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 이야기 (6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05 20: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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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기...1편

 

1919년, 해병 조종사인 샌더슨(Lowson. H.M.Sanderson)중위가

아이티 섬에서 급강하 폭격 시범을 최초로 선보였다.

여태까지의 폭탄투하는 모두 평범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었으나 해병대 조종사들은

꾸준한 급강하 폭격 훈련을 통해 상공에서 70도 각도로 내려꽂히며 폭탄을 투하하면 

목표물을 더 정확하게 강타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급강하 폭격은 1928년에는 정식으로 해군 교리에 적용된다.

 

육군 항공대도 폭격 조준기를 사용하면 어떠한 높이에서도  지상의 목표물을

맞힐 수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하여 윌리엄 빌리 미첼 장군은 1921년에 노획한

독일군 함선에 폭격을 가해 명중시킨다.

물론 이것은 급강하가아닌 통상적인 폭탄 투하였다.

해군은  일반적인 투하가아닌 급강하 투하가 해상에서

움직이는 함선에 대한 공격에 효과적이라 판단한다.

또한 어뢰를 사용한 뇌격기가 여기에 가세하면 더 효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을하게된다.


 

1930년 이후 해군은 신형 폭격기 개발에 나서면서 수색 폭탄기(SB)라는 명칭을 붙인다.

복엽기체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속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별로 신통치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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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사의 SBC-4헬다이버. 항모 엔터프라이즈 VF-6소속기(1940년)
           SBC시리즈는 미 해군 복엽 항공기의 마지막 기체가 된다.

급강하 폭격기는 상공에서 내려꽂히는 동안 속력을 줄여주는 효과적인

브레이크 장치와  목표물을 조준한 뒤 폭탄을 투하하는 폭탄 제어장치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고안된 구멍이 숭숭뚫린 에어 브레이크는

폭격기의 진동과 스트레스를 줄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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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트레스의 에어 브레이크 플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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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급강하 폭격기 SBD 던트레스(DAUNTLESS)

 

노드롭 사가 더글러스 사의 설계를 바탕으로 하청을받아 생산한 함상 급강하 폭격기인

BT-1을 해군에 공급하고난 후 더글러스 사는 XBT-1에이어 XBT-2를 개발해낸다.

그러나 해군의 기체 요구 사항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게되자 다시 새롭게 설

계에 들어가던 도중 노드롭 사가 여기에서 발을빼 버리자 이 기체의 명칭을

XSBD로 바꾸게된다. 하지만 그 설계자인 에드 헤인맨은  계속 개발에 참여하게되어

그 원형기의 뿌리는 유지되지만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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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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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2

 

당시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함상 폭격기에대한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그 효율성을 간파하여 오랜 기간동안 함상 폭격기 보유를위한 노력을 접지않았고, 

그 결과로 SBD-1이 1939년 2월에 기체 테스트를 거친 후 마침내

해병대에서 먼저 도입이 결정되어진다.


1939년 4월부터 최초 양산형 기체인 해병대용 SBD-1과 해군용 기체인SBD-2의

생산을 개시하여 1940년말에 해병대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간다

(해군은 87대, 해병대는 57대를 발주했다).

이 기체들은 그 특유의 구멍이 뚫린 주익의 기체 진동 방지용 에어브레이크와 더불어

뛰어난 성능을 두루갖춰 운용부대에서는 무척 인기가 높았다.


1000 마력 라이트 XR-1820-32엔진을 탑재하고 기수에 7.7mm 기관총 2정, 

후방석에 7.7mm 기관총을 장착한 SBD-2는 해군에 납품되어 1941년말까지

항모 엔터프라이즈에 VB-6와 VS-6대대를 편성하였고

항모 렉싱턴에 VB-2대대를 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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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D-1 던트레스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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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D-2

1000마력 라이트 R-1820-52엔진을 탑재한 SBD-3은 보조연료탱크와

방탄 장갑을 강화하는한편 방탄 유리도 채용한다.

기관총이 50구경(12.7mm)과 30구경(7.62mm)로 강화되고

전기계통은 6V에서 12V로 개선되어 1941년 3월부터 실전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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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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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엔터프라이즈로 귀환한 SBD-3. 1942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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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엔터프라이즈 갑판에서 SBD-3에 1000파운드 GP폭탄을 장착하고있다

독일이 전격전에서  급강하 폭격기를 사용하여 지상의 목표물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자 미국도 유사한 항공기를 찾게된다.

그리하여 1941년 여름에 SBD-3기체 168대를 육군용인 A-24 밴쉬(BANSHEE)로

개조하도록 더글러스 사에 의뢰하게된다.

A-24는 SBD-3A형을 베이스로 개조하였는데 그리 큰 개조없이 원형기와 흡사했다.

A-24는 공군 폭격기들과 1941년 11월에 필리핀 전선의 작전에 참가하였지만

전과가 미미하여 그 성능은 미 공군이나 육군 모두에게 만족시켜주지를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BD-4를 베이스로한(SBD-4A) A-24A형을 계속 공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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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4 밴쉬. 뒷 바퀴의 크기와 지지대가 변경되고 어레스팅 후크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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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D-3 후방 총좌

SBD-4는 전기 시스템이 12V에서 24V로 바뀌었고 나중에

수색항공기인 SBD-4P를 생산한다. 4형은 모두 1364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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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딩기어와 어레스팅 후크를 내리고 착함을 시도하는 전투, 공격기 혼성부대의 SBD-4

 

 

 

SBD-5형은 가장많이 생산된 형으로서 총 2409대가 생산된다.

1200마력의 R-1820-60엔진을 탑재하여 시속 405km를 기록한다.

더글러스 사의 새 공장이 세워진 오클라호마에서 생산되었으며

이 중 소 수는 1945년 1월 영국해군에 공여되며 멕시코에도 소 수가 공급되었다.

 

SBD-5A를 베이스로한 A-24B형이 615대가 제작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보내져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지만 전쟁의 마지막까지 운용했다.

이리하여 SBD-5형은 해군용과 육군용인 A-24B를 합하여 3025대가 생산되었다.

 

1948년에 육군은 전쟁 중 살아남은 A24A를 F-24A로 명명하여 수 년더 사용하였으며

이중 한 대를 무인 조종 항공기로 개조하여 QF-24A로 명명한다.

A-24B형도 F-24B로 명명되어 사용하였으며 한 대를

무인 조종 항공기로 개조하여 DF-24B로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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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요크타운 VB-5소속 SBD-5
                      뒤쪽의 SBD-5의 하부에 장착된 YAGI 레이더 안테나가 보인다   120998432437601.jpg
SBD-5는 조준 망원경이 신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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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항공대 기체인 A-24B

최종버전인 SBD-6는 1350마력 R-1820-66엔진을 탑재하고

보조연료 탱크를 채용하는등 많은 부분의 개수가 이루어졌으며

총 450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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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D-6(1944년) 동체 하부에 YAGI 레이더 안테나가 선명히보인다

던트레스는 태평양 전쟁초기에 엄청난 톤 수의 일본 함선을 바다밑으로 가라앉힌 

주인공이며 전쟁의 끝까지 전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나게되는 함상 폭격기인 헬 다이버에게 최일선을 물려주고

쓸쓸히 경로당으로 밀려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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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급강하 폭격기 SB2C HELL DIVER

커티스 사는 SBD 던트레스를 보충할 급강하 폭격기 개발을 의뢰받는다.

미국은 아직 전쟁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을 위한 재 무장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었다. 커티스 사의 헬다이버 개발은 당시 P-40전투기를 제작하느라 공

장 내 작업공간이 부족하여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한 창고에서 시작되었다.

 

1939년. 원형인 XSB2C-1은 항모내의 좁은공간을 고려하여 날개를 접을 수 있도록

설계 되었으며 1700마력 라이트 R-2600-8엔진을 탑재하도록했다.

또한 폭탄의 장착이 용이하게 기체의 높이가 충분히 올려졌다.

캐노피는 슬라이더 방식으로 열고닫기가 편리하게 설계되었다.

그러나 풍동실험등을 통해 날개에 문제가 있으며 엔진과 프로펠러도

결함이 있음이 밝혀진다.

나중에는 착함 시의 저속 조절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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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풍동실험에 들어간 XSB2C-1 목업

1941년 11월 29일에 대규모의 발주계약을 하게되었으며 첫 번 째 시제기는

1941년 12월 18일에 생산되어 12월 21일 커티스 사의 시험비행사가 조종하여

하늘로 날아올랐으나 비행도중 우현 날개와 뒷 날개가 파괴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다행히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하여 무사했다. 

 

첫 번 째 폭격기였던 SBC를 제작했던 커티스 사가 새로운 폭격기개발에

성공하리라는것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었다.

헬다이버 생산을 위한 새로운 공장이 세워지고,

기술자 및 하청업자들이 선정되었으며 재료 또한 이미 들여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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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조립공장

커티스 사는 P-40 전투기를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또한 AT-9 연습기와 C-46 수송기도 생산 공급하고 있었으며 순양함과 같이

케터펄트를 설치한 함정들에서 쓰일 수상기인 SO3C 시걸을 대체할 기종도

개발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원형기 실패의 쓴잔을 마셨던 커티스 사는 다시 SB2C 개발에 도전하게된다.

그러다 진주만이 공격당하자 해군은 헬다이버 개발이 시급해졌고 첫 번 째 비행편대의

실험이 가급적 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위해 생산의 최우선적 순위로 돌려진다.

다급해진 해군은 1942년 봄에 커티스 사에 무려 3000대의 추가 발주를낸다.

그러자 커티스 사는 캐나다 온타리오의 자동차, 주물공장에서 1000대를 생산하도록

하청을 주게된다. 이는 SBW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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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SB2C-1. 1941년 12월 21일 시험비행에서 추락한다 

 

해군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위한 대대적인 설계의 변경으로 동체가 더 길어지는등

많은 변화는 최초의 원형기보다 40% 더 증가된 무게를 가져왔다.

무려 889군데의 개수가 행해져 나중에 생산된 그 첫 번 째 헬다이버는

원형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된다.

 

시제기가 추락하고나자 수직 꼬리 날개의 확대 개수에 긴급히 착수했으나

해군에 납품되기까지 그 어떤 철저한 검증 시험비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군은 다시 기관총을 좌우주익에 설치하도록 요구했으며

무게의 증가는 항공기의 성능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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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익 무장 50구경 기관총2                   20mm 기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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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2C-1 헬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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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9월 29일. XSB2C-2 수상기.제작에 실패하여 단 1대 뿐이었다

 

성능문제로 납품이 지연되다가 1942년 6월 그 첫 번째기가 생산되어 11월에

항모 테스트를 거치고 12월부터 VS-9대대에 납품되기 시작하나

해군 조종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든든한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던트레스를 더 선호했다.

 

헬다이버는 테스트 시작 때부터 특히 비행 안정성에 있어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았다.

헬다이버는 처음부터 항모 착함시에 엔진 저속 조절이 불량하고

착함 제동장치 불량으로 착함에 실패하여 기체가 손상되는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여 그성능을 의심받았다.

헬다이버는 선천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사실상 미해군의 항공기 중 실패작에 속했다.

해군은 초기의 심각한 결함들을 완전히 보완하도록 요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쫓겨있던 관계로 미미한 조치만 취했던 것이다.

그동안 꼬리날개를 극대화하는 재설계에 들어가고 구조를 강화하는등으로 조금씩

그 성능이 개선되어 초당 상승속도 12.1m, 최대속도가 519km에까지

이르는 변화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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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17일 항모 벙커힐에 착함하던 SB2C-1 헬다이버가 착함에 실패하는 연속사진 

독일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의 활약은 미군으로 하여금 급강하 폭격기를 도입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육군 항공대 확장 프로그램에 급강하 폭격기 도입을 포함시키게되고

SBD던트레스를 도입한 바있었다.

그리고 다시 해군에게서 100대의  SB2C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여 해군이 발주하는

기체 량에 100대의 A-25A를 포함하는 계약을 1940년 12월 31일에 체결한다.

거기에다 이듬해 봄에는 무려 3000대에 달하는 A-25A의 발주를 계약한다.

 

엄청난 생산량을 걱정한 해군은 커티스 사에게 A-25A를 전담하여

만드는 공장을 지정하라고 요구하게된다.

이에  커티스 사는 세인트루이스 공장에서 A-25A를 생산하도록 지정했다.

A-25A는 SB2C-1기체에서 어레스팅 후크를 제거하고 무전기와 동체 하면에

장갑을 추가했다. 해군과 육군은 두 기종의 표준화를 위해 큰 개조를 하지 않았다.

첫 번 째 A-25A가 해군의 SB2C-1이 첫 생산된지 3개월이

지난 1942년 9월 29일에 처음으로 비행하게된다.

시험 비행을하며 나머지 기체의 납품을 기다렸지만

1943년 3월이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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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5A 생산라인

해군과 육군은 기체의 표준화가 불가능하다 여겨 두개의 사업을 완전 분리하려했다.

이 때문에 하청업체의 혼란을 불러오고 A-25A의 생산은 더욱 느려지게된다.

이즈음, 육군은 자신들은 이제 더 이상의 급강하 폭격기가 필요없음을 발견하게된다.

조종사들 대부분이 급강하 폭격 기술과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거기에다 대공포화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당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육군은 발주를 취소하고 이미 생산된 기체들을 일선에서 빼내어

후방의 다른 용도로 쓰려했다.

그리하여 A-25A를 RA-25A로 명칭을 바꾸어 버리는데

이것은 더이상 이 기체들을 공격용으로 쓰지않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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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트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헬다이버를 베이스로한 미 육군용 A-25A SHRIKE.
A-25A는 총 900대가 생산되었다

이보다 앞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A-69라는 명칭으로

150대의 SB2C 발주계획을 갖고 1대를 먼저받아 시험비행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급강하 폭격기가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려

10대의 A-69를 도입하고 나머지는 취소해 버린다.

 

함상 발진기인 SB2C와는 달리 육상 발진기인 A-25A와 A-69사업이 실패하자

육군 항공대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용 생산분인 총 410대의 기체를

육상 발진 급강하 폭격기로 사용하기위해 해병대에게 공급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이 기체들을 델타항공등의 타회사에 의뢰해서 SB2C-1으로서

1944년 말까지 해병대용 기체로 공급하여 VMSB, VMTB 대대들이 편성되고

훈련대대들도 아울러 편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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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공군용 A-25(A-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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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다이버 에어브레이크 플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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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사진으로보는 헬다이버 에어브레이크 플랩의 디테일

1112대가 생산된 SB2C-3은 구조의 변화와 공기 역학적 면에서 매우 발전된 버전이었다.

1900마력의 R-2600-20 엔진을 탑재하고 3엽의 프로펠러가 4엽으로 바뀌었으며,

2045대가 생산된 SB2C-4는 1000파운드의 폭탄을 장착하고,

1944년 5월 18일에 해군이 발표한 '모든 해군기에서 로켓을 발사할 수 있게하겠다'는

방침에 따라 주익아래에 8.5인치 로켓 런처가 장착되며 동체 하면에 레이더를 장

착한 조기 경계형인SB2C-4E형이 제작된다.

SB2C-4는 최고속도 475km, 순항속도 254km이다.

1945년 2월까지 증가된 연료 적재량을 가진 SB2C-5형이 총 970대가 생산되고

최종형인 SB2C-6형은 R-2800-28 엔진을 탑재하고 동체가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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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디자인과 성능이 변화 발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항공기 공급 과정에도 문제가있어

시간을 허비했다. 캐나다에서 생산된 기체가 미국에 도착하여 해군의

시험 비행을 위해 전달되었다가 그 개수를 위해 다시

콜럼비아의 커티스 공장으로 보내져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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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2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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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2C-5

1944년들어 새롭게 태어난 F6F헬캣과 보우트 사의 F4U 코르세어가

SB2C 헬다이버와 거의 비슷한 양의 폭탄을 탑재하고 더 우수한 성능을발휘했다.

그 항공기들은 폭탄을 투하하고나서 대공포나 적 항공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있어서도 헬다이버보다 우수한 기량을 보였다.

 

헬다이버는 탄생에서 부터 그 끝까지 수 천가지의 개수를 거듭하며 일생을 보내야했다.

헬다이버는 전함 야마또와 그 자매함 무사시공격에 공헌했으며

라바울과 오끼나와등지에서 활약했다.

이것은 헬다이버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감투정신과 희생을

무릎쓴 해군 조종사들이 일구어낸 승리였던것이다.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양산에 들어간 SB2C는 총7140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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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SB2C 헬다이버 급강하 폭격기

7부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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