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대적(對敵)방송의 요화들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6.23 21: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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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가 피아 가리지 않고 지구의 어느 곳이건  방문할 수 있게 되는

라디오 시대가 열리자 전쟁 상대방 국민과 군대의 심리를 흔드는

대적(對敵)선전 방송이 전쟁의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라디오를 동원한 선전 방송은 라디오가 일반화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그중 조국을 배반하고, 또는 조국을 위해서 선전 방송의 주역으로

맹활약 했었던 여성 방송인 몇 명을 소개해본다.


1.엑시스 샐리,- Axis Sally- (Mildred  Gillard)

                   - 독일에 이용된 미국인

이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국가를 반역한 혐의로 처벌받은
미국인은 열 두 명이다.

그중 다섯 명이 적국에서 반미 방송을 했던 방송인들이었다.


독일에 붙어서 크게 활동을 한 방송인이 래디오 베를린의

밀드레드 질라이다.

그녀는 본명보다도 엑시스 샐리로 잘 알려져 있다.

연합국 군인들이 붙여준 별명으로서 추축국 샐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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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스 샐리 (밀드레드  질라드)
- 체포되어 수감 될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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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질라는 메인주의 포트랜드에서 1900년도에 태어났다.

그녀는 오하이오 웨스리안 대학에서 드라마를 전공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뉴욕으로 가서 배우가 되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녀는 다시 뉴욕의 헌터 칼리지에 입학해서 수학하다가
독일인 교수  멕스 오토 코이쉐비츠(Max Otto Koischewitz.)와 만났다.

그 녀는 1929년 프랑스로 건너가서 음악을 공부하다가 맥스를
찾아서 1934년 독일로 갔다.


그 때 맥스는 래디오 베를린의 PD였다.

그녀는 이미 호감을 가졌던 맥스와 사랑에 빠져 독일에 정착했다.

그녀는 그의 주선으로 방송국에 일자리를 얻어 본격적인

선전 방송의 요화로 등장한다.


그 녀는 주로 음악과 연합국 비난을 섞어서 방영하는
프로의 DJ를 했다.

루스벨트도 욕하고 처칠도 욕하고 유태인도 폄하하는
비난들이 주된 테마들이었다.


때로는 적십자요원으로 변장해서 미군 포로들에게 가족에게
직접 전해 준다고 인터뷰한 미군 포로들의 녹음된 음성도
그들 몰래 각색해서 방송하는 짓도 했다.


독일이 망하기 이틀 전 까지도 선전방송을 하던 그녀는 전후

연합군 점령의 독일내에서 도망 다니다가 체포되었다.

1948년 미국으로 송환된 그녀는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그녀는 단지 연인이었던 맥스가 조종 하는 대로

움직이던 로봇에 불과하다고 변호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에게 반역죄로 10년을 선고했다.

그래로 이 것은 경량이었다.
그 녀와 같이 나치스 선전 방송에 협조해서
lord haw haw (호호 경)이라는 별칭으로 통하던 영국인 남성 부역자
윌리암 조이스는 영국군에 체포되어 신속히 재판받고 반년만인
1946년 1월 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복역을 시작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벌써 50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8년을 복역하고 다시 미국 사회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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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질라드의 긴 복역후
석방 될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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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회가 세운 요양원에서 말년을 보내며 어린이들에게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던 그녀는 72세의 나이에 오하이오 웨스리언
대학으로 돌아가 남은 학점을 따고 졸업장을 취득했다.

그 뒤에 쓸쓸히 홀로 살다가 1988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도쿄 로우즈 -Tokyo Rose- (이바 도쿠리)

                       -일본에 이용된 미국적 일본인 


NHK방송이 전시에 태평양의 미군을 향해 선전방송을 하던
래디오 도쿄에서 활약을 한 미국 태생 일본인 이바 도쿠리는
도쿄 로우즈라는 이름으로 미군들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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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로우즈- 도쿠리(이바) 이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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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도쿠리 이쿠코(戶栗 郁子) 라는 이름으로 미국 이민 일본인

가정에 태어난 그녀는 이쿠코라는 본명 대신 이바라는 서구식

이름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갔다.


그러던 그녀는 태평양 전쟁 직전 일본의 친척을 문병하러
1941년 7월에 일본을 방문했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길이 끊겨
일본에 잔류하게 되었다.

도쿠리는 일본 군부로부터 선전방송에 나오도록 강요당했지만

거절하다가 할 수없이 월급 7달라라는 형편없는 급료를 받고

선전 방송에 동원된다.


도쿠리는 제로 아우워라는 프로그램에서 전쟁기간동안
음악과 멘트를 섞은 20분짜리의 방송을 340회 했다.


그녀는 자신을 ‘앤’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 작은 고아 앤’으로 지칭했다.

자신을 도쿄 로즈라고 자칭한 일은 없었는데 연합국의 군인들은

일본의 선전 방송에 나오는 여성들을 모두 도쿄 로즈라는
불렀기 때문에 도쿠리가 대표 주자가 된 것이다.
일본 선전 방송에는 도쿠리를 빼고도 서 너 명의 영어 방송
아나운서가 있었다.


독일 편에서 부역한 엑기스 샐 리가 미국과 영국을 호되게
비난한 것에 비하면 도쿠리의 방송 내용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그녀는 전쟁의 와중에 1945년 4월19일 일본에서 만난 포르투갈과

일본 혼혈인 펠리페 아퀴노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그녀에게 몰아닥친 체포와 미국 압송 등으로

별거에 진행되다가 끝내 1980년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전후1948년 미국 FBI는 아직 미국 국적인 그녀를 체포하여
미국으로 압송해서 방대한 조사를 한 뒤 그녀를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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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전범 전용 스가모 교도소에
수감 될 때의 도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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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는 반역죄로 10년을 선고 받고 6년을 복역 한 뒤
1956년 석방되었다.

그 뒤 그 녀는 시카고의 일본 상품 수입 소매상을 하던 부모와 함께
가게 일을 보면서 생계를 이어 갔다.


천수를 다하고 2006년 9월26일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반역죄로 기소되었던 그녀는 죽기 전 여러 추가 조사와 증언자의
증언 번복으로 사면을 받았다.


3.서울 시티 수우-Seoul City Sue
- (Anna Wallace  Suhr)

                   - 북한에 이용 된 미국인


한국전쟁 중 북한도 미군 대상 영어 선전 방송을 했었다.

그 중 한 분이 고려대 영문과 교수였던 김인수(?) 교수였는데

북한군 퇴각 후 서울에 남았지만 당국에 체포되어 이적 죄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의 영어 방송이 북한군의 강압에 의한 행위였고

인촌 김성수선생이 구명 노력을 했으나 북한에 대한 복수심이

그득했던 정부는 말을 듣지 않고 가혹한 처벌을 한 것이다.


미국 기록에 북한의 선전 방송에 한 여성이 활동한 것이

기록 되어 있다.

Anna Wallace Suhr의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서 낙동강에서

혈전이 치열한 8월 초순부터 방송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년 여성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전 방송과 함께 전사한

미군의 군번을 북한군이 수거해서 확인한 미군 전사자 명단을

읽어 주기도하고 미국과 미군의 비난 방송을 하고 음악을 방송했다.


미군들은 금방 북한 방송에 나타난 그녀를 SEOUL CITY SUE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녀의 정체는 한동안 파악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 달 뒤 이 방송을 들어본 미 선교사 단체는 그녀가
서(徐)씨라는 한국인 신문 기자와 결혼한 Anna Wallace Suhr라고
밝혔다.


그녀는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기독교 재단 학교에서 가르쳤고

해방 후에는 미 외교관 자녀들의 가정교사도 했다.

한국에서 취재 활동을 하던 타임지는 이 영어 방송을 들은

미 상사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녀의 영어가 ‘ R' 발음도 제대로 되고 동북아시아의
사람들이 하는 영어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미국인들이 듣기에
조금 어색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에 오래 살던 한국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었는데 보건데 그녀가 선교사로 한국에서 나이 50이
다 되도록 한국인들과 살고 한국인과 가정생활을 하다 보니
말이 어눌하게 된 듯하다.


그녀의 방송은 과장과 선전으로 일관되고 음악도 군가같이

무겁고 딱딱한 것들만 틀어줘서 미군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도쿄 로우즈가 완벽한 캘리포니아 엑센트의 영어로 미국의

최신 가요를 들려주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녀를 아는 선교사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마지못해 하는 듯한

느낌이 들며 그녀가 강제로 마이크 앞에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북한 측에 합류 한 것이 강압에 의해서 한 것인지

남편이 좌경화했기 때문인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의 행방은 오랫동안 묘연해졌다.


1970년대에 메쉬(M*A*S*H)라는 시리즈물이 미국에서

유행한 일이 있었다.

이 시리즈물은 1980년대 초까지 십여 년간 계속 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었다.


한국 전쟁 때 한국 의정부에 있었던 이동 외과 병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은 것이다.

이 시리즈물에 서울 시티 수우의 방송이 등장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잊혀 졌다가 몇 년 전에 다시 세간에 나타났다.

1964년 휴전선에서 북한으로 월북했던 찰스 젠킨스 하사

(1940년생)가 2004년 역시 일본에서 납북되었던 그의 일본인

아내를 따라서 일본에 함께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회고록 ‘고백’에서 서울 시티 수우를

평양에서 만났던 사실을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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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젠킨스 - 한국 서부전선 미 1 기병사단에 근무
하다가 월남 전출이 두려워 월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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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평양 한 식품점에서 서울 시티 수우를 만났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냥 헤어졌는데 1973년 그가 만난 북한 관리는

서울 시티 수우가 1969년도에 남한을 위해서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젠킨스의 말은 확인하기가 힘들지만 그녀는

그 무렵 연로해서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1898년생임)


4. 하노이 한나,- Hanoi Hannah-(Trinh Thi Ngo)

                          -월맹인 영어 아나운서


하노이 한나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월남전이 치열한 동안

래디오 하노이 보이스 어브 베트남(VOV)의 영어 방송 아나운서로
활약하던  Trinh Thi Ngo다.


선전 방송을 할 때는 (한문으로 쓰면 )추향(秋香)인 Thu Houng
이라는 가명을 썼었다.

 

20세기의 과거 전쟁에서는 교전국 국적인을 방송 담당 아나운서로

썼지만 그녀는 전례와 달리 월맹 하노이 대학 영문과를 나온 재원인

월맹 본국 국민이었다.


하노이 한나는 하루 세 번씩 방송망을 타고 미군들에게 접근했었다

방송 목적은 물론 미군들로 하여금 전쟁에 염증을 내거나 탈영을

유도하기 한 것이었다.

하노이 한나는 미군들로부터 하노이 한나라는 별칭을 받았다.


월남전 때는 이미 손바닥 만한 트랜지스터 래디오가 일반화 되어서

거의 모든 미군들이 라디오를 가지고 다녔다.


미군들이 들을 수 있는 방송은 영국의 BBC나 베트남 주둔
미군 전용의 AFVN등 몇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청취의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서 미군들은 가끔은 하노이 한나의
방송을 들었다.


하노이 한나는 미국식 영어를 썼고 목소리는
달콤하리만큼 부드러웠다.

게다가 하노이 한나는 항상 젊은 미군들이 좋아할 미국
최신 팝송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다이얼로 손이 더 자주 갔을 것이다.


하노이 한나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명단과
(한국전 때와 같이 죽은 미군의 인식표가 노획되어 그 정보가
하노이로 송신되었기 때문에 미군 전사자 신원이 그대로
노출 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격추되어 생포된 미군 조종사의
이름을 방송하기도 했다.


그녀와 스텝들은 미군의 성조지를 비롯, 각 시사 인쇄물과
서방 뉴스 통신사들의 수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취합해서
방송 원고를 만들었기 때문에 월남의 미군들을 놀라게 할 만큼
정확한 정보를 전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그 방송의 정보가 너무 자세하여 미군  내부에
스파이가 있나 의심 할 정도이기도 했었다.

때로는 베트콩의 공세를 작전 개시 전 미리 예고하기도 해서

방송의 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노이 한나는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내용의 상당 부분이 과장되거나 허위 내용이
많아서 주월 미군들은 하노이 한나의 과장된 선동 방송을
비웃음과 조롱으로 대했다.


이것은 그 무렵 미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던

반전사상과 이에 동조하던 미군들이 많이 있었던 상황이었고

하노이 방송이 이 정세를 교묘히 이용했던 점으로 보면 의외이다.  


그녀는 지금 은퇴하여 사이공 시내에서
군인이었던 남편과 살고 있다.

하노이에 살던 그녀는 사이곤이 함락되고 얼마 안 되어
1976년 이주했다.


몇 년 전 그녀는 미국 저날리스트와 인터뷰했었다.

그 내용을 소개한 잡지에 그녀의 사진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녀가 하노이 한나로 맹활약 할 때의 사진을 보면 야무진
인상의 젊은 여자였었는데 이제는 아주 나이든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월남 고유 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그 인상은 그 옛날 미군들에게
무수한 호기심과 상상을 가져오게 만든 그런 요염한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는 없었고 단지 말발께나 잘 하겠다고 생각되는
인상의 평범한 월남 할머니일 따름이었다.
(하기야 이미 70이 넘은 할머니이니--)

유감스럽게도 그 사진들을 다시 찾을 수가 없어서 여기에 같이

소개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래디오 하노이는 지금도 있고 대미 적대 언어들을 쏟아내던
VOICE OF VIETNAM (VOV)은 내용을 달리해서 지금도 방송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점 , 하노이 한나의 후배  아나운서들
뒤에서 영어 발음과 문법등을 지도해주고 교정해주는 사람은
미국에서 온 여성이다.


반세기에 걸쳐 인류가 싸운 주요 전쟁에서 선전 방송에서

활약했었던 각 여성 아나운서들을 위에 소개 해보았다.


미군 심리전의 전문가들은 위의 활약한 여성들이 활약한
선전 방송들은 과연 국가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을

보상 받을 만큼의 수확을 가져 왔었던가를 사실을  분석했었다.


그러나 미군에 준 영향은 극소, 또는 전무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은 동서독 시절 동독 국민들이 시청했었던 서독 TV가 그들의

공산체제에 염증을 느끼게 했었고 그래서 동독 체제의 붕괴와 통일이

앞당겨 졌다는 결론에 비하면 크게 대조가 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어려서부터 온갖 메스컴을 통해
풍부한 의견과 여론, 그리고 정치적 사상의 표출에 노출되어
성장해온 미국 젊은이들은 이런 과장스러운 선동 방송에
강한 면역이 되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흔들기가
힘들었다는 결론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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