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4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6.14 19: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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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 남하하는 중공군

 

 

 

11월 27일 밤 북쪽 산악지역 전투

중공 제79사단은 서쪽으로부터 제237, 제235, 제236연대를 병진시켜

북쪽 산악지대의 해병대 진지를 공격했다. 각 연대의 공격목표는 1384고지,

1240고지, 1167고지였다. 이 가운데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던 곳은 1240고지뿐이었다.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1167고지를 중공 제236연대가 점령하게 되면

산기슭의 포병진지를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되어 분지 안의 미군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각 연대는 3개 대대를 종으로 전개하여 종심대형을

유지하면서 공격했다.

 

제235연대의 선두인 제1대대는 어둡고 굴곡진 산길을 전진중에

차츰 우측으로 기울어져 지정된 목표인 1240고지가 아닌 1282고지로 향하고 말았다.

그 좌측에서 전진중이었던 제236연대의 선두 제3대대도 이에 따라서

우측으로 돌아 1167고지 대신에 1240고지로 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착오는 지형을 잘못 파악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군의 사격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전장에서 일어나기 쉬운 착오였다.

중공군의 공격개시 시간은 이러한 일로 인해서 각각 어긋나게 되었다.

 

1282고지에서는 밤10시경, 1240고지에서는 밤12시경,

1384고지에서는 다음날 새벽 1시45분경부터 소규모 탐색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본격적인 공격은 먼저 1282고지상의 제7해병연대 E중대를 향해서

시작되었으며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를 불어 대며

해병대를 죽이자는 노래를 부르면서 수류탄을 우박처럼 던졌고,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해병대 또한 수류탄 투척과 총검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다. 중공군은 중대진지를 우회하여 후방에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피해가 막심하여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며

새벽2시경이 되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 공격중 중공군 제235연대 1대대 1중대와 특수임무중대의 2개 중대 약 200명은

거의 괴멸적인 피해를 당했다. 제7연대 E중대 또한 피해가 막심하여 176명의 중대원중

단 1명만이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뿐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가운데

고지 정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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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고지의 산기슭에 있던 제5해병연대 제1대대장 스티븐스(John W. Stevens)중령은

1282고지의 E중대를 증원하기 위하여 새벽1시경 A중대의 2개 소대를 출발 시켰다.

 

중공군 제235연대 1대대는 제1차 공격부대의 잔류병력을 제3중대에 배속시켜

3시경부터 제2차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해병 E중대의 잔류병력과,

이를 증원하기 위하여 도착한 해병 2개 소대를 향해

 

"해병대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개새끼 해병대들 오늘이 제삿날이다"

고 고함치며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E중대 중대장과 부중대장이 여러 차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응전했으나 결국 두사람 모두 전사했으며 1282고지 정상은

새벽5시경 결국 점령 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E중대의 생존자는 A중대에서 증원된 스나이더 소위의 지휘하에

고지 반사면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중공군이 고지 정상을 점령했을 무렵,

남쪽의 돌출부에 제5해병연대 C중대(감편)가 도착했다.

C 중대장은 병력을 파악한 다음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서 신속히 부상자를 후송했다.

그러고난 후 60mm, 81mm 박격포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스스로 선두에 서서

용전분투하여 끝내 고지 정상을 탈환해내고 말았다.

이때는 이미 날이 밝기 시작했으며 중공군은 날이 밝은 후에도 과감한 공격을

되풀이했으나 막강한 화력의 우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5해병연대 1대대 본부요원들은 아침 일찍, 어려움을 무릎쓰고 1282고지로부터

사상자들을 후송했다. 대대장은 이 고지를 제5해병연대 A,C중대와

제7연대 E중대 생존자로 하여금 방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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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282고지전투는 유담리 방어진지전투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투의 하나였다.

그 세부 내용을 미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달은 저녁6시가 지나서 떴는데 하늘을 덮은 안개는 달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얼어붙은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 중공군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면서 전진해 오고 있었다.

미 해병대를 무찌르라고 외치면서...

그러자 조명탄이 터지고 밝아진 가운데 제1, 제2, 제3파의 차례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7해병연대 E중대의 죤 얀시(John Yancey) 중위의 소대 쪽으로

주된 공격이 일어나자 월터 필립스  중대장은 지휘소로부터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정상의 진지에서는 얀시 중위가 소대 선임하사관과 함께 각 진지를 돌면서

탄약과 수류탄을 분배해 주며 격려와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수류탄 파편이 얀시 중위의 콧구멍 안에 박혔다.

그리고 어깨와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그래도 소대를 돌며 격려했다...

일단 철수한 중공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해병대의 제1선소대를 돌파하고 박격포진지로 다가왔다.

얀시 중위는 생존자를 집합시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임했다.

근처에는 피아의 사상자가 흩어져 있었다.

 

로버트 케네모아(Robert Sydney Kennemore)중사는 사상자로부터

수류탄을 모아 중대원에게 분배하면서 돌아다녔다.

피아가 뒤섞여 혼전상태가 되었다. 총검으로 찌르고 때리는 격투가 벌어졌다.

케네모아 중사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기도 하고 눈바닥에 차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시간이 맞지 않아 수류탄을 덮치는 순간에 폭발하여

양다리를 잃고 눈 덮인 경사면에 굴러떨어졌다...

 

중대장은 착검이 된 소총을 얼어붙은 대지 위에 꽂아 놓고

"이 선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마라. 부상자를 놔두고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는 E중대가 아니냐."

그러나 중대장도 바로 전사하고 말았다.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한 부중대장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무릎쏴 자세로

중대를 지휘하면서 사격을 계속하고 격려의 소리를 외치다가 적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얀시 중위는 병사 9명을 집합시켜 역습을 개시했다.

이때 기관총 탄환이 얀시의 입 안으로 튀어들어갔는데도 계속 질주하면서 사격을했다.

그러나 수류탄의 공격을 받아 이 작은 역습부대는 붕괴되었고, 1282고지 정상은

중공군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 때 수류탄의 폭발로 얀시 중위는 쓰러졌고 실명하게 되었다.

 

날이 밝기 전에 2개 소대를 데리고 증원하러 온 제5해병연대 C중대장 존슨 중위는

부상자를 후송한 다음 전병력을 장악하여 역습을 시도했다.

최선두에 선 존슨 중위는 총검으로 적을 찌르고 돌진했다.

이를 본 중대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중공군을 격멸하고 고지를 탈환했다.

 

 

이 제5해병연대 C중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양상을

중공군의 기사를 토대로 작성한 미 공간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중공 제235연대 1대대 3중대의 생존자는 6~7명에 불과했다.

정치장교는 대대지휘소로 철수하여 이곳에서 2중대 1소대를 이끌고

다시 산 정상을 향했다. 이때 제5해병연대 C중대의 돌격이 개시되고 있었다.

제1소대는 제3중대 진지에 도착하였다...

 

이때 미군(C중대)이 맹렬히 역습해 왔다...

소대장 이 봉희는 돌격을 명했다.

2개 분대가 먼저 고지 정상으로부터 10m위치까지 전진했을 때 수류탄과 소화기 사격을

받아 피해가 속출하여 돌격이 어려웠다. 다른 1개 분대도 반수 이상이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불과 10분 사이에 전소대가 공격력을 상실하고 철수하여 방어로 전환했다.

 

새벽6시20분, 대대지휘소에서 제2중대장이 제2소대를 거느리고 왔다.

이 소대도 곧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격퇴당했으며 생존자는 7명 뿐이었다.

제1대대에는 제2중대 3소대만 남게되었으나 제2중대 정치장교가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이 소대도 용감히 돌격했으나 수류탄과 사격에 의해서 격퇴 당했다.

이와 같이 제1대대는 마지막 남은 소대까지 투입시켜 공격했으나

결국 각개격파되어 괴멸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제235연대 1대대의 사상자는 대부분의 중대장을 포함하여 약 400명이었다.

이중에는 후송이 불가능하여 추위로 얼어죽은 자도 많았다.

미군측의 피해는 E중대가 총원 176명 중 사상자가 120명,

증원부대인 제5해병연대 A,C양 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67명이었다.

 

만약 해병대가 1282고지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제5해병연대와

제7해병연대의 지휘소 마저 중공군에게 유린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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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케네모아(Robert Sydney Kennemore)중사.

두 다리를 모두 잃어 버린 용맹한 케네모아 중사는 의회명예훈장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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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해병연대 E중대 죤 얀시(John Yancey) 중위

1282 고지 전투에서 시력을 잃어 버린 얀시 중위는

1950년6월까지 술집을 경영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집된 장교였다.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과달카날,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으며

특공대원으로도 활약하여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던 역전의 해병 장교였다.

의회명예훈장

 

 

1240고지 전투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1500m 떨어진 1240고지의 제7해병연대 D중대에 대한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28일 새벽 1시가 지나서 개시되었는데

먼저 제3대대로 하여금 미군진지를 공격시켜 많은 해병들을 죽이고

3시경에는 중대지휘소를 점령했다.

 

후퇴한 D중대장 헐(Milton Hull)대위는 부상을 당하여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생존자를 집합시켜 역습을 감행하고 경사면의 한 모퉁이에 16명으로

고립방어진지를 편성했는데 중공군은 사방에서 이것을 포위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 제5해병연대 B중대의 1개 소대가 증원되어

헐 대위와 협력하여 한번은 1240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그러나 중공 제136연대가 역습을 개시하여 미군을 정상으로부터 몰아냈다.

이 전투에서 D중대는 거의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증원 부대인 C중대의 제3소대는 약 반수가 전사또는 부상당했다

 

1384고지 전투

1384고지에 대한 공격은 약간 늦어 28일 새벽 2시가 지나서 실시되었다.

제5해병연대 제3대대는 유담리 바로 북쪽에 집결해 있었는데 27일 저녁때는

대대지휘소를 중심으로 G,H,I 그리고 본부중대를 배치하여 전면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별도로 I중대의 1개소대를 1284고지 남쪽 능선상에 배치하였으며,

그 남쪽 300m지점에는 기관총 2정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경찰 1개 소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군은 1384고지 정상부근에는

실제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중공 제237연대는 1384고지로부터 능선을따라 서남방향으로 공격하여 고지상의

해병I중대 1개 소대를 새벽2시30분경에 돌파했으며 이어서 그 남쪽에있는

한국경찰 1개 소대도 격멸하고 고지의 첨단까지 진출햇다.

고지 기슭에있던 본부중대는 철수하고 한동안 대대본부만이 적 한가운데 남은 꼴이 되었다.

 

대대장은 새벽3시경, G중대의 2개 소대로 역습을 실시하여 1384고지 일부인

통제지점을 점령하고 진지를 편성함으로서 중공군의 유담리 서방에 대한 압력이

현저히 완화되었다. 즉, 1403고지와 1384고지방향으로부터의 접근로를 통제하여

1403고지에 있었던 제7해병연대 H중대의 철수를 용이하게 했다.

포병도 야간사격으로 방어를 지원했다. 지표면은 35센티미터까지 얼어붙었기 때문에

TD-14도저로도 진지구축이 불가능하여 포나 기관총이 모두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지표면에 노출된 상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27일 주간에는 가끔씩 박격포탄이 날아왔다.

밤이되면 적의 침투로 소화기 사격이 잦았으나 피해는 적었다.

27일 밤부터 28일 아침에 걸쳐서 포병은 끊임없이

180도 전면에 사격을 했기 때문에 보유탄약이 다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이 포병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포병진지를 감제하는 바로 북방의 1282고지와

1240고지가 돌파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북한군은 미군부대의 간격으로 야음을 이용해서 침투하여

직접 포병진지와 박격포진지를 유린함으로서 지원화력을 무력화하고

미군 보병의 퇴로를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중공군은 야간에 해병대의 정면을 공격하고 있을 뿐,

포병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형이나 미군진지의 배치상태로 보아

침투하기가 어려웠거나 또는 정면공격만으로도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을 시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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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에 중공군 시체가 널려있는 유담리 제5해병연대 지휘소

 

28일 새벽1시45분,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제2대대에게 여명에 서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제5해병연대의 임무가 여전히 무평리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머레이 중령은 제2대대 뒤에 제3대대를 후속시켜 공세의 기세를

유지하려 했다. 이때 2대대는 중공 제89사단의 압력을 받으면서

겨우 1271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공 제89사단은 1403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2대대의 우측 후면을 감제하면서 사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2대대는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태세라기 보다는

오히려 위험한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5해병연대장은 제7연대장과 협의한 결과, 강력한 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1시, 제5연대장은 단독으로 2대대에 대하여 서남쪽 산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다.

이 유담리진지에는 통합 지휘관이 없었으며 하갈우리와의 무전도 지형관계로

거의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일은 유담리의 두 연대장이 협력해서 결정해야 했다.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지휘소를 제7연대 지휘소 근처로 옮겼다.

연대 지휘소 운영은 부연대장에게 맡기고 거의 제7연대 지휘소에 위치하여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과 긴밀하게 협력해 가면서 작전을 지휘하였고

참모들도 긴밀히 협조하여 업무를 진행했다.

양연대가 일체가 되어 행동하기 위해서 합동계획과 합동명령을 작성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비록 사단으로부터 명령이 없더라도 당연히 선임연대장이

통합지휘관이되어 전반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서는 최후까지 협동관계를 유지했다.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의 의견을 존중했고,

나이도 어리고 계급도 낮았던 머레이 중령은 리첸버그 대령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제5연대장은 돌출된 제2대대를 철수시키면서 약화된 중대를 교대시키고,

I중대로 하여금 1282고지를 점령시키고 B중대로는 1240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였으며

제1대대 주력을 예비로 했다.

제7연대장은 28일, 하갈우리-유담리간의 개통문제와 덕동고개에 있는

바어버 대위의 F 중대를 구출하기 위해서 제1, 제2대대를 유담리와 하갈우리 방향에서

각각 도로를 따라 공격시켰는데 중공군의 저지로 달성할 수가 없었다.

 

 

덕동고개를 점령하라!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도로는 암석으로 된 단 하나뿐인 일차선도로이며

대략 중간지점에 덕동고개라는 중요한 요충지가 있고 노면은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 도로는 유담리의 2개 연대로서는 유일한 보급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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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이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덕동고개와 그 서북방 약3km 떨어진 무명고지에

보병1개 중대 정도를 배치하여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11월27일 11시30분,

하갈우리의 제7해병연대 F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덕동고개로 전진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주보급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아버는 각 소대장을 동반하고 현지에

미리 가서 지형을 정찰하고 덕동산의 서남방약1km떨어진 신흥리 도로 북쪽고지에

진지를 선정했다. 저녁때 중대주력이 도착하여 바로 진지구축을 시작,

9시경에 진지편성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무렵, 중공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고,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F중대진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덕동고개 서북쪽 무명고지(이하 터키힐)는

제7해병연대 C중대(중대장 죤 모리스대위. 1개 소대감편:이소대는 유담리의

제5,제7해병연대 통합지휘소 방어를위해 유담리에 남아 있었다)가 점령하고 있었다.

C중대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28일 새벽2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서 날이 밝았을 때는 이미 C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44명이나

되었고 완전히 포위되어 1419고지의 중공군으로부터 감제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전기도 파괴되어 항공기의 공중지원과 유담리 포대로부터도 지원을 요청할 수 없었다.

60mm박격포탄도 다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28일 저녁때 제7해병연대 1대대가 도착하여 C중대를 구출했다.

그러나 이 대대는 F중대 위치까지는 도착하지 못했다.

 

 

 

이 작전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같다.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고립된 F중대와C중대를 구출해내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덕동고개의 바아버 대위의 F중대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죤 모리스 대위의 C중대가있는 터키힐까지 뚫고 나오고,

A, B중대가 유담리에서 터키힐까지 뚫고 들어가 C중대와 합류하여

중공군을 격퇴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이 막 시작되기 전 바아버 대위의 무선보고가 들어왔다.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과 많은 사상자 때문에 C중대를 구출하기위해

7km를 뚫고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현 위치고수를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아들인 리첸버그 대령은 차량 부족문제 때문에 유담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하갈우리에 남아있던 제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에게

하갈우리 북쪽을 뚫고들어가 덕동고개의 F중대와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록우드 중령은 병력들을 F중대에 배속시켰기 때문에 중화기중대와 본부중대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막혀 전진에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리첸버그 대령으로부터 하갈우리로 되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게된다.

 

터키힐의 C중대 병사들은 고장난 무전기를 고치기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

결국 작동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한편, 제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과 C중대의 무전이 연결되어 위험한 상황을 보고받았다.

데이비스 중령은 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에게 구출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연대장은 상황이 허락된다면 C중대와 합류한 다음 가능하면 덕동고개까지 밀고들어가

F중대도 구출하도록 지시했다. A중대와 B중대를 이끌고 구출작전에 들어간

데이비스 중령은 최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중공군을 물리치고 C중대를 구출한 데이비스는 시간 상

고립되어있는 F중대를 구출하기 힘들다 판단하여 유담리로 돌아갔다

 

 

덕동고개 전투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최대 요충지인 덕동고개는

27일 저녁부터 제7해병연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대장 윌리엄 바아버(William E. Barber)대위는 11월7일에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겨우 20일이 지난 때였다. 그는 1940년3월, 해병대 사병으로 입대하여

공정부대원으로 근무하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3년11월 소위로 임관하여 유황도 전투에서 전공을세워

은성훈장을 수여받은 숙달된 전투경험자였다.

 

바아버 대위는 덕동고개의 진지점령시 천막 설치를 뒤로 미루고

즉시 진지구축을 개시하도록 했다.

복장이나 무기 손질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하고 꼼꼼했다.

중대에는 제2대대 화기중대의 중기관총반과

81mm 박격포반이 배속되어 있어서 그 병력은 240명이었다.

하갈우리에 있는 제11포병연대 3대대의 H포대(105mm곡사포)가

F중대를 직접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대는고지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서 1개 소대(2개 분대 제1선, 1개 분대 제2선),

서쪽과 동쪽방향으로 각각 1개 소대(각각2개 분대 병렬)를 배치하여

아치 형의 중대진지를 편성했다.

아치의 다리 부분은 반사면이었는데,

이 부분은 중대본부와 3.5인치 로켓포반으로 연결했고,

그 아래 도로 가까운 곳에 중대 지휘소와 60mm 및 81mm박격포진지를 배치시켰다.

81mm박격포는 북서쪽의 바위산에 대해서 시험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하갈우리의 105mm포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가는 제1수송대대의

차량종대가 오전8시가 좀 지날 때까지 엔진소리를 내며 고갯길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여 시험사격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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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달빛은 밝게 비쳤으며 기온은 영하 29도였다.

이무렵 중공군 제79,제89 2개 사단이 유담리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F중대진지로 육박해 오고 있었고 1개 연대는 소리도 없이 이미 F중대의 진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F중대 3소대장 로버트 맥카시 중위는 새벽1시가 좀 지나

진지를 순찰했는데, 돌처럼 얼어붙은 진지에서 암호를 수하하는 병사가 없었다.

소대장은 병사들을 집합시켜 호통을 쳤다.

그러자 분대장들은 병사들을 흔들어 깨우기도하고 발로 차기도 하며

정신차리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2시경, 소대장이 다시 순찰을 했을 때는 각진지에서 활기있게 수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무렵, 유담리방향에서도 격렬한 공방전의 총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28일 02시30분, 약 1개 중대의 중공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면서

북, 서, 남 등 세 방향에서 중대를 공격해왔다.  북방으로부터 능선을 따라서 돌격해 온

중공군 때문에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약 2개 분대의 해병은 어느 사이에

많은 사상자(35명 중 27명)를 내고 후방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던 제2선 분대지역으로

철수함으로서 고지 정상은 중공군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

이공격과 동시에 중공군은 서측방과 서북방으로부터도 돌격해왔다.

 

새로운 병력을 계속 투입하여 끊임없이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하는 중공군 병사와

이를 되받아 던지며 분전하는 해병대원간의 치열한 근접전투가 도처에서 전개되었는데,

해병대는 더 이상 중공군의 돌격을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F중대 2소대 헥터 카페라타(Hector Caffereta)일병은

얼어서 마비된 발을 문지르려고 침낭 안에서 신을 벗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돌격 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으로 뛰어나와 호 속에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했다. 10명 이상을 쏘아 넘어뜨렸을 때

소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소총을 달라고 소리치는 그에게 호 속에 넘어져있던

부상병이 장전된 소총을 건네 주었고, 그는 돌격해오는 중공군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실탄이 떨어지면 다시 부상병이 장전된 실탄 클립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카페라타는 상반신을 노출 시킨 채 우뚝 서서 사격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고 소총을 야구배트 처럼 휘둘러

수류탄을 중공군에게 다시 날려보냈으며 때로는 발길로 차 내면서 분전했다.

F중대의 중요 요충지역을 방어해낸 카페라타의 공로가 인정되어

그에게 의회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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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중대 2소대 헥터 카페라타(Hector Caffereta)일병

 

중공군은 다시 진지 남쪽의 도로방향으로부터 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60mm박격포반장 이하 10명을 살상하고 중대 지휘소로 육박해 왔기 때문에

중대장은 지휘소와 박격포를 경사면 위로 이동시켰다.

도로방면에서 경사면을 올라오며 공격하는 중공군에 대해서는

미리 배치한 중기관총사격과 수류탄으로 저지했다.

 

60mm와 81mm박격포반의 하사관들이 모두 전사 또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박격포는 일등병이 통합지휘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적탄의 위협을 무릎쓰고 진지들을 뛰어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대원들을 격려했다. 동측면에 위치하고 있던 1소대는 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날이 밝자 1소대는 그 주공으로서 산정을 향해

역습을 실시하여 본래의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새벽6시30분경에 전투가 거의 끝났는데,

그때까지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명, 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의 시체는 약 450구였다.

이무렵 중대의 수류탄 보유량은 극히 소량이었고 박격포탄도 10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중대는 해병 사상자와 중공군 전사자가 지녔던 화기, 탄약,

수류탄을 주워 모으는 한편,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를 모두 천막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속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침낭을 깔아서 수용하고 교대로 난방시설이된 천막에 들어가게했다.

 

위생병은 몰핀 주사약을 입에 물고 녹여 가면서 부상자 구호를 위해 뛰어다녔으나,

혈액이 굳어서 수혈을 못해 죽은 부상자도 있었다.

오후늦게 해병대 R5D기가 박격포 탄약과 위생기구를 공중투하했으나

진지밖에 떨어진 것도 많았다. 주변의 고지에 대해서는 코르세어에의한

지상공격과 하갈우리로부터 포병의 엄호사격이 실시되었다.

 

 

28일에는 하갈우리와 유담리로부터 F중대에 대한 지원부대가 투입되었는데,

모두가 강력한 중공군부대에 의해 차단되어 덕동고개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28일밤, F중대의 배치는 전날 밤과 같았지만 진지에 배치된 병력수는 30%나 줄어 있었다.

하갈우리 포병은 밤중에 F중대 진지주변의 중공군에게 요란사격을 가했고,

81mm박격포는 진지 동북방의 바위 산에, 60mm박격포는 진지 북방쪽을 사격했다.

주간에 철수하여 재편성을 실시하고 있던 중공군 제59사단은 일몰 후

다시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밤10시30분경, 하갈우리방면에서 격렬한 포성이 들려왔다.

중공군 제58사단이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29일 새벽2시15분,

중공군의 한 부대가 북쪽의 3소대에 박격포 사격을 가한후 공격해왔다.

이어서 서북측과 서측 정면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40~50명의 중공군이 북쪽의 3소대 진지를 돌파하여 진내에 돌입 하였다.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모여서 무언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해병대원들은 경기관총을 후방으로 돌려 이들을 순식간에 섬멸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북방으로부터의 압박이 강해서 제1선부대는 20m정도 철수했다.

중대장은 왼쪽무릎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부하의 부축을받아 앉은 채로 지휘를 계속했다.

 

 

29일 아침,

제3소대는 역습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했으며, 전날 밤의 손실은 전사 5명,

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 전사자는 200명 이상이었다.

날이 밝은 후 F중대는 주위에 낙하산을 둘러 놓아 표시를했다.

수송기는 이것을 표적삼아 정확한 투하로 탄약 등을 보급했다.

미 제6해병관측기인 헬리콥터가 SCR-300, SCR-619무전기의 건전지를 투하하다가

동체와 기수에 총격을 받았다.

C-119플라잉 박스카에서 투하된 보급품은 진지 서방 500m 지점에 떨어졌으나 낮에는

적의 사격 때문에 회수할 수 없어 밤에 포병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회수했다.

이렇게해서 박격포 탄약, 수류탄, 식량, 등을 수령했고, 모포와 들것도

보내왔기 때문에 부상자들을 땅 위에 재우지 않아도 되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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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610

 

SCR-300 : 보병대대의 무선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휴대용 경무선 전화기이며 통달 거리는 약 5km.

 

SCR-610 : 포병 사격 지휘용 무선 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선 전화기.
본래는 차량 장치용으로 차량의 배터리를 사용 하도록 되어 있으나 차량에서 분리하여 건전지로 야전에서 사용할 수 있다.

통달 거리는 약8km, 공중과 지상 간의 통달 거리는 약 50km이다.

 

이날 오후 바아버 대위는 분대장 이상을 불러서 다음의 훈시를 하였다.

"유담리의 제5, 제7해병연대는 포위되어 격전중에 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8일 밤, 하갈우리진지도 강력한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고토리와 차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중대가 증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앞으로는 보다 더 강력한 공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전방에 매설하여 진지를 강화하라.

우리는 해병대답게 싸운다는 것만을 생각하면 된다."

 

 

29일 밤은 조용했으나 30일 새벽 2시경, 중공군이 영어로 소리를쳤다.
"F중대 제군은 포위되어있다...중공군은 따뜻한 옷을 주고 잘 대우한다.

즉시 항복하라"고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중대는 박격포 조명탄을 쏘아올리고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30분 후 약 2개 중대의 중공군이 착검을 하고 도로의 남쪽으로부터 돌격해왔다.

중대는 주간의 공중보급 덕분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박격포로 조명하고 기관총 사격과 105mm곡사포의 시한탄사격,

그리고 수류탄 투척으로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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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헬리콥터가 무전기의 건전지를 가져왔고, 수송기가 탄약 등을 공중보급했다.

이로서 중대는 처음으로 예비탄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저녁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4시간 사이에 7~8센티미터 정도가 쌓였다.

 

중공군은 4정의 기관총을 서북방 바위산에 거치하여 새벽1시가 좀 지나 사격을 가해왔다.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을 하면서 105mm포로 사격을 했는데 다행히

초탄 발사된 포탄4발이 명중하여 일거에 격멸시켰다.

 

12월1일,

중대장은 중공군의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원들의 긴장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중대지역을 청소하도록 명령했다. 쓰레기와 깡통은 파묻고 부상자의 장비는

한곳에 모아 정돈했으며 전사자의 시체를 나란히 누이고 모포로 덮었다.

척후를 북방으로 내보냈으나 중공군의 사격으로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항공기와 박격포의 간단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호 속에서 잘 견뎌내고 있었다.

 

 

12월1일 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장거리포 사격을 가해 올 뿐 별다른 공격은 없었다.

이날 밤 유담리로부터 제7해병연대 1대대가 쌓인 눈을 밟으며 적 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원하기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2일 아침, 지원부대가 접근중이라는 것을 알게된 바아버 대위는

대대장에게 필요하다면 안내병사를 내보내겠다는 것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대대장은 그 기분은 알겠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응답해왔다.

 

2일 11시25분,

대대는 F중대의 진지에 도착하여 중대를 구원했다.

F중대는 5일동안 밤낮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불과 240명으로

중공 제59사단의 맹공을 견뎌 냈고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중대의 피해는 약 47%로서 전사 26명, 부상 89명, 행방불명 3명 이었으며

특히 장교 중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사람은 단 1명 뿐 이었다.

중대 전면에는 중공군이 유기한 시체가 1500구에 달했다.

 

F중대는 덕동고개를 고수함으로서

약 1주일간 중공 제59사단의 주력 2개 연대를 끌어들여 유담리진지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우세만을 믿고 인해전술로

이 작은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용감하게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끝내 돌파할 수 없었다.

 

F중대가 최종까지 건재하여 그 목적을 달성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특히 중대장 바아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 적절한 지휘, 전대원의 왕성한 사기와 단결,

필승의 신념, 보, 포, 항공의 효과적인 협조체제, 충분한 보급 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바아버 대위와 카페라타 일병에게 의회명예훈장이 수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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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아버 대위

 

 

5부로 계속 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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