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5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6.24 17: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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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말경, 북한에는 만주로부터 불어오는 시베리아 한풍으로

혹한이 계속 되었으며, 강과호수 산과 계곡들은 모두 꽁꽁 얼어붙어있었다.

낮 기온은 영하 20~25도 정도였지만 저녁때가 되면 급격히 내려가

새벽 04시경에는 영하 28~45도까지 내려갔다.

적설은 대체로 많지 않았으나 곳에 따라서는 60cm 이상이나 쌓인 곳도 있었다.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시계가 제한되어 15m 이내도 잘 보이지 않았으며

흰 눈은 중공군의 백색 군복의 보호색이 되었다.

 

칼빈소총은 혹한으로 기름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었고

백병전에서는 총대가 약해 잘 부러졌다.

M1소총은 칼빈소총에 비하면 추위에 강했으나 윤활유를 많이 바르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윤활유는 엷게 발라야 했다.

 

자동소총도 불발이 되거나 단발 사격이 되는 일이 많았다.

경기관총은 얼어서 불발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야만 했고,

수냉식 중기관총은 물 대신 부동액을 사용해야만했다.

부동액이 없을 때는 부득이 물을 넣지 않고 공냉식 경기관총처럼 사용했다.

 

박격포는 비교적 잘 작동됐지만, 포판이 사격시의 반동으로

얼어붙은 대지에 부딪혀 금이 가기도 했다. 곡사포도 복좌작용에 시간이 걸려

발사속도가 떨어졌으며(복좌하는데 30초씩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강 추위로 인해 공기밀도가 높기 때문에 사거리가 단축되었고

포탄이나 수류탄의 불발도 많았다. 또 탄약을 공중에서 투하하면

바위처럼 얼어붙은 땅 표면에 부딪쳐서 깨져 사용가능한 것은 4분의1 정도였다.

 

트럭과 전차는 2시간마다 15분쯤 가동시켜 주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이 엔진소리 때문에 야간 기도비닉에 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연료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두터운 옷과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정비나 연료 보급작업에 어려움이 따랐다.

 

땅 표면은 35cm 두께로 얼어붙어서 야전 축성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미군 장비인 휴대용 야전삽은 곧잘 부러져서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형 삽이 도움이 되었다.

유담리부근의 토질자체가 단단하여 축성작업이 한층 더 어려웠다.

손에는 피가 고인 물집이 생기고 그것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해병대원들은 이 고통을 참으며 묵묵히 땅을 팠지만, 작업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여 기관총진지를 판 곳도 있었으나,

팔 겨를이 없을 때는 바위틈이나 기타 지형지물을 이용했다.

전투가 심할 때는 전사자의 시체를 쌓아올려 방벽을 삼는 일도 있었다.

 

고무를 주로 사용하여 만든 군화는 땀이 많이 차서 가만히 있으면 곧 동상에 걸렸다.

그래서 때때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갈아 신거나 발을 비벼주어야 했는데,

얼어붙은 구두끈을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울철 행동은 될 수 있는 대로 땀을 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동상 예방의 첫걸음이다.
그래서 축성작업을 할 때는 옷을 하나씩 벗고 끝나면 다시 하나씩 입도록 했다.

그러나 전투중에는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밤중의 혹한에 시달리면서

오직 아침이 빨리 오기만을 빌 뿐이었다. 틈을타서 양말을 갈아 신거나

난로를 피운 천막 안으로 교대로 들어갈 수 있으면 한결 좋은 일이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 침낭을 사용할 수 있을 때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뒤집어 쓰고

지퍼를 잠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식품도 얼어서 C레이션은 난로에 녹여서 먹었는데 외부는 녹아도 내부는 단단한

얼음 덩어리가 남아 있어 이것을 그대로 먹으면 복통이 나거나 설사를 하였다.

눈을 먹은 병사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설사를 했다.

옷을 두텁게 입은데다 추위가 심한 야지에서 더욱이 전투중에

설사병에서 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통은 물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득 채우지 않고,

상의 안에 넣고 있었으나 그래도 얼어서 수통이 깨지는 경우가 있었다.

 

수혈용 피나, 진통용 몰핀도 얼어서 녹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위생병은 진통제인 몰핀이 얼지 않도록 입에 물고 전선을 뛰어다녔고

수혈용 피도 난로 곁에 놓아 두고 있었다.

부상자를 눈 위에 내 버려 두면 바로 동사해 버리기 때문에

신속히 후송을 해야 하는데 전황이 불리할 때는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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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를 피운 천막 안에서 잠시 몸을 녹이고 있는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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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동안에서 하갈우리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 육군 제7사단 부사단장 헨리 하지(Henry Hodes)준장 휘하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의 특수임무부대(테스크 포스 맥클린)는 하갈우리에서 약 5km떨어진 후동 마을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했다.

 

더 북쪽에서는 윌리엄 레일리(William Reilly)중령이 지휘하는 제31연대 3대대와 레이 앰브리(Ray Embree)중령이 지휘하는 제57야전포병대대가, 그 보다 더 북쪽에는 제5해병연대로부터 책임전술구역을 인계받았던 페이스(Don C. Faith)중령이 지휘하는 병력 3000명의 제32연대 1대대가 밤을 맞았다. 여기에는 긴급히 소집되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한국군 병사들이 약 700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맥클린 대령은 후동의 지휘소를 하지 준장에게 맡겨놓고 페이스 중령과 함께 있었다. 이들 육군부대들은 제10군단 사령부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제대로 전투태세가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으며 월동장비와 방한피복이 몹시 부족했고 탄약, 식량도 넉넉하지 못했다. 육군 특수임무부대들은 통신망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서로 유무선 통신이 닿지 않은 채로 흩어져 숙영을해야했다.

 

이 중 유일하게 방한피복과 장비를 갖춘 사람은 4명 뿐 이었는데, 그들은 육군에

항공통제관(FAC)으로 파견된 에드워드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와

그 부하 3명이었다.

스탬포드 대위는 하갈우리까지 가서 자신과 부하들의 방한장비를 수령해 왔던 것이다.

 

27일 늦은밤, 중공군의 공격이 페이스 중령의 32연대 1대대에 가해졌다.

갑자기 공격을받자 대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스탬포드 대위는 전사한 육군 중대장의 임무를 자신이 넘겨받아 중대를 지휘하여

중공군을 격퇴 시켰다.

다음날, 스탬포드 대위는 항모에서 출격한 코르세어 기들을 유도하여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항공함포통제 장교로서의 임무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후동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는 22대 중 4대의 전차를 잃었으며,

레일리 중령의 제31연대 3대대와 앰브리 중령의 제57야전포병대대도 큰 피해를 당했다.

 

연대지휘소에있던 부사단장 하지 준장은

해병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차를 타고 하갈우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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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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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비행장의 VMF(N)-513 비행대 소속 F4U-5N 코르세어.

이 코르세어들은 장진호 해병대 철수작전 중 대지 공격기로서 맹활약했다

 

11월28일.

 

흥남에 있던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은 27일 밤부터 28일 아침에 이르는 전투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예하연대의 건투를 기원함과 동시에 차후의 작전에 관하여 구상하고 있었다.

상황파악, 항공지원 보장, 공중보급을 위한 조치, 부상자 후송준비 등 많은 사항을

신속히 실행해야했다. 이 가운데 사단장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하갈우리의 작전지휘와 병참선 확보 및 보강이었다.

 

스미드 사단장은 28일 아침 일찍

고토리의 제1해병연대장에게 고토리-하갈우리간의 도로 개통을 명령함과 동시에

직접 헬리콥터로 흥남에서 하갈우리로 날아가 11시에 사단지휘소의 운용을 개시했다.

이날 아침 미 육군 제7사단도 지휘소를 하갈우리에 개소했다.

오후에 알몬드 군단장, 제7사단 부사단장 하지 중장이 해병사단지휘소에 도착하여

스미드 사단장과 1시간 동안 회담했다. 여기서 무엇이 결정되었는지는 모르나 전반적인

상황으로 보아 방어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점에대해 검토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사단이 방어로 전환하는 문제와 해병사단의 철수 등은 결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맥아더 원수의 공격명령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담을 마친 알몬드 군단장은 곧 헬리콥터를 타고 장진호 동쪽의

제7사단 31연대장 알렌 맥클린대령의 지휘소에 도착하여

"현 단계는 패주중인 적에 대한 추격이며 압록강까지 추격하라"고 격려하면서

훈장 수여식까지 남발하고 흥남의 군단 사령부로 귀환했다.

 

알몬드는 중공군에대한 보고를 과장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오히려 북쪽으로 패주하는 패잔병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터에서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사치스러운 행동 때문에 편하고 풍요로운 것과는

전혀 인연이없는 해병대로부터 이미 무능한 자로 낙인찍힌 알몬드는 이날도

반짝반짝 광이나는 군화에 잘 다려진 군복과 신형 파카를입고 귀족처럼 나타났다.

그는 맥클린 대령에게 북쪽으로 달아나는 패잔병을 추격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32연대 1대대장 페이스 중령에게는 전날 빼앗긴 고지를 탈환한 다음

지원부대가 도착하면 북쪽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던 31연대장과 페이스 중령으로서는

군단장이 공격을 지속하라니 난감했다. 이렇게 알몬드는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몬드는 미리 준비해왔던 3개의 은성무공훈장을 꺼내더니 페이스 중령에게 한 개를

수여하고는 나머지 2개를 무작위로 선발된 병사에게 수여했다.

아무런 전공도 없이 훈장을 수여받은 병사들은 황당하기만 했다.

군단장 알몬드는 즉흥적 훈장 남발을 일삼는 미 육군의 전통을

그대로 충실히 이행하고는 흥남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전차를타고 하갈우리로 들어온 육군 제7사단 부사단장 하지준장은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에게 장진호 동안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스미드 사단장은 육군이 자력으로 충분히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하갈우리 방어가 취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해병 구원부대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스미드 사단장은 28일 오후 4시27분,

제7해병연대에게 남쪽을 공격하여 하갈우리로 통하는 주보급로의 개통을 명령했고,

이어서 4시50분, 제5해병연대에게는 서쪽으로 향하는 공격을 중지하고

제7해병연대와 협조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유담리에는 적, 청, 황 등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된 낙하산으로 각종 보급품이

투하되고 있었다. 제5, 제7해병연대는 완전히 포위되어 후방이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중을 이용하여 각종 보급품이 지원되었다.

그러나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와

제1해병연대는 고토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강력한 중공군이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갈우리 주변에 중공군이 총집결중이라는 정보도 입수되고 있었다.

 

고토리 진지에 대해서도 중공군은 동북방에서 국지적인 공격을 가해 와서

미군은 동북방에있는 돌출부 진지를 포기해야 했다.

고토리에는 이날 저녁때 영국 제41코만도 보병 2개 중대가 도착하고 있었지만

하갈우리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28일 저녁때의 미 해병사단의 상황은 유담리, 덕동고개,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의 5개 방어진지가 중공군의 차단으로 각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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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 미 해병 기지

 

11월 26일 저녁때 제1해병연대 3대대장 토마스 L. 리지(Tomas L. Ridge)중령은

하갈우리를 확보할 임무를 띠고 소총 2개 중대와

화기중대의 주력(G중대와 화기중대의 1개 소대는 차량부족으로 잔류)을 이끌고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다음날 27일, 제1해병연대 3대대는 그때까지 하갈우리를 방어하고 있던

제7해병연대 3대대와 교대하여 그 임무를 인수하였으나

제7해병연대 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과 대대본부, 화기중대의 주력은

차량부족으로 인하여 유담리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하갈우리에 남아 있었다.

 

하갈우리는 장진호 남단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서, 북, 남으로 향하는 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교통의 중심이었다.

북서쪽에는 높이 약 150m의 고지(동부고지라고 부르기도한다)가 하나 있을 뿐,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구릉지대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 내에서는 가장 평탄한 장소였다.

또한 남쪽으로의 탈출로인 하갈우리가 격파된다면

그 북쪽의 유담리, 덕동고개의 미 해병대는 고립되어 섬멸될 것이 뻔했다.

 

하갈우리를 통제하는 요충지는 동부고지였다.

그리고 건설중인 수송기용 활주로는 보급로의 사정이 나쁜 사단으로서는

보급의 동맥으로서 또는 부상자 후송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활주로의 건설은 원래 제10군단 공병이 담당하였는데 부득이 사단이 직접 통제하여

제1해병사단의 1개 공병중대만으로 건설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 이르는 중공군의 주요 접근로는 남부고지로부터 곧바로 하갈우리로

접근하는 것과 마을의 서남방으로부터 활주로에 이르는 것 등 2개가 고려되었다.

 

27일, 제3대대장 리지 중령은 대대작전과장과 화기중대장에게

하갈우리부근의 지형을 정찰시킨 후 진지편성을 계획했다.

비행장을 포함하여 하갈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레 6.5km의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넓은 지역을 2개 소총중대만으로 빈틈없이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2개 중대를 제7해병연대 2대대가 이제까지 맡고 있었던 중요한 정면인

남쪽과 서남방향을 연한 진지에 배치하고, 다른 정면에는 보병 이외의 부대를 배치하여,

간격이 생긴 곳은 화력으로 통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부진지에는 다음날 28일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었던 G중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대대장 리지 중령은 이상과 같은 부대배치를 계획한 후에 적의 상황을 알기 위하여

정찰을 실시했다.

 

27일은 사단의 무평리공격이 시작된 날인데 사단 사령부의 대부분이 하갈우리에

도착하여, 이미 참모본부로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다음날 사단장이 도착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지휘소가 개소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지휘소를 개소하기 위한 선발대와 사단과 군단의 직할부대도

이날 속속 하갈우리에 도착하여 차량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제1공병대대는 도로의 보수 유지와 사단 사령부 시설 설치등으로 분망했다.

특히 D 중대는 열심히 활주로 건설을 계속했고 야간에도 조명하에서 굴착작업을

계속했으나 4분의1 정도밖에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다.

C-47수송기의 활주로는 해발 0m에서는 약 1.2km의 길이가 필요하고

고도 330m당 33m씩 길이를 연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해발 1,100m인 하갈우리에서는 1km~1.3km정도면

수송기가 뜰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27일밤부터 28일에 걸쳐서 중공군 2개 사단은 유담리의 미군을 공격하여

유담리진지의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1403고지 탈취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른 1개 사단(제59사단(은 유담리-하갈우리간을 차단하고 바아버 대위가

지휘하는 제7해병연대 F중대를 공격해 고립시켰다.

한편 중공 제27군 예하 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의 페이스 특수 임무부대를 공격하여

이를 포위했다. 이러한 공격이 실시되는 동안 중공 제20군 예하 58사단은

하갈우리부근에 진출하여 일부 병력으로 하갈우리-고토리도로를 차단하고,

중공 제60사단은 고토리 서쪽에서 공격중이며

그 일부는 27일에 진흥리의 미군에 대해서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했다.

 

 

 

 

28일 저녁,

전날 밤 유담리를 공격했던 중공군 제79, 제89사단은 전력이 약화되어

재편성중이었으므로 제5 및 제7해병연대의 진지에 대해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신예의 중공 제58사단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집

결지로부터 진출하려 하고 있었고, 전날 밤, 덕동고개의 제7해병연대 F중대진지를

포위 공격하였던 중공 제59사단은 이날 밤, 또 다시 F중대를 섬멸할 목적으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28일, 차량부족때문에 유담리로 가지 못한 채 하갈우리에 남아있었던

제7해병연대 2대대장 록우드 중령은 F중대를 구출하기위해

제1해병연대의 소총소대와 전차의 지원을 받아 2회에 걸쳐 하갈우리-유담리사이의

덕동고개를 향해서 전진했으나 도로 양측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중공군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했다.

 

그리고 제1해병연대 3대대도 고토리로 향하는 도로를 개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I중대의 척후는 하갈우리 서남방 약 4km지점에 있는 홍문리방향을 정찰했는데

1개 중대 이상의 중공군과 조우하여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와 같은 징후와 항공 정찰에 의하면 이미 하갈우리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므로 긴급히 방어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방어할 경우, 주민을 어떻게 취급하며 어떻게 활용하여

정보를 획득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며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하갈우리 방어를 맡고 있던 제1해병연대 3대대는 한때 태백산맥의

마전리(원산 북방 약30km)라는 곳에서 주민이 있는 부락을 포함하여 원형으로 진지를

편성하고 17일간 고립방어를 하면서 주민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 이 대대를 협력했던

미 육군 제181 CIC 파견대(파견대장은 소령이었다)가 이번에도 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대대는 하갈우리 주민의 자치를 허용하고 마을 사무소, 경찰 등도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으며 주민 스스로 출입통제, 기밀보장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하갈우리로 들어오는 주민은 해병대의 검사를 받고 경찰서에 인계되어 정보부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하갈우리 사무소에 인계되었다.

 

27일에는 다수의 피난민이 하갈우리로 몰려왔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중공군에 의해

거주지에서 쫓겨나 마을의 서쪽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방첩대는 이러한 피난민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이들 주민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중공군이 가까이 와있다는 것은 분명하였으나

주민의 정보만으로는 중공군의 병력과 장비 등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어서

27일 아침부터 2명의 한국인 방첩대 요원을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이렇게 침투된 요원들은 하갈우리주변을 정찰하여 중공군과 직접 대화를하면서

정보수집활동을 실시한 결과, 장비가 양호한 중공군 부대가 주로 하갈우리 남쪽과 서쪽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항공기의 공중정찰도 이 지역에서 중공군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고해왔다.

아마도 1개 사단의 중공군이 이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8일에도 요원들이 중공군과 접촉하여 중공군 장교가

"28일 밤에 하갈우리를 점령한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정보를 보고해왔다.

 

여러 가지 분석결과, 이 정보의 신빙도는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중공군 부대의 주력은 하갈우리로부터 8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결지로부터

공격개시선으로 전개하는 데는 3시간 30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어두워지는 것이 대략 저녁6시이기 때문에 대대 정보과장은

"적은 1개 사단을 가지고 28일 밤9시 30분 이후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공격할 것이다" 라

 판단하고 이것이 중공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 가운데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공군이 유담리에 대하여 대규모적인 공격을 개시한 다음날인 28일 아침

제1해병연대 3대대장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진지도 신속히 강화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사단에

"하갈우리에 주둔한 전부대의 작전통제를 할 수 있는 통합지휘관을 임명해달라는 것과

G중대와 영국 코만도부대를 신속히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하갈우리 방어에 많은 병력이 필요함을 절감한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를 방문한

사단 작전참모인 바우저(Alpha Lyons Bowser)대령에게

자신의 중대 중 하나인 칼 시터(Carl Sitter)대위의 G중대와 영국 제41 코만도가 아직

고토리에 남아있으니 최대한 빨리 하갈우리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바우저 대령이 수락했던 것이다.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은 28일 흥남으로부터 헬리콥터로 날아와서 11시에

하갈우리 지휘소에 도착하여 사단지휘소를 개소했다.

이때 고토리로가는 도로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부고지에 배치할 예정이었던

G중대가 도착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가 없었다.

 

 

28일 오후 3시. 사단 작전참모는 리지 중령에게 리지 중령을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전화로 하달했다.

저녁 6시부터는 어두워지기 때문에 밝은 시간은 앞으로 3시간뿐이었다.

리지 중령은 바로 각 부대장을 집합 시켰다.

뒷날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다.

따라서 이러한 부대를 장악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나 서둘러 주요부대 지휘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각 부대의 담당지역을 배정하였다.

저녁 5시가 지나서 회의가 끝나자 각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로 급히 돌아갔다.

 

즉 진지서남쪽으로부터 I중대와 H중대를 배치하여 가장 중요한

접근로를 방어하게 했으며 방어정면은 약 2,200m가 되었다.

 

다음으로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동부고지는 1개 보병중대를 방어하도록 예정했으나

I중대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 제10군단 사령부 분견대와 해병 제1근무대대가

담당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각종 부대에 대하여 적절한 지휘와 화력지원을 제공하기

위하여 제3대대 화기중대 장교2명에게 SCR-300무전기와 무전병을 붙여

공병 D중대와 사령부 분견대에 파견 시켰다.

 

동부고지와 H중대 좌측방 사이는 좌로부터

화기중대(각 소총중대에 배속한 화기분대, 지휘소부근에 배치한 81mm박격포 제외)가

동부고지 남쪽과 도로의 저지임무를 맡았으며

해병 제1공병대대 D중대(활주로 공사중인 병사는 제외)가 하천의 남쪽을 맡았고,

제11포병연대 2대대 D포대(105mm곡사포)가 그 남쪽을 맡았다.

또한 D포대에게는 진지의 76%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간접사격으로,

약25% 가량 되는 지역은 직접조준사격으로 지원하는 임무가 부여되고 있었다.

 

다음에 동부고지의 북쪽에는 제7해병연대 대전차중대,

서북방에는 제11해병연대 H포대(포대장 벤자민 리드 대위-105mm 곡사포)를 배치했다.

이 포대의 주임무는 덕동고개에 있는 F중대를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포 다리를 조작해서 동부고지 북단까지 270도 범위를 어떻게든 사격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H포대로부터 중대까지의 사이에는 북으로부터 제1근무대대 파견대,

제1수송대대, 제2해병 항공통제반, 해병사단 사령부 본부대,

제1해병연대 3대대의 본부중대가 위치하고,

I중대 북쪽의 제7해병연대 2대대 화기중대(감편)는 유담리로 가는 도로를 담당했다.

 

 

동부고지 서쪽으로부터 장진강까지의 지역은 주로 군수부대 주둔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제1근무대대의 찰스 뱅크스(Charles Banks)중령이 지휘했다.

그러나 전술상의 결정에 관해서는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제7해병연대 2대대장

록우드 중령과 부대대장 소여(Webb Sawyer)소령의 조언을 듣도록했다.

그리고 보병 대대장인 록우드 중령이 이 지역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지 않았던 것은

록우드 중령에게는 제7연대장으로부터 덕동고개의 바아버대위의 F중대 구출작전임무가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배치를 보면 예비대다운 부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병력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각종 파견대 등의 필요에따라

집결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28일 저녁, 하갈우리는 적막 속에 잠기고 있었고 때때로 소화기 총성이 정적을

깨뜨리곤했다. 이때 중공 제58사단은 하갈우리 진지를 향해 남으로부터 제172연대,

동으로부터 제173연대, 그리고 제147연대를 예비부대로 하여 야음을 이용하여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 사단은 편제상의 박격포 외에 기타 포병에 의해

증원을 받고 있는 야간전투에 능숙한 부대였다.

 

이 사단은 압록강을 건너올 때 각 대대마다 82mm박격포 2문과 포탄 180발,

60mm박격포 6문과 포탄 240발, 보병중대는 경기관총 12정에 각각 탄약 1상자,

120명 정도의 병사에게는 개인당 80발의 소화기 탄약을 휴대시키고 있었다.

사단으로서는 이 전투가 한국에서의 첫 전투였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탄약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갈우리 남서정면 전투

중요정면을 담당한 H중대와 I중대는 25cm 정도 지면을 파고 호를 구축했다.

얼어붙은 지면을 판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I중대는 C-3 폭약을 사용하여 공사를 하였으며 모래주머니 약 1천개를 만들어

방어용으로 삼았다. 이렇게하여 튼튼한 엄체호를 만들 수가 있었다.

진지전면에는 지뢰, 부비츄랩, 조명지뢰, 휘발유를 채운 5갤런 드럼통으로 만든 화염통,

철조망 등을 설치하고 이것을 기관총, 무반동총, 전차포의 사격과 박격포의 탄막 등

화력으로 통제했다.

방어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양중대는 3개 소대씩 모두 6개 소총소대를 제1선에 배치했다.

또 양중대의 전투지경선 부근에는 전차 2대를 배치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전투준비태세는 처음에 50% 병력을 대기시키고

예상공격시간인 밤9시 30분에는 100% 대기했다.

 

밤10시경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시계는 나빠졌으나 매섭던 추위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10시 30분경 부비츄랩으로 장치된 지뢰와 조명탄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5에서 10명 정도가 진지의 약점을 찾아 내기 위한 위력수색을 해왔던 것이다.

이것을 격퇴하자 중공군의 박격포가 제1선진지를 맹렬히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준비사격이 20분간 계속되자 중공군 보병은 미군진지의 전방 지근거리까지

기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박격포탄에 이어서 피리 소리가 3번 나더니 중공군 보병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으로 사격하면서 돌격해 왔다.

진지에 있었던 미군에게는 중공군이 땅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훌륭한

돌격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미군의 전형적인 화망 속을 뚫고 들어온 결과가 된 것이다.

 

해병대는 박격포, 바쥬카포, 기관총, 전차포 등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대항했는데

경, 중박격포 지원을받는 중공군은 피해를 무릅쓰고 돌격을 반복하여

미군의 최후저지선을 뚫고 돌입하여 밤11시 30분경에는 H중대 중앙을 돌파하고

중대 지휘소를 육박하여 왔다. H중대장 콜리(Clarence Corley)대위는

부근의 병력을 수습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H중대 지역을 화력으로 제압한 중공군은

이 소수부대의 저지진지를 돌파하고, 일부병력은 한창 조명을 비추며 공사중이던

활주로까지 진출했다. 공사중이던 공병D중대원들은 장비 담당장교인 맥파랜드 중위와

함께 역습을 가해 소총으로 활주로를 공격해 온 중공군을 몰아내고

다시 불도저를 가동하여 공사를 계속하였다.

 

대대장은 군단의 통신병과 공병 약 50명으로 H중대지역을 역습시켰으나

60mm와 82mm박격포, 중기관총의 화력이 뛰어난 중공군의 사격에 의하여

역습부대 지휘관은 전사하고 역습은 실패하고 말았다.

 

 

0시경, 피아가 뒤섞인 혼전상태가 되었다.

서로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 의무중대의 수용소 벽과 사단장 스미드 소장 숙소에

기관총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관통해 나갔다.

H중대 전역에 중공군이 난입해 있었다.

돌파에 성공한 중공군은 진지 내부에 들어가자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미군들 중에는 상의를 벗겨가는 동안 죽은 시늉을 하고 있다가 살아난 부상자도 있었다.

깡통상자를 메고 있다가 사살되는 중공군이 있는가하면, 운반할 수 없는 의류나 식료품은

총검으로 찌르거나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부수는 등 중공군은 약탈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욕구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던 탓일까.

아무튼 중공군 제172연대는 돌파에는 성공했으나 전과 확대를 위한

계속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0시 30분경, 대대에서 공병과 운전병으로 편성된 약 50명의 예비대가 H중대 부중대장의

지휘하에 역습을 감행하여 일부지역을 회복하고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I중대 정면도 H중대와 동일한 공격을 받았다.

체구가 거대한 중대장 피셔(Joseph Fisher)중위는 진지를 돌아다니면서 격려했다.

가장 심한 공격을 받은 지역은 촤측진지였다.

어느 소대의 진지는 두 번이나 중공군에게 유린당했으나 다시 탈환하였다.

I중대의 60mm박격포 3문은 하룻밤 사이에 1700발을 발사했다.

중대진지 정면에 있는 두채의 가옥이 불타기 시작하면서 중공군 병사들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자 2대의 전차에서 뿜어져나온 기관총탄이 중공군을 쓸어 버렸다.

 

I중대가 돌파당하지 않은 것은, 이 중대에서 성형폭약을 이용하는 등 머리를 써서

진지강화에 주력했던 것이 이 방어전투에서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새벽4시경, 중공군의 활동은 감소되었다.

 H중대장은 60mm박격포 사격을 실시한 후 급히 집결시킨 전병력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역습을 감행하여 아침6시 30분에는 완전히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이 전투로 H중대는 16명 전사, 배속부대를 제외한 중대 부상자가 39명이었으며

I중대에서는 2명 전사,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침햇살은 H중대와 I중대정면에 수백 구에 이르는 중공군 시체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눈이 그 위에 가볍게 쌓여 붉은 선혈은 부상병이 비틀거리며

지나간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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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고지(이스트 힐)전투

동부고지의 방어를 담당할 예정이었던 제1해병연대 G중대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칼 시터 대위가 지휘하는 제1해병연대 G중대는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들어가다가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새삼 배치를 바꿀 여유도 없으므로 긴급히 편성된 혼성부대로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대요원들은 거의 훈련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 모르는 한국인 신병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부대들 가운데 제일 큰 미 육군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중대장

필립 컬비스-Philip Kulbes대위)는 미군 77명, 한국군 9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로가 차단되기 직전인 28일 12시에 고토리에서 하갈우리에 도착한 부대였다.

부대는 해병부대에 흡수된다는  명령에 따라 차량과 장비를 정리한 다음 험한 산으로

올라가 방어할 동부고지 진지에 도착한 것은 저녁8시 30분이었으며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운이 좋은 병사는 근처 개인호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호를 파지 못하고 공격을 받아야했다.

 

중공군의 공격은 29일 새벽2시부터 시작되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를 경계하고 있던 한국군 1개 소대를 돌파한 중공군은

돌파구를 확대하여 산 정상에 있는 미군을 격퇴시켰다.

미 육군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는 77명 가운데 전사 10명, 부상 25명, 실종 9명의

피해를 당했으며 한국군은 90명 중 사상자 및 실종자가 50명이었다.

 

미 육군 공병부대의 작전을 지휘하던 해병대위(존 쉘넛)는 전사 하였으며,

그의 무전병 부르노 포드락크 해병 일병은 휴대한SCR-300무전기를 짊어지고

산 정상에 혼자 남아서 중공군에 관한 정보를 계속 송신하고 있었다.
중공군에 밀려 도망치던 자신들을 구하려했던 해병 지휘관이 전사하자 육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는 황급히 후퇴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포드락크 일병은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남아 고지정상의

중공군 병력과 배치에대하여 대대에 상황보고를 했던 것이다.

 

새벽4시가되자 미군은 겨우 동부고지 남단의 경사면을 유지하며 산기슭의 도로에 연해서

수대의 전차를 동반한 근무부대가 방어선을 미약하게 형성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중공군은 동부고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만일 중공군이 일거에 전력을 투입하여 전과 확대를 한다면 산기슭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진지 안으로 진입하여 보급품 집적소나 사단 사령부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대비하여 미군은 사단장을 위한 호위 병력을 증가 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은 산정을 점령한 것으로 만족했는지 그 이상 전과 확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북쪽정면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투를 시도했으나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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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 박격포의 전투

하갈우리에서는 28일 밤 곡사포, 박격포, 기관총, 수류탄 등의 섬광이 거대한 둥근 원을

그리며 밤 하늘을 수놓았다. 발사음과 폭발음이 뒤섞여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주위의 산을 진동시켰다. 한편 방어진지 내의 활주로 상에서는 대낮같이 밝은 조명등

불빛아래 불도저가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제11해병포병연대 2대대 D포대(105mm곡사포)는 제1해병연대 3대대에 배속되어

장기간 전투를 해왔기 때문에 상호 협력관계는 지극히 원만했다.

28일 정오, 중공군의 76mm 포탄 1발이 대대본부에 떨어져 대대 보급관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1발을 끝으로 더 이상의 포격을 없었으나 한 밤중이 지나

중공군 76mm포가 또다시 포격을 개시했다. 진지 내에는 대량의 연료와 탄약이

집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명중하면 연쇄폭발을 일으킬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D포대장은 6문의 곡사포사격을 중지하고 그 중 1문만 150m 정도 이동시켜

사격함으로서, 그 발사지점을 미끼로 중공군 포병사격을 유도한 다음 대포병전을 실시했다.

 

단 1문 만의 포가 자신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는 것을 몰랐던 중공군이 포격을 가하여

섬광이 일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포들이 그곳을 향해 일제히 포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 제압사격은 매우 정확한 효과를 가져와 중공군 포병을 침묵시켜 버렸다.

훗날, 조사에 의하면 중공군 포병은 사격진지에서 76mm포 2문이 파괴되었으며,

2문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없었다. 그리고 D포대는 하룻밤에 1200발을 발사하여

집결지에 모인 중공군에게 몇 번이고 타격을 가했다.

 

 

 

제11포병연대 3대대 H포대(105mm곡사포)의 주임무는 덕동고개의 바어버 중대를

지원하는 일이었는데 동부고지 능선이 탈취당했을 때는 포구방향을 180도

가까이 돌려 동부고지에 포격을 가해 중공군의 전진을 저지하기도 했다.

보병대대의 81mm박격포도 약 1100발, 2개 소총중대의 60mm박격포도 3000발 이상을

사격하여 진지방어에 기여했다.

 

 

중공 제58사단은 교묘하게 82mm박격포(소련제로서 최대 사거리 3km)를 사용해서

공격을 지원했다. 그러나 목표는 대부분 제1선 호 속에 있는 병사들에게 지향되었기

때문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가장 취약하고 효과적인 목표인 탄약과 연료 등이

진지내부 도처에 야적되어 있었는데, 이에 대한 포격은 하나도 실시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탄약절약 때문에 목표를 제1선의 보병으로만

한정했던 것인지 또는 보급을 적지에서 획득한다는 이유에서 식량, 탄약, 연료 등을

자기들 것으로 생각해서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른다.

 

 

하갈우리 방어진지를 관측할 수 있는 동부고지를 상실한 미군으로서는

목에 비수를 들이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지 중령은 새벽5시 30분, 부대대장 마이어 소령에게 전예비병력을 집결시켜

동부고지를 공격 탈환하도록 명령했으나 동부고지 서남쪽에 2개 소대가,

서북 반사면에 1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산 정상의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로 29일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토리로부터 증원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무릎쓰고

하갈우리를 향해 접근해오고 있었다.

 

 

6부로 계속 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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