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에 의해 미드웨이해전에서 격침된 일본 항공모함 아까기]
1941년 12월7일 태평양전쟁의 시작은 제로센 의 날개밑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하와이 진주만의 태평양함대에 대한 일본의 기습공격은 성공했었다.
일본의 동향을 예의주시해오던 미국도 일본의 마지막 도라 도라 도라의 무전과 이른 아침시간에 발생했던 일본 소형잠수함의 침투를 간과하여 보고를 하지않았던 장교의 실수가 크나큰 대침략의 조짐을 놓쳤던것이다.
실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미함대는 불행중 다행으로 항공모함은 한대도 피해를 입지 않았었다.
마침 기동훈련으로 진주만에 정박하지 않았던 미군항공모함 들은 훗날 설욕전의 반격을 가할 기회를 가질수있었던것이다.
진주만 기습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단위 기습의 침략공격을 당한 소식에 미국은 경악했다.
더구나 백악관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가증스러운 일본의 공격에 곧 응전태세를 명령했다.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당시 미공군의 뛰어난 조종사이자 비행교관이었던 제임스 두리틀 대령의 작전으로 B-25 미첼 폭격기 편대의 1942년 4월18일 토오쿄오에 대한 폭격의 응징은 폭격규모는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일본인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놀라 발칵뒤집어진 일본은 차후 미군폭격기의 일본본토 폭격의 기지가 될수있는 미드웨이 군도점령을 나서게된다.
그러나 미군 해군정보부에는 로슈코프 정보부장이라는 명민한 작전참모가 있었다.
이자는 일본해군의 암호를 도청하던중 일본의 미드웨이 침공의 확실성을 다시한번 확인하기위하여 미끼를 던졌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부족하다는 거짓정보를 무선으로 날렸다.
이것을 포착한 일본군 무전 탐지병은 곧이곧대로 일본군 상부에 보고했다.
로슈코프 의 낚싯밥은 보기좋게 먹혀들어가서 미드웨이 의 미군은 일본군의 총공세를 대비하게 되었던것이다.
로슈코프 이자는 진주만의 침공도 예언한바 있었던 해군 정보부의 아주 명민한 우수한 두뇌였던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일본연합 함대는1942년 6월4일 나구모 사령관에 의해 4척의 항공모함을 동원한 선단에 의하여 병력이 거의 없는 미드웨이 군도를 공격했다.
나구모 제독은 미군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주변에 있는것을 몰랐고 미군본진의 소재를 몰랐던 일본군은 헛수고의 폭격만 했었던 것이었다.
미드웨이 폭격을 나간 전투기들은 다시 항공모함으로 귀환하였다.
또한 일본 항모 아까기의 함상에서는 2차폭격을 대비하고 있던 제로센 기의 장착어뢰를 350kg 의 투하용 폭탄으로 교체하라는 명령으로 교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군 스트로베리 정찰기는 미해군의 운명이 걸린 일본 항모대열의 위치를 찾느라 혈안이되어 넓은 미드웨이 수역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찰기 보다 먼저 일본 함대를 발견했던 것은 미군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했던 맥클라스키 중령의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 편대였다.
미군 잠수함과 교전을 벌이던 일본 구축함 아라시를 발견하고 잠수함을 놓친 아라시는 연합함대로 돌아가고 있었던것이다.
일본구축함을 따라 4000 미터 고도에서 비행하던 이들편대는 얼마후 일본 항공모함선단을 발견했다.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 편대는 먹이를 발견한듯 바로 눈앞에 놓인 거대한 4대의 항공모함를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
돈트리스 폭격기 편대의 1000파운드의 폭탄의 다발 공격에 일격을 당한 일본군 항공모함 아까기. 카가.소류는 거의 5분만에 태평양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함상에서 폭탄교체 작업을하던 일본항모는 미군의 폭격에 연쇄폭발을 일으켜 단시간에 침몰하게 되었다.
일본 항공모함 히류의 함재기들은 출격한후 미항모 요크타운을 대파시켜 6월6일 일본잠수함 [이168]호 의 어뢰에 격침 당하는결과를 가져오게 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항모 히류는 대파되어 3척의 일본항모가 격침된지 하루가 지난후 일본잠수함의 어뢰로 자침시켜야 했던것이다.
미드웨이 에서 벌였던 이 해전은 앞으로 도래될 태평양해전의 중요한 분깃점을 갈랐다.
일본는 연합함대의 주축이었던 귀중한 항공모함 4척을 잃었고 무었보다도 진주만 기습에도 참가했었던 베테랑 조종사들을 포함한 3500여명의 인력과 300대전투기를 함께 손실로 잃고 제공권을 상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이해전을 승리로 이끈 성과 뿐만 아니라 일본을 패퇴시킬 귀중한 시간을 벌었던것이다.
이후 가속적인 미군의 공격은 태평양전선의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일본은 점점 본토 로의 수세적 후퇴를 해야되었다.
이 태평양전쟁의 분깃점에 결과적인 역사의 일탄을 던진 항공기는 다름아닌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 였던것이다.
이 돈트리스 급강하폭격기의 역할은 대단해서 과달카날전투의 솔로몬해전에서도 일본항모 류조를 격침시켰다.
산타크루즈 제도 전투에서는 일본항공모함 쇼오카쿠와 경항모 즈이 중순양함 치쿠마를 대파시켰고 1942년11월의 전투에서는 일본순양함 기누가사 와 9척의 수송선을 침몰시켰다.
돈트레스 급강하 폭격기가 격침시킨 일본선박의 총량은 30만톤에 달했고 항모와 함께 가라앉힌 비행기 댓수는140 여대 였다.
또한 2차대전 종전까지 격추된 돈트레스 급강하폭격기의 댓수는100여대 정도였다.
이는 태평양 전쟁 전기간에 사용된 미군항공기 종류중 제일 낮은수의 격추된 숫자였다.
1940년대 중반기부터 미해군에 배치되기시작한 돈트리스 폭격기는 종전까지 5396대가 제작되었다.
돈트레스 급강하폭격기의 한가지 아이러니는 독일군의 융커스급강하 폭격기에 비해 미공군의 편제에 없었던 급강하 폭격기는 나중에 육군의 요청으로 미 병기국에서 육군에도 보급시킨다.
이 항공기는A-24기로 명명되었는데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기종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는 미군의 대형 전략폭격기 B-17과 P-51 같은 뛰어난 성능의 후발전투기의 역할에 소형 급강하폭격기는 해군외에는 쓰임새가 불필요 했었기 때문이었다.
돈트레스 급강하폭격기의 특징은 480m~600m에서 급강하 공격에 들어가는데 조종석에는 정밀 조준기가 부착되어있으며 항공기의 날개뒷면에는 급강하시 안정적인 비행을 도와주는 구멍이 뚫려있는 유공 후라프가 부착되어있는점이다.
미국해군의 귀중한 병기였던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는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틀을 마련해준 역사적인 급강하폭격기였던것이다
자료제공 : 2차대천 사진자료집 중에서 (태평양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