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JEEP)의 탄생 .... 2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19 22: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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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1/4톤 차량 수주를 따내기위해 밴텀 사는 1940년7월17일,

고도의 차량 개발 기술력을보유한 칼 프로브스트와 접촉하여

자신들을위해 일 해줄 것을 제안한다.

처음엔 이 부탁을 거절했던 프로브스트는 결국 밴텀 사와 일하게된다.

그는 제한된 자금, 긴박한 개발시한, 기술적 문제와 인적자원의 부족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다. 계약서에 명시된대로 하자면 늦어도 7월22일 월요일까지는

우선 설계도면이 만들어져야만했다. 그는 변속기와 액슬의 공급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려 업자들과 만났다. 프로브스트는 950kg의 차체무게를가진

스투드베이커 챔피언 카에 쓰여지는 액슬을 원했다.

그는 밥 루이스라는 기술자의 도움을받게되었으며, QMC가 원하는

기술적 핵심요구사항은 결국 무게일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그 어느 경쟁회사도 이러한 규격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프로브스트는 3250rpm의 컨티넨탈 Y-4112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하였고

밴텀 사의 기술자들은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그리하여 하루전날까지 도면을 완성시킨 프로브스트는

밴텀 사의 군납을 담당하는 챨스 페인을 만나러 볼티모어로 달려간다.

도면을 받아든 페인은 군이 요구했던 것 보다 250kg이나 더많은

무게(840kg)가 나갔기 때문에 걱정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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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탄생된 밴텀 사의 원형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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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량은 밴텀 사에서 납품한 70대의 차량 중 7번 째 생산된 것으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들어간다

 

1940년 7월22일, 캠프 홀라버드에서 허버트 레이워즈 중령이 주제한 회의가열렸다.

여기에서 액슬 공급업자의 능력을 걱정한 윌리 오버랜드사는

최종기한인 75일을 120일로 늘려달라는 부탁을하게된다.

75일을 초과하게되면 다음 날부터 하루 5달러의 벌금이 붙는 조항에도 불구하고

윌리 사가 120일까지 연장을 결심했던 까닭은 벌금을낸다해도

밴텀 사가 제시한 가격보다 최종적으로는 윌리 사의 가격이 더 낮다는 점 때문 이었다.

그러나 윌리 사는 8월5일까지도 군으로부터 연장 건에대한

그 어떠한 공식적인 통고도 받지 못하게된다.

 

 

그동안 승리를 확신한 밴텀 사는

4명의 기술자를 스카우트하여 즉시 차량 제작에 들어갔다.

프로브스트는 9월21일, 제작된 차량을 가지고

홀라버드까지 달리며 먼저 테스트해보는 기회를 가지게된다.

 

윌리 사와 포드 사는 9월27일부터 10월16일까지 실시될 5000km 주행 테스트에

참관자를 파견하여 테스트를 주의깊게 살펴보도록 지시하였다.

경쟁사들의 참관을 허락하고 심지어 똑같은 디자인을 제작해도

방관하고있던 QMC에 밴텀 사의 비난이 쏟아지자

QMC는 짚의 원형은 개인이아닌 국가재산이므로 그 누구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으며

또한 모방하여 똑 같이 디자인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제한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사실상 QMC는 밴텀 사가 맨 먼저 생산하기는 했으나 비싼 가격에다

차량 무게가 높고 대량생산에는 회사의 규모상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윌리와 포드에서 다른 사이즈의 차량이 나타나길 기대했던 것이다.

 

얼마후 로빈 대령은 밴텀 사의 차량이 너무높고 힘이 약하다고 판단하지만,

엔진 출력에대한  저 평가는  극소 수 차량에서 나타난 현상이었고

나머지에대한 평가는 매우 공정히 이루어져 20가지의 사소한 결함이 발견되었으나

대체로 만족스러웁다는 최종결과보고서가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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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텀 사의 62번째 생산차량(등록번호-2015384).

1940년에서 41년 겨울동안 캠프 홀라버드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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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로를 달리는 밴텀 사의 차량. 1941년 봄.

 

 

 

날짜를 초과한 1940년12월17일에 70대의 밴텀 사 제작 차량의 납품이 완료되었고,

그 전에 이미 육군은 테스트 후 총 1500대의 차량(등록번호 2018932 ~ 2020431)을

밴텀 사에 발주할 계획을하고있었다.

 

이 발주 계획차량들에게는 코드명 40 BRC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러나 이 발주계약은  중대한 고비를 맞게된다.

정부 고위층과 정당들이 1500대의 차량계약은 밴텀, 윌리, 포드 사에

공평히 나눠져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0월18일, QMC의 차량운송분과 위원회도 이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되자 밴텀 사는 권리를 되찾기위해 국무장관에게

의의를 제기하는등 격렬히 항의하게된다.

밴텀 사는 대량생산을 대비하여 다른 회사와 협력할 계획을 준비하였고,

군에서 요구한 모두 것들을 성실히 수행해왔다고 호소했다.

 

결국 참보본부와 핸리 스팀슨 국무장관은 토론끝에

발주량 모두를 밴텀 사에 주기로 결정하게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QMC가 강하게 반발하는등 진통을 겪어오다

11월14일, 최종 결정이 내려지게된다.

밴텀사는 고위층에 로비를 시도하여 측면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결국 1500대는 3개회사에 공평히 나눠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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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텀 사의 40 BRC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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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mm 기관총을 탑재한 40 BRC. 1941년 봄 캐롤라이나

 

 

이렇게해서 군에 차량을 납품하게된 윌리 사는 이미 그 며칠전인 11월11일부터 차량들을

시험하고 있었지만 포드 사는 그때까지도 아직 원형차량을 제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저력있는 자동차 제작사답게 포드는 1940년12월23일,

자신들의 차량인 피그미(Pygmy)라 불리우는  원형차량을 군에 납품하게된다.

이 두 회사의 차량들은 밴텀 사의 차량과 그 모양이 너무나도 흡사했다.

두 회사는 그동안 밴텀 사의 차량을 연구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이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군은 3차량을 각각 비교 테스트하였다.

포드 사의 차량은 조종성이 우수한 반면 엔진의 출력이 낮았으며,

밴텀 사 차량은 연비가 가장 좋았다.

그 중 윌리 사의 쿼드(Quad)는 튼튼했고 테스트 모두에서 대부분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은 쿼드였으나 한가지 결점은 무게였다.  

그동안 지나치게 낮은 중량을 요구했던 QMC가 그 제한을 980kg까지 완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쿼드는 이를 훨씬 상회하는 1099kg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3개 회사모두 공히 군에서 요구한 규격과 성능대로 제작하지 못하자

미군은 난감했다. 결국 중량을 너무 초과한 윌리 사의 쿼드를 1500대 생산에

그대로 끼워줘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결정하기위해 국무장관에게 의뢰하였는데

한대의 차량도 아쉬웠던 사실상 준 전시체제였기 때문에 납품이 허가되었다.

이리하여 윌리 사는 첫번 째 난관을 극복하여 발주에 끼일 수는 있었으나

장차 더 많은 발주가 있으리라 예상되자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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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피그미. 이 차량은 블리츠 부기(Blitz Buggy)라고도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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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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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 기관총이 설치된 40 BRC.

무기대여법에의거 짚을 제공받은 영국군은 공정부대와 사막부대에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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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제 6기갑사단에 배치된 40 BRC (위 그림의 정면모습)

 

 

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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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사의 윌리스 쿼드(Willys Qu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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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스 쿼드 194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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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스 쿼드 민간용 라이센스 생산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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