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민의 계급적인 원쑤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 김일성
“도주한 놈을 무조건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 놈들이 도주하면 수령님의 대외적 권위가 심히 훼손됨으로 동무들은 초소를 철벽으로 지킴으로써 한 놈의 도주자도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김정일
계급투쟁의 현장
정치범수용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느냐”며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 보위원들이나 경비대원들도 같은 사람들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정치범들을 다루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대원으로 있다 탈출한 안명철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김일성, 김정일의 지시이기 때문이다. 안명철씨는 신병으로 처음 정치범수용소에 배치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13호 관리소는 당을 배반하고 수령을 배반한 악질적인 종파분자들과 그 자녀들이 있는 것만큼 신랄한 계급투쟁의 현장입니다. (중략) 이놈들은 악질들이기 때문에 동무들이 그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생각하면 그 놈들은 앞에서 웃음 짓고 뒤에서는 칼을 빼 드는 놈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중략) 동무들에게는 오직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의무와 도망치지 못하게 경계선을 철벽같이 지키며 한 놈이라도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무자비하게 사살할 의무밖에 없습니다.”
경비대의 신병들이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곧 익숙해진다고 한다. 수인(囚人)들이 수용소에 끌려와서 처음에는 엄청난 상황에 충격을 받지만 곧 살기 위해 수용소에 적응하는 것처럼.
정치범수용소가 오늘날의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은 ‘유일사상체계’의 등장과 김정일의 집권전후(1960년대 말 ~ 1974년 전후)의 시기이다. 그 이전에는 숫자도 적고 수인들에 대한 처우도 지금처럼 잔혹하지는 않았으며 수용소의 주목적도 사회와의 격리 목적이 가장 컸다. 그러나 수용소에 사람들이 대거 수용되고 몇 차례의 폭동과정을 거치며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로 수인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그 성격도 단순격리에서 사회의 긴장감 조성을 위한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수용소의 관리방법도 확립된다.
사람 설계도’만 남은 사람들
북한 당국이 수인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우선, 죽지 않을 정도의 극소량의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느 수용소에 있었는지에 따라 증언이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하루에 500g의 옥수수를 지급한다. 잘못을 하면 200g으로 줄어들기도 한다. 그런 식량을 먹고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이다.
▲ 정치범들은 작업장, 길 등 아무곳에서나 경비대나 보위원을 보게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굽히거나 허리를 90도 각도로 꺾어 인사를 하게 되어있다. 이를 위반했을 때는 무지비한 구타를 당하거나 구류장에 끌려간다.
함경북도 청진시 수성동 25호 수용소에서는 북한에서 가장 질좋은 자전거인 <갈매기> 자전거를 생산한다. 보위원들은 모두 갈매기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 정치범들은 보위원의 자녀들을 부를 때는 <선생님의 아들 선생님>이라고 해야 하며, 5살 이상의 어린이에게는 무조건 인사를 하게 되어있다.
남한 사람들은 옥수수 200~500g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굶주리며 고된 노동을 해본 적이 없으니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 옥수수 몇 백g이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는 수준의 식량이다. 그래서 수용소에 어릴 때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키가 150cm가 넘지 않는다. 그리고 몸에 가죽만이 남겨진 상태로 살아간다.
때문에 처음 수용소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그곳 사람들을 처음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에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형편없는 몰골과 기워 입은 옷, 그리고 무엇보다도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걷지 못해 ‘쉐쉐’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그 힘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모습에……. 정치범수용소 출신의 한 탈북자는 이것을 ‘사람 설계도만 남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들이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혹한 매질과 무엇보다도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게으름을 피운다고 찍히는 경우 식량이 3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수인들은 매질보다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더욱 무서워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힘을 다해가며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일반적인 식량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식량난 이전부터 최소한의 생명유지 식량만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제공하는 식량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먹지 못하게 한다.
텃밭을 경작하는 것은 고사하고 길에서의 풀이라든지 쥐, 야생동물, 산열매 등을 주워먹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인들은 항상 극도의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먹을 것은 닥치는 대로 먹게 된다. 만약 발각될 시에는 가혹한 매질과 구류장 행임에도 불구하고 몰래 풀이라도 한 움큼 입안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 정치범수용소에서는 고기를 주지 않기 때문에 쥐고기는 유일한 육식(肉食)이며, 그리고 수용소 안의 쥐는 거의 멸종상태라고 한다
▲ 안명철씨가 경비대 돈사(豚舍) 근무를 하던 때 본 수인들의 모습. 돼지여물을 몰래 훔쳐 먹어 돼지들이 먹지 못해 크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이러한 비인간적인 방침을 취하는 것은 극도의 굶주림으로 허약해지는 것이 관리에 쉽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워낙 가혹하게 수인들을 대하기 때문에 항상 수인들은 적개심을 품고 산다. 그러나 보위원이나 경비대에 대들려고 해도 워낙 허약하기 때문에 대들지도 못한다. 탈출을 하려고 해도 경비는 둘째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는 겹겹이 둘러싸인 산을 넘지 못한다.
또한 식량을 통해 수인들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수인들은 무엇보다 그나마 지급되는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이러한 생명의 본능을 이용하여 수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말을 잘 듣게 하는 것이다.
구류장 옆 탄약창 경비가 제일 고통스러웠다
수인들이 줄어드는 식량 못지 않게 무서워하는 것이 ‘구류장 행(行)’이다. 보위원에게 대들거나 식량을 훔치거나 욕을 하는 등 규율을 어긴 사람에게는 3개월의 구류장 행이 기다린다. 혁명화 구역의 구류장에서는 그나마 살아오는 사람이 있지만(물론 대부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완전통제구역의 구류장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 구류장에 갇힌 정치범들은 일주일에 30분씩 햇볕쪼이기를 하는데 이때 정치범들은 해골같은 몰골로 간신히 빠져 나온다. 구류장에 갇히면 남녀할 것 없이 머리를 삭발하고 하루 100g의 콩밥에 소금국을 주나 그것도 조금만 잘못하면 주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햇볕쪼이기 시간에 경비를 서는 계호원 몰래 닥치는 대로 풀을 뜯어 먹는다. 그러다 들키면 그대로 죽어야 한다.
혁명화 구역의 구류장은 매질은 기본이고 하루 4시간의 수면시간과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0.5평의 좁은 곳에서 무릎을 끊고 앉아 있어야 한다. 단순한 벌 같이 보이지만 3개월 동안 그렇게 있고 나면 다리가 썩어서 폐인이 되고 만다. 구류장은 햇볕이 들지 않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온몸의 이가 스멀거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매질이 가해지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다.
그리고 더욱 심한 수용소의 경우에는 아예 매질과 고문으로 일관한다. 안명철씨는 “완전통제구역의 구류장에서 살아 돌아온 예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죽을 때까지 매질과 폭력이 가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안명철씨는 구류장 옆의 탄약창 경비를 서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한다. 밤새 계속되는 매질과 비명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류장은 수용소 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다. 당연히 수인들은 구류장에 가지 않기 위해 극도로 몸조심을 하게 된다. 구류장 역시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여 통제를 쉽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개가 사람을 잡아 먹어도 “개 잘 키웠다”고 칭찬
수용소 내에서는 공개처형과 비밀처형이 이루어진다. 사안에 따라 처형방법이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인 규율 위반의 경우와 탈출하다 붙잡힌 경우에는 공개처형이 이루어지고 수인들에게 악영향을 줄 것 같은 경우에는 비밀처형이 이루어진다.
▲ 1984년에 13호 관리소 동포지구 운수직장 수리공인 27세의 정치범이 경비대 짚차를 타고 도주했다. 두만강에 차를 쳐박고 중국으로 넘어갔으나 일주일만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이관되었다. 악에 받친 관리소장은 김일성의 권위를 훼손시켰다고 쇠줄로 코를 꿰고 박뒤축에 대못을 박아 정치범들을 동원하여 돌로 때려 죽이게 했다.
공개처형의 경우에도 총살형과 교수형이 나뉘어져 있는데 예를 들어 탈출을 기도하여 관할 구역 내에서 잡히면 총살형에 처하고 관할 구역 밖에서 잡히면 교수형에 처하는 식이다. 그러나 워낙 죽음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공개처형은 주민들에게 별다른 공포감을 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비밀처형은 수용소 내의 비밀처형장에서 이루어지는 데, 한 밤중에 대상자의 집 앞에 트럭을 대고 조용히 실어 가는 형태이다. 때문에 간밤에 누구누구가 없어졌더라 하면 비밀처형장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비단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 구류장이나 공개처형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 특히 보위원이나 경비대원들의 폭력에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보위원이나 경비대원이 수인들을 죽여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임산부를 비밀처형 하는 모습
안명철씨의 경비대에서는 기르던 개가 어린 소녀들을 잡아먹어도 크게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개를 사납게 잘 키웠다고 칭찬을 받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그날 보위원의 기분이 어떤가에 따라서 단순한 매질로 끝나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죽기도 한다. 꼭 총으로 죽이진 않더라도 수인들의 몸이 워낙 허약하다 보니 단순한 매질에도 죽는 경우가 많다
▲ 1989년 5월, 13호 관리소에서 동포지구 19반 정치범 여학생(13살) 2명이 학교에 갔다오던 도중 경비대 민견한테 잡아먹혔다.
▲ 1986년에 북한에 <홍길동> <명령 027호>등 격술(擊術)영화가 나오자 경비대에서는 영화에서처럼 한다고 정치범들을 상대로 실전격술을 익혔고 경비대 군관들은 하전사들에게 정치범을 때릴 것을 부추겼다.
보위원이나 경비대는 수인들을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물론 그들도 밖으로 나가면 보통의 주민들이다) 자신들의 스트레스 해소 차원으로 매질을 하거나 죽이곤 한다. 안명철씨가 신병일 때 선배 경비대원들은 단순히 무술 연습차 수인들 10명을 세워놓고 무차별 가격을 했다고도 한다. 때문에 수인들은 항상 보위원들과 경비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가능하면 부딪치지 않으려고 한다.
내부 밀고자는 편한 곳으로 보내줘
북한 사회 전체가 이중 삼중의 감시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역시 정치범수용소의 그것보다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의 폭동 이후, 그리고 김정일의 집권과정에서 대거 정적들이 수용된 이후 수용소의 내부 감시 시스템은 더욱 정교해졌다. 대체적으로 3명 중의 1명은 보위원의 첩자라고 한다. 이들은 주로 수인들이 불만사항이 있는지를 염탐을 한다. 그래서 사소한 불평불만을 이야기하더라도 보위원에게 신고한다.
수용소 내에서 사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조직적인 행동이 일어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사소한 불평을 혼잣말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이 말이 보위원의 귀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구류장으로 끌려가고 만다.
밀고자들은 탄광이나 건설공사장에서 토끼 사육장 같은 곳으로 보내주는 등 조금 편한 일을 시켜준다.
이러한 내부 첩보 시스템은 담당 보위원들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조직적으로 운영이 된다. 이들 첩자들 중에는 보위원들의 신임을 얻고자 보위원들보다 더 악독하게 다른 수인들을 다루는 경우도 있다.
내부 첩보 시스템은 비단 수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위원들 내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보위원들은 수인들에게 조금의 동정심을 표할 수가 없다. 만약 수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의 동정을 표하다 발각되면 자신이 탄광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더 악랄한 보위원이 내려온다.
강철환씨가 수용소 내의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에게 자상한 담임교원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체되고 그 자리에는 용평 완전통제구역에서도 소문난 악질교원이 내려왔다고 한다.
모든 북한 주민들이 체제에 순응해도 수용소는 존재할 것
북한 당국이 정치범수용소를 만들고 유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우니 죽을 때까지 일이라도 시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수용소를 통해 계급투쟁의 현장을 존속시킴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 1970년대 초에 있었던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 12호 관리소 폭동사건. 정치범 5,000여명이 몰살당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범수용소와는 큰 차이가 있다. 구 소련 등에 존재했던 정치범수용소는 대개 사회와의 격리를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수용소는 노동력 착취와 사회의 긴장감 조성이라는 목적이 함께 있다. 즉, 모든 북한 주민들이 아무리 말을 잘 듣고 수령의 사상에 충실해도 공포통치를 위하여 정치범수용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범수용소의 인권 상황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만든 근본적인 이유다.
*데일리엔케이*
웃긴글은 아니지만...많은걸 느끼게해주는 ~~글이라~올렸으니 넘 모라하지.않으셨음.~~.
범죄자 인권보호해준다며~ 얼굴도 가려주는 한국 미국은 그냥 다 까버리던댕.~
~~ 무기라도 하나도입할라면.~반대하는 시민단체들...
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 침묵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