점진적으로 익힐 것을 요구하였다. 또 1991년 라트비아 최고회의는 1940년 이후에 이민온 사람들에게는 16년 이상 라트비아에 거주하고 라트비아어를 말할 줄 알며, 충성을 맹세하고 다른 시민권을 포기하는 자에게만 시민권을 허용한다는 법안을 채택하였다. 라트비아의 주요 종교는 그리스도교이다. 대부분의 라트비아계는 전통적으로 루터교이며,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다른 개신교파를 따르는 이들도 많다. 라트비아의 러시아 정교 신자는 대부분 러시아계이다.


라트비아의 역사
1290년 게르만족 상인과 선교기사단이 라트비아를 침입하여 리보니아국을 건립하였다. 게르만인은 도시지역에서 상인 무역인들로 활동하고 시골에서는 봉건귀족으로 행세하였다. 16세기까지 수도 리가는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주요 구성도시였다. 또 이 시기에 종교개혁과 루터교가 라트비아에 수용되었다. 1591년 리보니아는 분열하여 폴란드에 사실상 종속되었다가 1629년에 스웨덴에 점령되었다.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 결과로 1721년에는 대부분의 라트비아 영토는 러시아 통치하에 들어갔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하고 소련은 라트비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1922년 라트비아는 민주주의 정부를 도입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곧이어 국내적으로 농지개혁을 시행하고 서유럽에 대한 농산물 수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경제불황과 함께, 의회가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1934년 수상 칼리스 울마니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 통치를 시행하였다. 1929년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하에서 라트비아는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으로 라트비아 내 소련 군사기지를 허용토록 강요받았다.
1940년 소련의 압력으로 라트비아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하고, 그해 8월에는 소연방에 가입하였다. 1941년 독일이 점령하여 독일군은 1944년까지 주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소비에트 라트비아가 재건되고 라트비아 공산당의 독재하에 소비에트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공산당 주도하에 금속, 기계공업의 도입과 화학공업의 발달과 함께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강요된 산업화는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의 이민유입을 촉진하여 독립 이후 민족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공업부문의 급격한 발전은 농업부문을 정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1950년대 초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유 토지는 정책에 의하여 집단농장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업화에 의한 경제적 독립성 증대는 라트비아 공산당 내에서 보다 큰 문화적 자율성을 요구하는 운동을 점증시켰다.
라트비아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의 재생은 라트비아어를 라트비아공화국 내의 지배적 언어로 유지할 필요성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의식의 성장은 점차 라트비아 문화와 문학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반소시위도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개방정책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촉진하였다. 1988년에 들어와 광범위한 반소 독립세력들이 ‘라트비아 인민전선(lpf)’을 형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지도적인 반정부세력뿐 아니라 라트비아 공산당 급진파도 합류하여 약 25만의 규모를 가진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조직으로 발전하였다. 1989년 8월에는 발트3국이 공동으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전체길이 620km에 달하는 ‘인간 사슬’ 시위를 벌여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몰로토프·리히트호펜 비밀의정서에 의한 소련 편입을 무효선언하도록 요구하였다. 1988년 라트비아 국어·국기와 같은 국가독립의 상징을 고안하는 것이 합법화되고 완전한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하는 라트비아 민족독립운동이 인민전선을 주도하게 되었다.
1989년 선거에서는 라트비아 인민전선 후보들이 의회 34석 중 26석을 획득하였다. 비슷한 독립운동이 이웃 발트 국가인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도 전개됨에 따라, 최고소비에트는 주권과 경제적 독립선언을 채택하는 데 이르렀다. 1989년 12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라트비아 인민전선 후보들이 75%를 득표함에 따라 비(非)라트비아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민족주의는 확고부동의 것이 되었다. 1990년 1월 라트비아 최고소비에트는 공산당의 권력독점에 종언을 선언하고 소연방에 가입을 요청한 1940년의 의회결의를 비난하면서, 그 이전의 국기·국가문장 그리고 국가를 부활시켰다. 1990년 최고소비에트 선거에서 여러 정파로 구성된 라트비아 인민전선 구성원들이 전체의석 201석 가운데 131석을 차지하였고 선거 후 이름도 최고회의로 바꾸었다. 59석을 차지한 라트비아 공산당도 분열하여 독립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1990년 5월 1일 최고회의에 대립하는 라트비아 의회가 비공식적 선거를 통하여 소집되었다. 특히 의회는 1940년 독립 당시 시민과 그 후손만을 유권자로 한정하였는데, 급진적 독립운동단체인 ‘라트비아 민족독립운동(niml)’이 의회를 지배하였다. 의회는 라트비아를 점령상태로 선언하고 독립에 의한 점령상태 해결과 소련군의 철수를 채택하였다.
라트비아의 독립선언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보다 늦은 것이지만, 소련 당국을 자극하여 독립선언 무효화 포고령을 내리게 하였다. 1990년 12월까지 라트비아 내 비 라트비아계의 항의와 파업이 계속되고, 1991년 1월에는 소비에트 통치를 재건하려는 파와 독립파 간의 무력충돌이 있었다. 1991년 3월 구소련 9개 공화국에 의하여 제안된 신연방조약 참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반대하여, 그 대신에 “민주적이고 독립된 라트비아를 원하는가?”라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75%가 독립을 지지한 결과가 나왔다.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계가 권력장악을 시도하는 쿠데타를 행하였으나, 긴급 소집된 최고회의에 의하여 실패하고, 완전독립의 선언, 공산당 불법화, 친공산당계 인사 체포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


라트비아의 정치
1991년 8월 21일 선언된 라트비아 독립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라트비아의 독립을 신속하게 승인하자 소련국가평의회도 1991년 9월 승인하였다. 또 라트비아는 9월 17일 유엔에도 가입하였다. 완전독립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시민권에 관한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최고회의는 1940년 이전부터 시민이었던 자와 그 후손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지만, 다른 주민에게는 귀화를 신청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많은 러시아계와 다른 슬라브계는 16년 이상 라트비아 거주와 라트비아어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귀화조건에 항의하고 있다. 정치제도는 단원제인 100석의 최고회의가 의회체로서 최고기관이다. 1998년 10월 선거에서 라트비아의 길(lc) 21석, 국민당(tp) 24석, 조국과자유당(tb/lnnik) 17석, 사회민주동맹(lsd) 14석, 국가화합당(tsp) 16석, 신당(jp) 8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현재 대통령은 비케-프레이베르가로 1999년 6월에 최고회의에 의해 선출 되었다.


라트비아의 경제
라트비아는 소연방시대에 비록 소비에트 중앙계획경제에 연계된 상태이지만, 라트비아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공업화로 농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기준으로 7%이며, 농업인구는 16%에 지나지 않는다. 주된 농업부문은 낙농업과 돼지사육이다. 주요 작물은 곡물·감자·사탕무·채소·과일 등이다. 공업생산이 1998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의 28%를 차지하고, 고용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공업부문은 기계제조·금속, 그리고 화학 및 석유화학산업이다. 라트비아는 이탄과 약간의 철광을 제외하면 자연자원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원료는 수입에 주로 의존한다.
수출액은 1998년 기준 19억 달러로서, 주요 품목은 목재와 목재품, 기계 장비류의 순이다. 라트비아는 목재·목재가공품 외 cis(독립국가연합:구소련)에서 수입하는 철·석유제품을 서양에 재수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부터 반입되는 원료로 생산되는 과학장비 기계, 그리고 많은 소비재 상품을 다시 다른 지역(주로 서양)으로 수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라트비아의 무역상대국은 1990년대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과거 소연방 국가들이 64.1%로 주를 이루었는데, 독립 이후에도 라트비아의 수입품은 cis에의 의존도가 여전히 증대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1980년대 후반 외국무역의 자유화에 따라 외국 상대국과의 접촉이 증대되고 합작회사의 설립이 급증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라트비아 정부는 시장경제 도입을 의도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라트비아 통화인 라트를 발행하였다. 지금 라트비아 경제는 독립을 획득한 이후, 러시아 및 구소연방국가와의 연계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보다 넓은 세계로 국가경제를 통합시켜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1997년 현재 수출 상대국은 러시아 21%, 독일 14%, 영국 14%, 스웨덴 8%이다. 수입 상대국은 러시아 16%, 독일 16%, 핀란드 10%, 스웨덴 8%이다.


라트비아의 경제-교통
라트비아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러시아라는 거대한 육지를 배후지로 하고 발트해에 면한 리가만에 좋은 항구를 가진 입지적 장점이다. 라트비아는 원료자원은 매우 빈약하나 발트해의 좋은 항구와 이를 러시아와 연결하는 철도·도로망을 잘 갖추고 있어 특히 소련 지배하에서 급속히 공업화되었다. 라트비아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인 리가항은 다우가바강 하구에서 15km 상류에 있는데, 수심이 10m이며 19개의 부두를 가지고 수출입 화물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겨울에는 결빙하는 단점이 있으나 쇄빙선를 활용하여 운항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러시아 원유수출이 벤스필스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고 1993년 1,630만톤이 수출되었다. 근래에 컨테이너 터미널이 건설되어 시베리아 철도를 통하여 극동의 나호트카와 리가항이 연결됨으로써 화물취급량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제2항구인 벤트스필스항은 러시아 석유수출항으로 유명하다. 발트해 연안에는 많은 휴양지가 있다. 1997년 현재 도로 연장은 55,942㎞이고, 포장율은 38.3%이다. 철도연장은 2,406㎞로 전화율은 11.2%이다.


라트비아의 사회
라트비아는 1918년부터 포괄적인 초등교육 체제를 도입하였다. 소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됨에 따라 소련의 교육제도가 도입되었다. 1988년부터 라트비아어가 주된 교육 언어로 채택되었고, 국어로 됨에 따라 모든 학생들에게 라트비아어 교육이 필수과정으로 되었다. 1997년 현재 리가기술대학과 라트비아대학을 비롯한 18개 고등교육기관과 5만 1,500명의 학생이 고등교육기관에 등록 되어 있다.
1989년 당시 의료서비스에 대한 지출이 국민소득의 3.6%에 달하고 병상수는 1만 명당 147개였다. 의사 비율이 국민 200명당 1인의 세계 최고수준으로 세계적 의료복지수준을 갖추고 있다. 사회복지는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1992년 현재 176개의 병원과 인구 만명당 병상수는 130개이며 의사 수는 인구 만명당 41명이다. 1993년 65만 7,700명이 사회복지의 수혜 혜택을 받고 있다.
환경 악화는 1980년대 대두한 사회운동 및 정치집단의 주요 운동주제였다. 다우가바강에 대한 오염, 공장배출물과 라트비아 주둔 러시아군에 의하여 발생되는 공해가 환경단체의 주요 관심사이다. 1996년 현재 도시화율은 73%이며, 수도 리가의 인구는 91만 455명이다. 다른 주요 도시는 다우 가필스(124,910), 리에파야(114,486), 에가바(74,105) 등이다.


라트비아의 문화
라트비아어는 리투아니아와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 언어의 발틱줄기에 속한다. 라트비아어로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585년에 출간된 교리문답집에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러시아인과 다른 슬라브계 사람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라트비아 주민의 거의 절반이 라트비아어를 쓰지 않고 있다. 대신 대부분의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라트비아 문화는 민속문화와 그들의 땅에 대한 애착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 의식을 가끔 고대관습과 섞이기도 하며 이교도 상징들의 흔적이 가끔 응용예술 분야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고대민요는 19세기 중반에 크리스자니스 바론스(krisjanis barons)에 의하여 최초로 수집되고 출판되었다. 1888년 안드레지스 펌퍼스(andrejs pumpurs)의 방대한 서사시 lacplesis의 출판은 현대 라트비아 문화의 여명을 밝혔다. 자니스 라이니스(janis rainis)는 라트비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작가이다.
현재의 유명한 라트비아 시인 이만츠 지오도니스(imants ziedonis)는 라트비아 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금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라트비아에는 대부분 리가 (riga)시에 많은 수의 극장, 오페라단, 교향악단, 서커스단이 있다.


라트비아의 과학기술
1991년 라트비아의 라텔콤이 민영화되었고, 20년간의 공중전화 독점 운영권을 확보하였다. 우편, 통신, 방송 등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곳은 교통부 산하의 통신과이다. 통신 사업자로는 1992년 공중망 사업자로 설립된 라텔레콤이 있고, 51%의 지분을 정부가 소유하고 있다. 1996년 현재 본회선수는 74만 회선이고, 회선 보급률은 29.8%이다.
2004년까지 전화 보급률을 36%로 올릴 계획을 진행 중이다. 1997년말 현재 라텔레콤은 22만 40 디지털회선을 포함한 74만 8,000회선을 운용하고 있다. 독립직후, 모든 국제망은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경유하였으나, 1995년 국제 교환기가 도입되어 1996년부터 가입자들은 직접 국제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셀룰러 전화 가입자수는 1998년 현재 8만 4,600명이고, 보급률은 3.2%이다.
인터넷망은 두개의 사용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저가의 학술망이고, 다른 하나는 초고속망으로 노르딕 넷을 경유하여 접속이 가능하다. 1997년말 현재 약 30개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가 있다.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사는 민영방송사인 라트비아 인디펜던트 텔레비전(lnt)과 공영방송사인 라트비자스 발스트스 텔레비지아(ltv1, ltv2)가 있다. 지역방송사는 민영방송사인 리가스 tv가 있다.


라트비아의 한국과의 관계
라트비아와 한국은 라트비아의 독립 직후인 1991년 10월 22일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5년 4월에 정종욱 대통령 특사가 라트비아를 방문하였고 1996년 발디스 비르카브스 라트비아 외무장관이 방한 하였다. 1996년 양국간에 투자 보장협정이 체결되었다. 1997년 대(對)한국 수출은 314만 달러, 수입은 1,002만 달러이고 주요 수출품목은 수산물, 화학제품등이다. 수입품목은 자동차, 섬유류, 계측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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