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북한에 지원한 쌀이 강원도 등 비무장지대 (dmz) 인접 북한군 최전방부대로 유출된 사실을 우리 군 당국이 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이후 최근까지 잇따라 포착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북한군 부대로 유출된 것으로 확인된 쌀이 담긴 마대는 10여 차례에 걸쳐 4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우리가 북에 지원한 식량이 군용(軍用)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우리 군 당국에 의해 군 전용 의혹이 직접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군 당국은 이같은 사실을 파악하고도 몇년 동안 북한측에 항의는커녕 경위를 묻지도 않아, 남북관계를 의식해 중대 사안을 숨겨온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13일 "강원도 등 동부 및 중부 최전방 군부대 지역에서 북한군이 대한적십자사 마크 또는 '대한민국'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는 쌀 마대들을 트럭에서 하역하거나 부대 내에 쌓아두고 있는 모습이 우리 경계병력에 의해 계속 관측되고 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관련 장면을 찍은 사진도 여러 장 확보해둔 것으로 알려졌다.
최전방 부대 *에 밝은 한 소식통은 "지난해 12월에는 강원도 인제 지역의 북한군 부대에서 '대한민국' 글자가 찍힌 쌀 마대들이 다른 북한 쌀 마대들과 함께 쌓여 있는 모습이 우리 최전방 부대 초병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우리측이 지원한 쌀을 전용하지 않았다고 북한군이 부인하더라도 북한군이 이 마대들을 최전방 진지 구축에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 만큼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통신감청을 통해서도 대북(對北) 지원 쌀이 군용으로 전용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최된 남북 장관급 회담이나 군 장성급 회담 등에서 현 정부는 이를 문제삼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 군 당국이 대북(對北) 지원용 쌀이 북한군 최전방 부대에 유출된 사실을 10여 차례 포착함으로써 그동안 설(說)로 만 떠돌던 대북 지원 식량의 군용(軍用) 전용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 종전에는 중국 접경지역이나 항구에서 '대한민국' 이라고 찍힌 쌀 마대가 군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과 군용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만 알려져 왔을 뿐 이다. 특히 우리가 지원한 쌀 마대가 우리 군과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군부대 여러 곳에서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북한군이 대북지원용 쌀을 전군(全軍)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용해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빈 마대 전방 진지구축에 활용
우리 군 당국은 '대한민국' 글자가 새겨져 있는 쌀 마대가 군 트럭에 실려 있다가 군부대 내에서 하역되거나 야적(野積)돼 있는 장면을 고성능 카메라로 촬영해 포착했다. 군 당국은 이를 토대로 우리가 지원한 쌀이 북한군 식량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마대들은 북한제 마대들에 섞여 있는 상태로 발견됐는데, 북한군이 실수로 노출시킨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군이 포착한 또다른 장면은 같은 종류의 마대가 북한군의 진지구축에 활용되고 있는 현장이다. 군 소식통은 "남한 쌀 마대들은 북한 것에 비해 훨씬 튼튼하기 때문에 북한군이 진지구축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당초 남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쌀을 지원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군사용으로 관련 물자가 사용되는 것은 대북 지원 취지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보 당국은 통신감청을 통해서도 지난 5년간 대북지원 쌀이 군부대에 광범위하게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굶주린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 지원된 쌀이 엉뚱하게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 '눈'과 '귀'로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군당국, 정부 코드 의식한 듯
현 정부나 군 당국이 북측에 경위를 확인할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현 정부 들어 남북 장관급 회담 등 정부 차원의 접촉이나 남북 장성급 회담 등 군 차원의 접촉들이 빈번히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전방 지역에서 잇따라 발견된 남한의 쌀마대 문제에 대해선 단 한 차례도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나 군이 남북관계나 현 정부의 정책 등을 의식해 대북 지원 식량 배분상의 심각한 문제점을 알고도 방관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일부 소식통들은 "군의 중간 계층 책임자들이 대북 화해를 기조로 하는 현 정부의 코드를 의식해 군 수뇌부와 청와대 등에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북측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데 대해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쌀지원 문제는 기본적으로 통일부 소관사항이어서 국방부가 나서서 언급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은 원산, 남포 등 항구에서 군용트럭이 대북 지원식량을 실어갔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에 대해선 "북한에 운송수단이 군 트럭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기도 했다.
◆배분 투명성·지원량 연계해야
그동안 대북지원 식량의 군용 전용 의혹은 탈북단체나 탈북자들도 꾸준히 제기해 왔다. 탈북자 연합단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가 지난해 12월 탈북자 2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0.4%가 "남한지원 쌀이 군부대에 우선적으로 간다고 본다"고 응답했다. 이 단체의 심층 인터뷰에서 남포 출신 탈북자 a씨는 "남포항에서 쌀 실으러 들어가는 차는 몽땅 군부대 차량이었다"며 "강원도 5군단에서 1개 중대가 1년 내내 파견돼 쌀을 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이런 사실을 토대로 북측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하고 식량 배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 사회의 특수성상 군이나 당 간부들에게 쌀이 먼저 가기 쉽겠지만,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국방연구원 백승주 박사는 "식량 배분의 투명성과 지원 규모를 연계하는 시스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