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은 4월30일에 함락당했던 도미니크 기지와 엘리앙1 기지를 탈환하기위해
치열한 포격전과 백병전을 벌여야했다. 도미니크 기지의 2개거점과 엘리앙의 1개거점을
확보했으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오는 베트민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많은 피해를 당하고 다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은 활주로를 장악하기위해 활주로가 걸린 후귀에트 북부지역을 집중 공격했다.
여기를 빼앗기면 후귀에트와 클로딘 사이에 설치된 지휘소가 위협받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끈질기게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인해 점점
뒤로 밀려나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거기다 남쪽의 이자벨 기지는 중앙과 완전히
단절되어 고립된 상태에 놓여졌다.
4월2일 하노이에서는 디엔비엔 푸에 투입될 경 포병을 비롯한 증원병력을태운
수송기가 활주로를 이륙했다. 그들은 공중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채로 지상에
발을 디뎠고 곧 축축한 참호 속으로 기어들었다. 속출하는 부상병으로 가득찬
야전병원은 그야말로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야전병원은 더 많은 병력을
수용하기위해 참호로 연결되는 공간을 더 만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지하공동묘지처럼 보였다.
4월6일 지압 장군은 전술을 바꾸기로 결정 했다.
큰 성과없이 너무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기 때문 이었다.
많은 인명손실이 발생하는 전면적 공격대신 산발적 공격과 함께 프랑스군의
목을 조이기로 결정하여 대규모 병력을 땅굴과 같은 참호를파는작업에 투입했다.
베트민은 여러갈래의 참호를통해 프랑스군 진지의 중앙을 향해 파고드는 동시에
공격도 병행하며 마치 질식시키듯 조금씩 밀고들어갔다. 프랑스 항공기가 날아와도
모두 참호 속에 있어서 별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산 위의 위장포대에서는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하며 프랑스군을 묶어 놓았다.
4월중순까지 몇개의 프랑스 공수부대 병력이 디엔비엔 푸에 더 증원 되었다.
제2외인공수대대는 후귀에트의 거점을 탈환하려다 궤멸적 피해를입었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제1외인공수대대로 합류해 들어갔다.
4월말이되어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 되었다.
진흙을 파서 만든 참호와 지하 엄폐호는 비에 쓸려나가거나 무너져 내렸다.
더 불행한 일은 짙게 드리운 안개때문에 항공기가 목표물을 식별하기 어려워진데다
매일 쏟아지는 폭우때문에 항공기가 제대로 출격을 할 수 없게된 것이었다.
출격하였어도 낮게 드리운 구름아래로 내려가야만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베트민의 대공포에 걸려들어 다량의 항공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비 때문에 네이팜 탄은 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작전을 지휘하는 보구엔 지압장군
쏟아지는 폭우 속을 뚫고 날아온 수송기에서 약700명의 병력이 더 디엔비엔 푸에
투입되었다. 카스트리에 대령은 하노이에 다시 병력의 증원을 요청했다.
요청을 받아들인 하노이 사령부는 5월2일부터 3일간에걸쳐 스스로 자원한
제1공수대대 소속병사 390명을 디엔비엔 푸로 공수했다.
강하한 병사들은 원하지 않았다면 모두 디엔비엔푸로 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간에 날아온 수송기 조종사들은 정확한 강하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병사들은 폭우 때문에 지상의 희미한 불빛 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채 강하해야만 했다.
지상에서는 베트민의 탐조등과 기관총탄이 이들을 맞이했다.
이로서 외부와 단절된 디엔비엔 푸에는 연인원 16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포위당한 채 부상당해 호송되었거나, 죽어있거나 또는 살아서 베트민과 싸워야했다.
야간에 C-47수송기에 오르는 프랑스 군
프랑스는 카스트리에를 장군으로 진급시켜 가능한한 더 오래 버티도록 독려했다.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파울루스에게 히틀러가 원수로 진급시킨 것과 흡사했다.
디엔비엔 푸는 프랑스 군의 스탈린그라드가 되어 있었다.
피와 빗물로 범벅이된 지하 야전병원에서는 부상 정도가 덜 심한 병사들이 중환자를
돌보았으며 심지어는 총을들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대포와 전차는 모조리 파괴되었고 식수는 물론 탄약도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공중에서의 보급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베트민은 총길이가
약 150km가 넘는 만큼의 참호를 완성하여 빠르게 포위망을 갉아먹어 오고 있었다.
지압 장군은 총 공세로 돌입해 마지막 결정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5월4일에는 소련제 다연장 로켓포가 프랑스군의 마지막 거점인 엘리앙을
향해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리며 날아와 모든걸 날려 보냈다.
남쪽의 고립된 이자벨 기지에도 포격이 가해져 철저히 파괴 되었다.
전투는 낮과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되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사용한 A-26인베이더(위) F4U-7코르세어
베트민 근거지를 향한 F8F 베어캣의 네이팜 탄 공격(1953년)
활주로에서 담배를 즐기고 있는모습(1954년)
하노이에서는 약50대의 수송기를 급파하여 보급품을 투하했으며 프랑스군은
약200톤을 회수하였지만 나머지는 베트민의 손에 들어갔다.
이것은 그나마 높은 회수율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5월6일 B-26,
F4U 코르세어와 헬 다이버등 150대에 달하는 미국제 항공기들을 출격시켜
대규모 공중 공격을 실시했다. 항공기의 공격이 끝나자 다시 베트민의 포사격이
시작되어 병사들의 머리 위로 포탄우박이 쏟아졌다.
밤이되자 베트민이 엘리앙의 거점들을 하나씩 파괴하며 전진해 들어왔다.
프랑스군은 정신력으로 버티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자벨 기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밤새도록 벌어졌다.
사방에 피아간의 시체가 나 뒹굴었다. 늦은밤에 상황을 알아보려
지휘본부를 찾았던 간호사 즈느비에브가 다시 부상병들을 돌보러 돌아가려하자
랑글레 대령은 그녀에게 지휘본부에 남아있도록 요청했다.
랑글레는 " 당신은 우리에게 행운을 주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진흙탕 속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는 병사들
날이밝아 5월7일 아침이되자 베트민은 엘리앙 기지에 마지막으로 결정적 타격을
주기위한 공격을 시작 하였다. 정오가 되기까지 베트민은 엘리앙 기지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베트민은 기지를향해 구름처럼 몰려들어 왔다.
지하에서는 카스트리에 대령이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하노이에 무전으로 알렸다.
영웅적 전투 끝에 백기를 올리는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며 계속 싸울 것을 명령하던
하노이 사령부에서는 백기를 올리지않는 조건으로 항복을 허가했다.
오후 5시, 장교들은 장비와 서류들을 모두 파기한 채 베트민이 들이닥치길 기다렸다.
마침내 지옥같은 디엔비엔 푸의 피비린내나는 전투는 끝이났다.
베트민은 지휘소 위에 금색 별이 새겨진 붉은 기를 휘날렸다.
그러나 디엔비엔 푸에서의 프랑스군의 저항이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남쪽 이자벨기지의 외인부대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포화 속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다.
탄약이 떨어지자 대부분의 병사들이 대검을 뽑아들고 적과 싸웠다.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남쪽방향의 포위망을 돌파하라 명령했다.
탄약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도 병사들은 끈질기게 저항 하였다.
극소수의 병사가 포위망을 돌파하여 숲을 통해 가까스로 라오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새벽 01시에 이르러 더 이상의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이로서 라오스 국경의 계곡에 걸쳐진 조그만 마을에서의 비참한 전투는 그 막을 내렸다.
5월8일 이날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국제회의가 열려 프랑스는 치욕스런 패배와
함께 인도차이나라는 식민지를 잃게된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북베트남이 양보하여 17도선 남북 분할과 2년 후 총선안을 받아들였으나
미국이 최종 평화합의서에 서명하지않은 결과로 인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진 채 20년 이상 더 피를 흘려야 했다.
디엔비엔 푸에서 베트민은 8000명이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3000명이상의 병사들을 잃었다.
전투가끝난 디엔비엔 푸. 차량과 곡사포가 파괴되어었고 무수히 많은 낙하산
캐노피가 널려있다.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한 베트민이 시민들의 환영속에 행진한다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이 트럭에타고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철수하는 프랑스군
디엔비엔 푸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라는 식민지를 잃게된다
많은 희생을 무릎쓰고 디엔비엔 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낸 베트민
베트민이 소지하고있는 총은 MAT49 기관단총으로서 프랑스군이 사용한 것이다.
구경 9밀리, 탄창 32발들이, 무게 3.6kg
10863명의 프랑스군 포로들은 디엔비엔 푸에서 약600Km,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에있는 투엔쾅 북쪽 고지대의
포로수용소까지 하루에 20에서 많게는 30km씩
오직 자신의 발로 걸어서 가야했다.
처음 한달동안은 항공기에 포착되는 것을 피하기위하여 일체의 불빛이
허용되지 않은 채 밤에만 이동 하였다. 높고 좁은 산비탈을 돌고돌아 밀림을
통과하여 홍강과 흑강을 건너서 최종 목적지인 수용소에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했다.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숲 속의 미끄러운 오솔길과 강을 건넜으며 낮에는 축축한
숲이나 진흙 위에서 잠을 자야했다. 하루에 공급되는 식량은 생쌀 한줌이나 한공기의
밥이 전부였고 강물을 마셨으며 숲에는 따 먹을 수 있는 과일마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와 의약품의 부족은 상처를 악화시켰고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쓰러져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최초에 이렇게 약 100명의 포로가 죽어 나갔다.
포로 중 절반정도가 부상자였으며 858명의 심각한 부상자만이 석방되어
적십자사의 감독아래 호송되었으나 나머지는 북쪽을 향한 강행군에 내몰렸다.
간호사 즈느비에브는 중환자들이 후송될 때까지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5월24일에 석방 되었다.
트럭을 이용하여 수용소로 가게된 부상자들은 트럭 한 대당 약30명 정도씩
짐짝처럼 태워졌다. 이들은 결코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치료 받지 못해 세균에감염된 상처부위에서 고름이나 피가 흐르면 트럭에서
추방당하여 결국 길바닥에서 죽게 되었다. 베트민은 시체를 길바닥에 그냥 방치한
채로 두었으며 상처가 심한 부상자 중 상당 수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가벼운 부상자나 부상당하지않은 병사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들은 행군 도중에 이질, 결핵,말라리아, 영양실조등의 온갖 질병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배고픔에 더하여 파리 모기와 빈대, 벼룩등 온갖 기생충의 공격에도 끊임없이
시달렸다. 일단의 포로들이 디엔비엔 푸로 물자를 전달하고 하노이까지 빈 차로
돌아가는 트럭행렬을 발견했다. 그들은 베트민에게 어차피 빈 트럭이니 타고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약2개월간에걸친 죽음의 행진 끝에 가까스로 여러군데로 분산되어진 수용소에
도착하였으나 대부분의 수용소가 밀림 속에 짚으로 지어진 오두막 이었다.
최소한의 편의시설 마저도 없었으며 철조망이나 감시탑도 없었으나 탈출은 불가능했다.
상처입고 굶주려 허약해진 몸으로 식량도없이 맹수가 우글거리는 밀림을 뚫고
탈출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용감하게도 탈출하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탈주자들은 마을사람들의 신고와 베트민 병사의 수색에의해 대부분이 다시 붙잡혀왔다.
그들은 포박된 채 심하게 구타당했다.
그러나 지옥과같은 고통스러운 강행군을 겪었던 포로들에게 있어서 비록 엉성한
곳이긴하나 이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포로들은 오두막 건설을위해 목재를 베어
운반하거나 쌀 운반등의 노동에 매일 동원 되었다. 음식은 한 줌의 밥을 하루에
두세번 배급 받았다. 가끔 씩은 야채와 고기도 제공되어 모든질병 중에서 최소한
영양실조만은 면하게 해주었다.
베트민은 온갖 교묘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세뇌교육을 통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려고했다. 노동 외에 자기비판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도록
강요받았으며 동료들을 비판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호치민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라고
포로들에게 권유했다. 그리고 반식민주의 선언에 서명하도록 강요 받았다.
매일매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정신교육을 받았으며 때로는 심한 모욕을 당했다.
식민지 출신 병사들에게는 반식민주의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치게 하였다.
읽어라고 던져주는 프랑스판 공산주의 신문을 받으면 포로들은 담뱃잎을 말아 몰래 피웠다.
열악하기는했어도 어느정도의 자율은 허용 해주었고
그래서 포로들은 주어진 자율을 나름대로 활용하였다.
베트민 포로와 교환으로 석방된 포로들.
1954년 7월20일 제네바 협정이 서명되었고 베트민포로와 프랑스군포로 상호교환을
시작으로 모든포로들은 석방될 수 있게 되었다.
석방되기 얼마전부터 갑자기 개인단량이 증가하여 질좋은 음식이 제공 되었다.
북베트남은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돈, 시계, 지갑, 수첩등 압류했던 거의 모든 개인 소지품을 포로들에게 되 돌려 주었다.
포로들은 돌려받은 돈을 지불하고 담배와 우유등을 구입하였다.
품질좋은 무명 옷과 반소매 셔츠를 비롯하여 손수건, 중국제 운동화와
베낭등이 포로들에게 지급 되었다.
밤에는 고급스런 식당에 초대받아 음식을 대접받았으며 춤 구경도 할 수 있었다.
투웬쾅 수용소를 출발하기에 앞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포로들은
중국과 소련기자들 앞에서 선전용 기념사진 촬영에 응해야만 했다.
그것도 흰색 제복을입고 친절히 웃는 북베트남 간호사와함께 나란히 선 채 로였다.
포로들은 3개월 남짓 억류된 끝에 1954년 9월 초 석방 되었다.
디엔비엔 푸에서 붙잡혔던 10863명의 포로 중에서
7573명이 죽고 3290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4부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