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기 ...F4U 코르세어 1편
F4U-1A형에이어 1B형이 생산되는데 이것은 미군기체가아닌
영국군이 발주한 F4U-1을 보우트 사에서 구분하기위해 붙인 명칭이었다.
영국은 이기체들에 영국군 제식명인MK를붙여 코르세어 MK-1으로 부른다.
영국은 70대의 MK-1을 먼저 도입하였는데 코르세어의 고향인 미국보다
오히려영국이먼저 항모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미국보다 크기가작은 항모를보유했던 영국은 작은격납갑판(천정이 낮았음)에서
효율적인 운용을위해 공여받는 코르세어의 주익 끝단을 21cm 가량짧게 만들도록하였다.
영국은 전쟁동안과 전후까지 70대의MK-1을 시작으로
869대의 코르세어 MK-2(F4U-1A, F4U1-D, F3A-1)와
96대의코르세어 MK-3(F3A-1),
977대의 코르세어MK-4(FG-1A, FG-1D)등
총 2012대의 코르세어를 도입하여 운용하였다.
영국은 애초에 발주했던 70대의 MK-1(F4U-1)에 더하여 미리인수하게된
25대의MK-2(F4U-1A)을 포함한 95대를 우선도입하고
1943년 6월부터 나머지 510대의 코르세어 MK-2(F4U-1A)를 점차로인수하게된다.
미국은 해병대가 먼저 코르세어를 장비하여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영
국은 미국에서 코르세어 비행교육을받은 해군 제 1835비행대대가
첫 번 째로 코르세어를 장비하게되었다.
영국항모 빅토리어스의 코르세어 MK-2(F4U-1D)는 1944년 4월에
독일거대전함 티피츠공격에 참가하였다.
공격에참가했던 1834, 1835비행대 조종사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많은 수의 폭탄을 명중시켰으나 격침시키지는 못했다
동체하부중앙에 175갤런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하고 1944년
티피츠 2차공격에 나서는 코르세어 MK-2
착함에 실패한 영국1830비행대대 기체(Q-147)인 코르세어의 연속사진.
항모 일러스트리어스(1945년 4월 13일). 주익과 동체후부의 국적마킹은 태평양전선의
미국기처럼 바모양을 추가한 마킹을따라야했다. 기존의 영국기 국적마킹이 일본기
마킹과 혼동할 수도 있어 오인사격을 막기위한 조처였다.
뉴질랜드공군은모두 419대의 코르세어 (F4U-1 231대, F4U-1A 129대, F4U-1D 59대)를
운용했다. 뉴질랜드는 태평양전쟁 중 에스피리투 산토의비행대외에 12개의 기지를
두었으며 이들은 주로 지원임무를 수행했다
버지니아의 해군항공센터에서의
자토(JATO:Jet Assist Take Off)테스트(1944년 9월 7일).
한 개의 JATO는 약 230마력의 힘을 제공했다.
자토는 캘리포니아 공대 폰 카르먼 교수팀이 개발한다.
1930년대부터 제트추진에 관심을 가졌던 그들은 연구에몰두하여 로켓추진체를
개발하게된다. 육군항공대를 비롯한 군관계자들은 짧은 활주로와 항모에서
무거운항공기를 날려보낼 수 있는 추진체를 원했다.
전쟁이 다가오자 테스트를 시작했고, 로켓은 완벽하게작동하여 비행기를 말 그대로
쏘아보냈던 것이다. 성공에힘입어 그들은 1942년 3월에 AEROJET 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1942년 6월에 군은 로켓추진모터를 발주하게되어 1943년말에
완벽한 자토를 개발해내게된다. 회사는 고체와 액체추진연료모두를 개발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민간항공기의 제트추진엔진개발과 미국의 우주개발에 크게 기여한다.
1944년. 항모 알타하머에서 JATO 테스트 중인 F4U-1A
F4U-1C
F4U-1C형은 M-2 20mm 캐논포 4문을 장비한 형이다. 포의 위력은 상당한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총장탄 수 924발로서 탄 수는 좀적은편이었다. 조종사들대부분은 표적에
좀더 조밀한 사격을 가할 수 있는 50구경을 선호하였으나 적은 장탄 수와 발사속도는
느리지만 강한파괴력을가진 캐논포를 좋아하는 조종사도있었다.
C형은 주익과 동체중앙하부의 파일런들이 강화되어 대지공격력을 강화시켰으며
1945년 4월까지 총 200대가 생산되었다. 이후에 파괴력이 중요시되자 20mm포를
장비하게되는 형은 F4U-4B, F4U-5, F4U-7, AU-1이있다
F4U-1C형후반부터 프레임이 없어진 일체형의 원피스 캐노피로바뀌며이
캐노피는 FG-1D, 모든 F4U-1D형에 적용된다. 프로펠러는 직경 13피트1인치를 장착한다.
================================================================================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촬스 린드버그
전쟁전, 대서양횡단의 영웅 좔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는 독일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의 초청을받아 독일공군을 시찰하고나서 큰 충격을받았다.
그는 독일공군이 전 유럽국가를 합친 것보다도 더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하게된다. 그는 어쩌면 전투기보다는 폭격기 신봉자였는지도모른다.
아들이 유괴당하여죽는 불행한 아버지였던 그는 언론과 사회에 회의를느껴 미국을떠나
유럽에있다 귀국하여 미국의 중립을 강력히 주장하다 FBI의조사도 받게된다.
그의 재능을아는 미 육군 항공 사령관 핸리 아놀드 장군이 린드버그를 예비역 대령으로서
임관시켜 방공에관한 연구를하게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최고위원회에서 중립을
주장하다 전쟁개입을 노려오던 루즈벨트대통령에의해 1941년 4월에
그 자리를 쫓겨나다시피 물러난다
그는막강한 독일공군에 여러개의 엔진을
탑재한 중 대형폭격기가없음을 보고는
미국은 이러한 폭격기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킬너 준장의 최고심의위원회에선 앞으로
미국은 적국의 침입에 더 이상 해군력과
해안 포에 의지해서는 안되며 중 장거리의
강력한 폭격기를 장비해야한는 주장이
나오게된다.
당시 생산 중이던 B-17은 폭탄 적재량이나 항속거리가 미흡하니 이보다 더 새로운
폭격기를 개발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공군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자 미국은 폭격기 개발에 본격적인시동을걸게된다.
린드버그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애국심에 다시 복직을 신청하지만
정치적으로 이미 찍혀있었던 그는 결국거절당하게된다.
모든 항공관련회사와 군대에서 그를 외면하였으나 그의 친구인 헨리 포드는
그를 중용하여 후에 B-24폭격기 제작에 관여했고 보우트 사의 민간 기술자문 역으로서 코
르세어의 제작에도 참가한다. 역시 하늘의 영웅이었던 린드버그의 항공전문지식은
비우호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존경하게만들었다.
린드버그는 태평양전쟁 중 해병대의 요청으로 코르세어의 폭격능력을 증대하기위해
기술적 조언을하며 해병대와함께 연구를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정부도,
정보기관조차도 모르는일이었다.
린드버그는 1944년 9월 3일경부터 코르세어의 양쪽 주익에 각각 1000파운드(450kg)의
폭탄과 동체하부중앙에 2000파운드(900kg)의 폭탄을 포함한 총 4000파운드의 폭탄을
적재하는 실험들을 실제전투들을 치르며 마샬제도에서실시하였다.
1944년 9월 8일에 2000파운드폭탄을 적재한 VMF-223해병비행대의 코르세어들은
라바울 폭격에나서는 B-25경폭격기 호위를맡아 출격하였다. 린드버그도 직접
코르세어를 조종하여 참가하였다. 결국 린드버그와 해병대는 코르세어의 4000파운드
폭장능력을 완성시키게되는 것이다.
코르세어와 린드버그(비행모쓴 사람)
해병대의 성공을 보게된 육군은 린드버그가 본토로 돌아가기전,
뉴기니의 제 475육군항공대에서 운용중인 록히드 P-38라이트닝의 기술적 자문을
구했는데 그는 아예 거기에서 직접 조종하여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특히 연료절약에관한 많은 기술적 도움을 제공하기도한다.
똑같은 양의 연료를 가지고 출격하였지만 린드버그는 항상 타 조종사들보다
더 많은 잔량의 연료를 남겨 귀환했던 것이다.
린드버그는 조종사들의 비행기술을 증진시켜줌과 아울러 함께 출격해 일본군과 싸웠다.
부대장이 린드버그 자신에게 만약 일본군에게 붙잡히면 틀림없이 처형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나 그는 계속전투에 참여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탓에
그 부대장이 징계를당하기도한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건너가 제트기 연구를
하게되는데 V-2로켓 공장 부근의 수용소에서 유태인 학살현장을 목격하고는
무척괴로워했다한다.
그는 아이젠하워에의해 1954년에 공군 장군으로서 명예가복권된다.
475 육군항공대의 토마스 멕과이어소령과 린드버그
=========================================================================
한편으로는 해군이 전쟁의 중반전을 넘어오면서 일본기에 많은 함선과 항모를 잃었던
경험때문에 함대 방공을 중시하여 보다많은 전투비행대들을 항모에 수용하게된다.
거기에다 공격 비행대의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 엄호를 전투기가 담당하다보니
결국 항모의 많은 부분을 전투기가차지하여 공격기체가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되자 모자라는 공격전력을메울 방편으로서 전투기의 폭장능력을
증대시켜 전투폭격기로서 활용하려하였고, 그결과로 헬캣과 코르세어의 폭탄적재능력을
강화시키게되는데 F4U-1D와 굿이어의 FG-1D가 그출발점이었다.
무거운 폭장을한 기체를 하늘로띄워올리려는 필요때문에 JATO도 대량발주하게된다.
이 기체들은 늦은감이 있지만 테일 휠을 좀더 길게개량하고 실속 시에 한쪽으로 기우는
결함을 수정했으며착함 시에 위로 튀어오르려는 현상을 바로잡아 100%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비로소 항모탑재운용 능력을 검증받게되었고 1944년 4월이후부터
속속항모에 배치되는 비행대에서 발진하여 전투에 투입되어지게된다.
2250마력의 힘을 제공하는 R-2800-8W워터인젝션 엔진을 탑재한 1-D형은
보우트와 굿이어 에서 총 3862대가 생산된다.
3개의 보조연료탱크를 적재하고 테스트비행하는 F4U-1D(1944년 10월 14일 캘리포니아)
F4U-1D가 항모 레인저에 착함하고 있는모습 (1944년 12월)
항모 헹콕의 비행갑판에 주기된 VBF-6소속 F4U1-D와 FG-1D. 일본본토공격당시(1945년)
주익내측에 두발의 11.75인치(29.8cm)tiny tim로켓과 8발의 5인치 HVAR로켓을
파일런에장착한 F4U1-D 코르세어. 이외에도 네이팜탄을 적재하여 운용했다.(1945년 1월)
오끼나와 공격에서 VMF-323소속 F4U-1D가 HVAR로켓을 발사하는 장면.
오끼나와 공격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클링먼 해병대위가 자신의 기총이 발사되지 않자
코르세어의 프로펠러로 가와사키 Ki-45의 날개를 잘라 버렸던 일이었다.
보우트사는 F4U-1D로 복좌형을 만드나 실험에 그친다.
코르세어를 사용한 항모비행갑판 디오라마의 한 장면.
타미야 1/48 F4U-1D 코르세어와 인형셑(니콜라스 위그먼)
정찰카메라탑재형 전투기 F4U-1P동체뒷편하부에 장착되는 K-21카메라(1944년 마샬제도)
VF-84소속 F4U-1P코르세어가
이오지마 (유황도)수색임무를위해 출격하는모습(1945년 2월 19일).
F4U-1P형은 공격결과를 확인하기위해 운용되었으며
항공기 생산공장에서 정식으로생산된 것이 아니라
미 해군과 해병대가 필요에의해 야전에서 자체 제작한 것이었다.
13부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