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붙자!!미 전함 워싱턴 대 일 전함 기리시마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28 15:31:22
댓글 3조회 2,834추천 3
121195545175747.jpg

전함(戰艦)은 포를 주요 무장으로 하는 전투함들 중에서 제일 큰

수상함이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함형(艦型)이 되었지만 그 거포로서 화려한 20세기 해전의 첫 페이지를 열은 것은 대한 해협에서 한판 벌린 일본과 러시아의 전함들이었다.


전함의 크기와 포의 위력을 중시하는 거함대포주의(巨艦大砲主義)는

일차 세계대전의 유트랜드 해전을 거치면서 거침없이 성장해

일본의 야마토(大和)나 무사시(武藏)같이 72,000톤을 자랑하는 커다란

슈퍼 대형함들을 출현시키기도 했다.

121195548941501.jpg

영독간의 최대 전함전 - 영국 함대의  항진 모습(유트랜드 해전)

그러나 이차 세계 대전으로 돌입하면서 시대는 항공력의 시대이고

여러 해전들에서 항공모함이 주역임을 명백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전함들은 이차 세계의 주요 해전에서 거의 조연이나 단역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유트랜드 해전처럼 피아 전함들이 주역이 되어 싸운 유명한
해전이 이차 세계 대전 때도 있었다.


대서양에서 영국 전함들이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를 몰아서 격침시킨
해전은 역사가 기록한 유명한 대구경의 대포를 가진 거함들은
격투였다.

121195557399673.jpg

포격하는 비스마르크 ,후방은 격침되는 영국 전함 후드
- 1941년 5월 24일.


태평양 전쟁에서도 미일 헤비급 전함들이 맞붙어서 일본 전함 한 척이 격침된 아주 드문 야간 해전이 있었다.

장소는 과달카날이 뻔히 보이는 거리의 근해였었고 때는 캄캄한
심야였다.

1942년 11월 15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미군 전함은 단 한차례의 일제 사격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 구축함은 당하기 전에 근처 캄캄한 어둠속에서
미군 전함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던 줄도 몰랐었다.

미군의 포술과 레이다가 기습 성공의 요소였다.


1942년 6월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공세를 일단 잠재운 미국은

1942년 8월 7일 일본이 진출한 최남단 과달카날 섬에서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과달카날 섬을 반쯤 빼앗은 미군들은 일본군들이 건설하던 비행장을

빼았아 여기에 해병대와 해군의 항공력을 집중시켰다.

헨더슨 비행장이다

121195560383071.jpg

헨더슨 비행장



과달카날이 미군 반격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일본은

계속 병력을 증파했지만 헨더슨 비행장의 항공력이 가로 막았었다.


헨더슨 비행장 항공력은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끊임 없는 대량 보급을 해야 하는 일본군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몇 번이나 전함이나 순양함이 야간에 과달카날 해안에 침투해서 포격을 했지만 헨더슨의 비행기들은 계속 일본군을 괴롭혔다.


1942년 11월 12일.

일본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는 과달카날의 일본군 대규모 증파와 헨더슨 비행장 분쇄를 목적으로 전함 두 척을
주력으로 대 공격 함대를 편성해서 과달카날에 파견한다. 

그러나 두 번의 야간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121195562442346.jpg

야마모토 이소로쿠

첫 번째 과달카날 일차 작전에서는 미군 함대 사령관 켈라한 소장과

스코트 소장을 전사시키고 미 순양함 두 척과 구축함 다섯척을 격침시켰지만 천황 히로히도가 제일 사랑하던 전함 히에이가 미 구축함 세척의 집요한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고 일본 기지 트럭 섬으로 철수하다가
미 항공 공격으로 격침되고 말았다. 

121195564520497.jpg

전함 히에이- 1911년 진수 몇차례의 대 개수. 관함식에 히로히도가
                     자주 사용했었다.


미군은 전날 12일과 13일에 벌어진 야간 해전에서 전술적으로

패배한 전투였으나 일본 함대 사령관 아베  히로아키(阿部  弘毅 )중장이 작전을 종료하고 철수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과달카날 지원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서로가 치고받던 치열한 야간해상 전투 끝에 미국은 단지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한 척만이 남아 있었지만 일본은 전함(기리시마) 한 척과 순양함 한 척, 그리고 구축함이 네 척이나 남아 있었으니 아베가 계속에서 작전을 밀어 붙였으면 일본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 했을 것이다.


일차 과달카날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도 야마모도 이소로쿠

(山本 五十六)원수는 과달카날에 증원군 파견과 과달카날 섬의
헨더슨 비행장의 포격을 단념하지 않았다.


격노한 그는 일차 과달카날 해전에서 소극적인 지휘로 일관해서 작전을

실패로 이끈 아베(阿部  弘毅) 중장을 그의 귀환 항해 중에 해임해 버리고 그 후임으로 곤도 노부다케 (權藤 信介) 중장을 임명했다.

야마모토의 아베에 대한 증오감은 결국 그가 군을 떠나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서 8,000명의 과달카날 증원 병력을 수송할 특별

수송 함대를 편성해서 사령관으로 미카와 규이치(三川   軍一)중장을
임명했다.


미카와 중장은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했던 42년 8월9,10일 과달카날과 사보섬 사이 해협에서 미군 순양함대를 기습해서 미 순양함 네 척을

격침시킨 기습함대의 지휘관이었다.

그 뒤 이 해협은 미 함들이많이 해저에 갈아 앉아 있다 해서

아이언 버텀(Iron Bottom- 철의 바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21195567182410.jpg
미카와 중장


곤도는 일차 과달카날 해전에서 살아남은 기리시마(霧島)를 주축으로

다시 과달카날 돌진 함대를 구성했다.

121195570429647.jpg
전함 기리시마(霧島)


그는 기리시마에 중순양함 아타고(愛宕)와 다카오(高雄) 그리고 경순양함 나가라(長良)에 구축함을 여섯 척을 더 모아서 과달카날 헨더슨 비행장 포격과 병력 수송선 호위를 작전 목표로 하는 함대를 편성해서 출동했다
121195572315445.jpg

곤도 중장


곤도는 제일 거함이었던 기리시마가 아닌 중순양함 아타고(愛宕)를
기함으로 삼고 그의 사령기를 걸었다.

121195575454468.jpg

곤도의 지휘함 중순양함 아타고


곤도 함대의 임무는 단순했다.

1942년 11월14일 과달카날 아이언 버텀 해협을 통하여 과달카날
섬으로 들어가 병력을 상륙시키고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한 뒤에 날이
새기 전에 신속하게 도피해 나오는 것이었다.

헨더슨 비행장의 야간 포격은 전에도 수차례 시도되었던 작전이었고

좌절도 있었지만 성공도 여러 번 있었다.

121195577451054.jpg

과달카날로 직행하는 곤도  함대- 중앙의 함이  전함 기리시마


특히 지난 10월 행했던 야간 포격으로 헨더슨 비행장의 활주로를
전파하고 미 해병대와 해군 항공기 절반을 파괴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미군들은 일차 과달카날 해전이 있기 전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일본
해군이 과달카날로 치고 들어오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미리 알고
있었다.


미군 남서태평양 지구 사령관 할제는 과달카날 해역에 해상 전력을
더 증파할 필요를 느꼈다.


미국 기동함대 총 사령관 할제(Halsey) 제독이 이들 일본군에게 내세워 대항시킬 전투함은 비교적 신형인 미 전함 와싱턴과 미 전함 사우스
다코다가 있었을 뿐이었다

121195580176172.jpg
전함 와싱턴

미 해군 전투 교리에 의하면 야간에 좁은 해협에 그런 대형 전함을

투입하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좁은 해역은 구축함이나 어뢰정들에게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더구나 전함은 그 거포를 마음껏 쓸 수있는 훤한 주간의 전투 무기이지

시야가 제한되는 야간의 전투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할제 제독은 미 해군 대학교 교리쯤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두 척의 전함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121195582154403.jpg

전함 사우스 다코다



두 전함을 지휘할 지휘관은 윌리엄 리 해군 소장으로서

그의 주특기는 포술이었고 또 자기 특기를 즐겼다.

그는 시간만 나면 기함 함장 그렌 데이비스 대령과

포술장 에드윈 후퍼 중령과 전투가 벌어지면 포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수학 계산을 되풀이 하며

많은 밤에 걸쳐 수없는 토의를 거듭했었다.

121195586723055.jpg

리 소장



와싱턴과 사우스 다코다는 미 해군의 뛰어난 신예함들이었다.
와싱턴이 1940년 사우스  다코다가 1942년 취역한 신형이었다.

총톤수가 35,000톤에 28노트로 달릴 수 있었고
SG 신형 레이다가 부착되어 있었다.

포는 각기 9문의 16인치 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우스 다코다는 기계적 고장이 잦았다.

더구나 그런 고장들은 중요한 순간에 발생해서 일을 망치곤 했다.

다른 배들과 충돌도 자주했다.

드문 사고가 이 함에만 자주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사우스 다코다는 ‘재수 없는 배‘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징크스가 있는 배였던 것이었다.


1942년 11월 12일.

할제는 리 소장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다.


두 전함은 대기하고 있었던 누메아 정박지를 떠나서 과달카날을
향하여 출동했다.

두 전함이 출동하던 그날 밤 과달카날의 아이언 버텀 해협에서

제 일차 과달카날 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적의 과달카날 해역 재돌입이 예상되었지만 미 함대는 일차

과달카날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어서 대응할 전력이 없었다.


할제는 자신의 수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투력인 두 전함에게 
구축함들과 함께 전속으로 과달카날로 계속 전속 항진하도록 재촉했다.


일차 해전이 벌어졌을 때 그 때 두 전함은 과달카날에서 300마일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두 전함을 호위하는 구축함들은 정박지 출발 전 이 부대 저 부대에서
차출한 왈크, 벤함,프레스톤,그리고 그윈이었다.

차출의 기준은 어느 구축함들이 연료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장거리 항해가 필요한 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함대는 전속력으로  북상했다.


이들 구축함들은 사전에 같이 작전은커녕 함대 훈련조차
해본 일도 없었다.

함형도 뒤죽박죽이었고 크기도 서로 달랐다.

왈크의 함장 토마스 프레이저 중령에게 이 급편 구축함 전대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출동 진형은 네 척의 구축함이 앞장서고 뒤를 두 척의 전함이
따르는 단종진(單縱陣)이었다.


전속으로 달린 함대는 11월 14일 늦은 밤에 목적지 아이언 버텀
해협에 도착했다.

121195589226763.jpg

아이언 버텀- 왼쪽 과달카날과 오른쪽 사보섬 사이.



미 함대는 111월 14일 22:55분 와싱턴과 사우스 다코다와 레이다를

통하여 일본 함대를 잡아냈다.

거리는18,000미터였다.


일본 함대는 접근하고 있던 미군 함대의 존재를 23시에 발견하였다.

항공 관측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일본 순양함급 이상은 수상기를

싣고 다녔다. 이들을 색적기(索敵機)라고 불렀다. 색적기는 야간에도

출격해서 정찰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아 밤에도 바다에

이는 배의 항적으로 적을 탐지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121195592617967.jpg

과달카날 해전도- 사보섬과 과달카날

과달카날 해역에 진입한 일본 함대의 사령관 곤도는 자기 휘하의

함대를 세 개의 더 작은 함대로 나누었다.

나타날지 모르는 미군 함대를 경계하기 위해서 였다.

한 부대는 하시모토 신타로 대좌가 지휘하는 경순향함 센다이와
시키나미, 우라나미 그룹은 사보 섬을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초계하게 하였고 (지도C), 다른 구축함 아야나미는 단신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돌게 했다.( 지도 B)


더해서 센다이 (川內) 그룹과 나가라 그룹의 나가라와 네 척의 구축함은

사보 섬 남쪽으로 진행해서 미 함대가 나타나면 격멸하도록 했다.

이 방향에서 미군 함대가 출현할 염려가 제일 컸다.


미군의 존재가 감지되고 30분이 지난 23 ;31분 곤도가 좌승(座乘)하고 있던 지휘함 아타고도 적함을 발견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 견시(見視)들은 전방에 나타난 두 척의 전함이
순양함들이라고 잘못 판단하였다.


그런 심야에, 그런 육지에 가까운 근해에 거대한 전함이
출현하리라고는 절대 없을 것이라는 일본 해군의 선입견이
그런 판단을 하게 만들었으리라고 본다.


곤도는 미국 주력함이 순양함 두 척뿐이라면 자기 휘하 함대들이
이를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다.


곤도는 센다이 그룹과 나가라 그룹과 네 척의 구축함들에게 미군
함대를 격파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사이 후진하던 전함 기리시마는 그대로 항진해서 과달카날의 헨더슨

비행장 쪽으로 스며들어가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결정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 전날 아베의 함대에서 전함 히에이가 적의 구축함들에게
두들겨 맞아서 결국 침몰에 이른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일차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일 양 해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렸었다.


일 전함 히에이는 미군들의 구축함들의 야간 육박 공격에

대파되었었다. 


그들 미 구축함들에는 해전의 혼란과 어둠을 이용 히에이를 불과 6미터의 간격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주포와 기관포를 총동원하여 함상에 막심한 피해를 주고 도주한 미 구축함 Laffey 같은 용감한 영웅도 나왔었다.

눈 아래서 올려 쏘는 Laffey에게 히에이는 고각이 높은 주포를 한 발도

쏘지 못했었다..


이 맹렬한 공격으로 히에이에 타고 있던 일본 함대 참모장이 전사하고 

함대 사령관 아베가 큰 부상을 입었다.

아베의 부상이 조기 철수를 지시해서 말썽이 된 소극적인 지휘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Laffey도 조금 뒤 일본 함들에게 격침되고 말았다.


곤도의 그런 염려에 더해서 기리시마가 함에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해서 14인치의  대공 고폭탄(三式 燃散彈)들을 대량 적재하고 있던

사실도 있었다.


이 탄들은 항공기뿐만 아니라 신관만 조정하면 대지 공격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탄들은 두껍게 장갑을 두른 적전함을 파괴는 불가했다.

그는 그래서 기리시마 함대를 미 함대와 대응 시키지 않기로 했다.


 23:00시

과달카날 해역에 진입해서 이미 일본함대로 레이다로 탐지해낸 미 함대는 (지도 A) 와싱턴의 레이다는 바로 정면 340도 방향 18,000야드 전방에서 횡으로 달리고 있는 목표물을 잡아냈다.

적함 센다이였다.


높은 견시 실에서 행크 세리 대위는 고 배율 망원경으로
적함 센다이를 확인했다. 

와싱턴의 함교 사령실에서 레이다 장교의 보고를 받은 리 제독은

필립 모리스 담배를 깊이 들어 마시고 함장 데이비스에게 명령했다.

“ 함장, 준비해! 놈들이 오고 있군 ”


이 순간에 센다이 그룹을 빼놓고는 미군 레이다에 나타난 다른

일본 함들을 없었다.


와싱턴의 포술장 월쉬는 함교의 제일 높은 사령실에 자리 잡고
포수들에게 16인치 포에 철갑탄을 장전케 명령했다.

포술 교범에 의하면 주포 장전은 30초 내에 하게 되어있지만 긴장한

포수들은14초 내에 해치웠다.


잠시 뒤 23시 17분,
와싱턴의 함교에서 포탑실로 명령이 내려갔다.

"준비된 포탑부터 사격 개시 !" 

함의 벨이 두 번 짧게 울리고 워싱턴의 16인치 주포들이 눈을

멀게 할 정도의 섬광과 포성을 뿌리며 포탄을 뱉어냈다

121195594982447.jpg

전함의 일제 포격- 붉은 원안에 날아가는 거탄들이 보인다.


거의 동시에 5인치 부포들이 구축함 시키시마를 향하여 불을 뿜었다.

이어서 전함 사우스 다코다도 시키시마를 향하여 일제 사격을 하였다


일본 함대에 준 피해는 미미했다.

경순양함 센다이는 약간의 손상을 입고  전술적 후퇴를 해야 했다.

항로를 북쪽으로 돌려서 연막을 뿌리며 이탈을 한 뒤 다시 공격을

위한 재편성에 들어갔다


23; 22분.

한편, 함대 전방에서 전함들을 선도하던 미 구축함들은

나가라 그룹의 아야나미와 나가라를 발견하였다.

구축함들은 포문을 열고 맹렬한 기세로 돌격하였다.

일본 구축함들도 주저없이 포 사격과 어뢰 발사로 응전했다.


미 구축함에는 전함들이 가지고 있는 레이다도 없었고

수병들은 일본 해군처럼 야간 해전 훈련을 받은 일도 없었고 더해서

이 응급 함대들은 전에 같이 훈련하며 호흡을 맞춘 기회도 없었다.


반면 야간 훈련을 풍부하게 받은 일본 함대의 기술이 이 순간에

빛을 발했다.

나가라와 구축함들은 정확한 포격을 가해서 미 구축함 월크와

프레스톤을 명중시켜 10분 뒤에 침몰 하게 만들었다.

많은 미 해군 승조원들이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다른 구축함 벤함은 그것의 함수가 일본 함이 발사한 대형 93식
어뢰에 맞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벤함은 비틀거리며 일본군의 화선에서 빠져 나와야 했다.

다른 구축함 그윈은 역시 기관실에 명중탄을 맞아 전투에서
이탈해야 했다.


23:48분.

리 제독은 두 구축함을 전투 해역에서 완전히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벤함은 침수가 계속되다가 다음날 침몰했다.

급조된 리 제독의 구축함 함대는 한 수 위인 일본 구축함들에게
어이없이 희생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적과의 첫 교전으로 두 척의
전함에 가해졌을 지도 몰랐을 적의 첫 기세를 막아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적 구축함들과 미 전함들과의 직접 조우로
과달카날의 전투가 다른 방행으로 추진되었을 지도 몰랐다.


후속하던 와싱턴과 사우스 다코다는 전위 구축함들이

섬멸 되다시피 한 해역으로 진입했다.

밤이라서 안보였지만 침몰 함정에서 떨어져 나온 부유물과 흘러나온

중유가 해면을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전방의 일본 구축함 아야나미를 발견한 워싱턴과 사우스 다코다는

즉시 5인치 부포(副砲)들을  발포했다.

두 전함으로부터 거탄을 세례를 뒤집어쓴 아야나미는

화염으로 휩싸였다.

잠시후 아야나미는 침몰 되었다.

121195597156195.jpg
인치 포- 구축함의 주포지만 전함의 부포다.


바로 이 운명의 시각, 와싱턴을 후속하며 뒤따르던

사우스 다코다에서 갑자기 이상이 발생했다.

그 고장 많고 사고 많았던 전함에 하필 그 순간에 전기 배선에

고장이 생겨 버렸다.

정비담당 부사관이 작은 고장을 수리하려고 회로 차단기를

닫았는데 이것은 정비 안전상 규칙 위반이었다.

그 뒤 전기만 넣으면 주회로 차단기는 계속 닫혔다.

함의 전기 정비 기술로는 수리 불능이었다.

레이다, 무선, 그리고 사격 통제 장치들이 침묵해버렸다.

그런 상태로 사우스 다코다는 와싱턴을 후속하며 곧 터질 해전의

결전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두 척의 전함은 사보 섬 서쪽 해안으로 23시 45분까지 진행하다가

좌측인 남쪽으로 변침했다.

아직 해역을 벗어나지 못한 대파 미국 미 구축함  두 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눈과 귀가 막히고 손발도 자유롭지 못한 사우스 다코다도 이 코스를

따르려 했는데 갑자기 대파 구축함 벤함이 목전에 나타나 급히 피하느라 와싱턴과는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이 방향 조정이 사우스 다코다를 불타고 있던 미 구축함들을

등에 지고 있는 실루엣 형태로 만들어 버려 일본 함대에게 뚜렷한
목표를 제공하게 되었다.


한편 후속하고 있던 일본 함대 사령관 곤도는 구축함 아야나미와
다른 함들로부터 미국 구축함대 격멸을 보고 받고 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기리시마등의 과달카날 포격 부대를 이끌고 그대로 항해를
계속했다.

이 결정이 결국 두 미군 전함과 일본 함대가 서로 마주보고
달려오는 형국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곤도의 주력부대는 갈팡질팡하는 사우스 다코다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일본 함대는 강력한 탐조등으로 사우스 다코다를 조명하고
포문을 열었다.

포탄과 어뢰가 일본 함대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121195599372149.jpg

전함의 16인치 주포


말했다시피 장님과 귀머거리 꼴이 되어서 공격력까지 잃은

사우스 다코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달카날 포격을 임무로 하던 기리시마까지 가세했다.


포격은 1943년 11월 15일 자정부터 개시 되었다.


적의 포격이 만드는 섬광을 향해 사우스 다코다도 수동으로 응전해서 기리시마에게 수발의 명중탄을 보내기도 했으나 자신은 무려 25발의
크고 작은 포탄들을 맞았다.


일본군의 집중 포화는 사우스 다코다의 함내 전화와 조금 남아 있던
포탑 조정 장치도 날려 버렸다. 더 해서 상갑판에 화재를 일으켰다.

참혹한 가격을 당한 사우스 다코다는 급히 함수를 돌려 적과의 접촉을 끊으려 했다.


도주하는 사우스 다코다의 뒤를 가공할 위력을 가진 일본 어뢰
여러 발이 뒤쫓았지만 요행이도 사우스 다코다는 명중되지 않았다.


이 피격으로 사우스 다코다 승조원 39명이 전사하고 59명이 부상했다.

사우스 다코다는 리 제독에게 보고도 없이 전장을 벗어났다.

하고 싶어도 무선기가 안되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함대의 견시들은 도주하는 사우스 다코다의 그림자를

계속 시야에 담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포격을 계속 중상을 입고 도주하던 사우스 다코다에
집중했다.

곤도의 함대는 사우스 다코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 워싱턴이
자신들 측면에서 9,000야드 가까이까지 은밀히 접근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를 채고 있지 못했다.


워싱턴은 이미 한참 전부터 커다란 기리시마의 영상을

레이다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레이다 영상이 워싱턴을 따라 오다가 갈라진 사우스 다코다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있어서 일단은 포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사우스 다코다는 워싱턴의 레이다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있어서

레이다에는 잡히지를 않고 있었다.무선 접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일본 함대가 탐조등을 열고 사우스 다코다에 집중 포화를
퍼부었을 때 위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9,000야드까지 접근한 와싱턴은 오인 포격의 염려를 털고 레이다의
도움으로 조준한 기리시마에게 함이 가지고 있는 16인치 포 9 문와
부포 40문의 가공할 포화를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자정이 조금 지난 00:05분이었다.

121195601765470.jpg

전함 와싱턴의  일제 포격

전함이 발포 섬광에 싸이며 포탄들이 기리시마에

날아갈 때야 일본 함대는 알아채고 기겁했지만 이미 늦었다.


결판은 이 일제 사격 한번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재 사격도 없었다


무수한 불벼락 같은 집중 포격으로 기리시마는 절망의 타격을 받았다.

제어하기 힘든 대 화재가 뒤따랐다.

00;12 기리시마는 더 이상 움직일 수없는 불덩이가 되어 버렸다.


제일 치명적인 피격의 손상 부분은 수면 하에 생긴 대형 구멍이었다.

물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어왔다.


더해서 키의 손상은 상황을 개선시킬 여지없는 지경으로 몰고 갔다.

키가 고장 난 기리시마는 좌측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1941년 대서양에서 영국 전함들에게 몰려서 침몰한 비스마르크의
최후와 비슷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포술에 정통했던 지휘관들의 관심과 훈련으로 다듬어진 포격 팀,
그리고 레이다와 행운이 미 전함 와싱턴을 도왔고 일 전함 기리시마의
불운을 가져왔다.


00:25분.  

기리시마가 침몰을 앞둔 표류에 들어간 곤도는 당혹감을 느끼며

그의 휘하 함들에게 미군 함대를 찾아서 격멸하라는 뒤늦은

긴급 지시를 했다.


그러나 일본 함들은 기리시마에게 죽음의 일격을 가한 와싱턴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리 제독 함대의 다른 함정들, 사우스 다코다와 두 척의 대파 된
구축함들도 이미 전투 해역을 빠져 나간 뒤였다.


와싱턴은 일제 사격으로 기리시마를 죽음으로 몰아놓고 홀로
북쪽 러셀 군도 쪽으로 변침하고 전 속력으로 달렸다.

일본 함대를 과달카날에서 유인해내고 대파된 사우스 다코다가

도주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었다.


눈이 아프게 미군의 존재를 찾던 일본 함대는 드디어 북쪽으로

항진해가는 와싱턴을 발견하였다.

일본 전투함들은 급히 몇 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러나 전함 워싱턴의 데이비스 함장이 직접 타륜을 잡고 절묘한

회피 운동으로 어뢰들을 모두 피해냈다.


1:04분 

별 수가 없어졌지만 곤도는 후속하던 미카와의 수송할 함대들을
위해서 큰 위험을 대강 제거했다고 판단하고 일본 함대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일본 함대들은 1:30분까지 대부분 전투 해역을
떠났다.


그러나 기리시마와 구축함 아야나미는 3시 25분경에 침몰하고 말았다.

구축함 우라나미가 아야나미의 생존자들을 구출했고 구축함
아사구모와 데루즈키와 사미다레가 기리시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다.

이 두 번째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242명이 전사했고

일본 해군은 249명이 전사했다.

121195604318845.jpg

일본측 해전도- 중앙에 기리시마의 침몰 위치가 보인다.
푸른선이 미함대 기동로- 붉은선이 일함대 기동로



두 거대 전함들끼리 맞붙은 해전은 일본 전함의 침몰로

미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야마모도는 패전 책임을 물어 곤도 중장을  직위 해제하였다.


과달카날의 병력 수송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해전으로 네 척의 수송선이 계획보다 훨씬 늦은 04:00분
과달카날의 해안에 도착했다.

미카와 휘하 다나카의 호위 함대는 날이 새기 전에 수송선들을 그들의
운명에 맡기고 모두 항공 공격에서 안전한 해역으로 대피하고 말았다.


05:55분

헨더슨 기지를 무력화 시키는 시도가 기리시마의 침몰로

불발로 끝나자 헨더슨 기지의 해병대 전투기들은 동이 트자마자

이륙해서 해안에 돌입해 들어온 수송선들에게 폭격을 시작했다. 


더해서 육상의 해병대 포대도 해변에 좌초한 수송선들에
포격을 해왔다.

여기에 합세해서 미 구축함 미드 나타나 수송선들에게 포격을 했다.

수송선은 모두 불타고 파괴되었다.

싣고 온 모든 화기와 탄약 식량 모든 장비가 파괴되고 타버렸다.

121195606754847.jpg

불타고 있는 일본 수송선들



과달카날 해전이 있기 전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증원하기로 했던 것은 완전 무장한 보병
일개사단 12,000명과 여기에 필요한 군수품이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두 번째 해전에서는

시간을 허비한 탓으로 수송선들이 과달카날 해변에서 괴멸되는 바람에

상륙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2,000명의 병사와 260개의 탄약 박스
그리고 단지 이 병력이 겨우 나흘간 먹을 수 있었던 1,500말이었다.


일본군들은 탄약과 식량도 없이 이미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던

과달카날로 상륙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일본군 들이 모두 제대로 상륙하였더라면 과달카날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 해전 뒤 일본은 정식 수송 함대에 의한 수송을 단념하고 도쿄
특급이라는 구축함을 이용한 야간 수송 작전을 감행하며 일본군을
지원해야 했다.

도둑처럼 야간에 과달카날 해변까지 몰래 들어가서 방수 처리 포장한

보급 물자를 수중에 던지고 재빨리 도망쳐 오는 비정상적인
보급 행태였다.

이런 방법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소량만을 보급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과달카날의 일 만 명의 일본군은 매일 50여명이 병과 기아로 죽어가는 참담한 지경에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1943년 2월 9일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이 과달카날 전투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기동 함대를 격파한
미군이 공격의 승기를 잡고 먼 북쪽으로의 반격을 개시한 첫 전투였다.

전쟁이 끝나고 1947년 퇴역했다가 1961년 해체되었다.
태평양 전쟁때 전함과 전함이 대결한 사례는  레이테 해전중
수리가오 해전에서  한번 더 있었지만 전함대 전함 대결로
전함이 격침된 것은 2차 과달카날 해전이 유일하다

 

자료제공 :  야  후

 

알   림 : 제가 이러한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단순하게 보기만하는 자료...

             혹은 흘러보네는 자료...가 아닌 좀더 자세히 알고.. 광범위하고 길지만

             하나하나 이해하고 생각하고 또한 상상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자료를

             나름대로 각색/편집/카피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비록 긴 자료라 할지라도 끝까지 봐주셧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슈퍼스탈리온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