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6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7.15 22: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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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저녁때,

제1해병연대 3대대 G중대(중대장 칼 시터 Carl Sitter대위), 영국 해병 제41코만도,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연대 B중대(중대장 펙캠 Charles Peckham대위)가

고토리에 도착했다. 모두가 다 하갈우리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제1해병연대장 루이스 풀러(Lewise Burwell Puller)대령은 이곳 지휘소에서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에 분산되어 있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병력이 부족했던 풀러 대령은 이 들 부대들이 도로가 차단되기 전에

무사히 고토리에 도착한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고토리에는 제1해병연대 2대대가 11월 24일부터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 병력은 2대대를 주력으로하여 제1해병연대 본부 및 본부중대, 대전차중대,

박격포중대(실제 병력은 4문의 4.2인치박격포를 보유한 1개 소대),

제11포병연대 2대대(실제 병력은 E포대 뿐이며 6문의 105mm곡사포 보유) 및

제1의무대대 D중대였다. 즉 보병 1개대대, 4,2인치 박격포 4문, 105mm 곡사포 6문,

몇 대의 전차와 75mm무반동총 몇 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공 제60사단은 주력을 축차적으로 고토리 서쪽지역으로 집결중이었으며,

27일에는 사단 사령부를 고토리 서방 광산 부근에 배치시켰다.

그날 밤, 중공군은 고토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 다음날 28일에는 고토리 방어진지

동북부의 고지 돌출부에 있는 1개소대진지를 탈취하여 격퇴했다.

 

28일,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소장의 명령에 의하여 제1해병연대 2대대는 1개 소총중대로

하여금 고토리-하갈우리 도로를 개통시키려 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같은 상태에서 하갈우리로 가는 도로가 차단된 채로 있었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300명의 영국 해병 제41코만도부대를 지휘한  

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sdale)영국 해병 중령을 부대장으로하는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다음날인 29일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여기에는 사단 본부대와 칼 시터(Carl Sitter)대위의 G중대,

펙캠 대위의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연대 B중대가 포함되었다.

영국 제41코만도부대는 한국에 도착한 뒤 미해병대에 합류하였고 

호머 리첸버그 대령의 제7해병연대에 배속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28일 밤, 하갈우리 방면에서는 피아 쌍방의 포성이 심하게 들리고 있었으나,

이곳 고토리는 조용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비좁은 진지내의 난방 텐트는 어느 곳이나

만원이었기 때문에 포격을 받으면 단번에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

중공군은 공격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29일 오전9시 45분,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는

105mm곡사포와 4.2인치 및 81mm박격포의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여기에 사단 사령부 차량종대가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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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를 향해 전진하는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

 

 

드라이스데일 부대가 출발한 후 고토리주변의 고지에는 중공군의 활동이 있었다.

저녁때에는 중공군 약 1개 대대가 진지 동북방 고지로부터 박격포의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E중대 정면으로 공격을 가해 왔다. 중공군 17명은 용감하게도 진지내로

돌입해 왔으나 모두 사살되었고, 약 1시간 반의 전투 끝에 중공군은 격퇴되었다.

29일, 사단 수색중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여 진지내의 병력은 증강되었다.

 

드라이스데일부대는 출발 직후, 먼저 제41코만도부대로 하여금 중공 제60사단의 일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 동북부고지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여 적을 격파했고

G중대는 북쪽의 1236고지에 이어서 1182고지를 공격했다.

후방에는 미 육군 제31연대 B중대가 예비로서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 브루스 클라아크 대위가 지휘하는

제1해병전차대대 D중대(1개소대 감편)와

여기에 배속된 제5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가

마전동으로부터 북상하여 드라이스데일부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제1전차대대 B중대는 동정리로부터 북상하여 오후3시경에는 고토리에 도착하여

그 주공이 드라이스데일부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부대는 공격개시 후 4시간 동안 겨우 4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어두워지기까지는 긴밀한 공중지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하갈우리에대한 증원이 시급하다는 것 등을 고려해서

특수임무부대장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전차와 항공기의 엄호 하에

보병을 차량에 승차시켜 도로상으로 강행 돌파하려고 결심했다.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는 전차 29대와 일반 차량 141대 등 다수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대장은 전제대를 엄호할 수 있도록 전차를 분산 배치하려고

생각했는데, 전차중대장 클라아크 대위의 강력한 반대의견 때문에

전차부대를 클라아크 대위의 지휘 하에 선두에 세워 전진하기로 했다.

오후 1시 50분, 종대는 F4U 코르세어기 2대의 엄호 하에 눈보라와 세찬 바람을 가르며 

다음과 같이 차례로 전진을 개시했다.

 

1. 제1전차대대 D중대(2개 전차소대), 제5해병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M26 퍼싱전차 17대)

 

2. 제1해병연대 G중대(차량 22대)

 

3. 영국 해병제41코만도(차량 31대)

 

4. 미 육군 제31연대 B중대(차량 22대)

 

5. 제1해병사단 사령부 본부대(차량 66대)

 

6. 제1전차대대 B중대(2개 전차소대 M26퍼싱전차 12대)

 

그러나 전진을 시작하자, 바로 중공군진지로부터 기관총과 박격포 등의 사격을 받아

부대는 정지되었다. 그리고 전차가 적의 소화기를 제압하는 동안 보병은 트럭에서 내려

교전했다. 두절된 도로와 노면상의 탄흔 등이 장애가되어 뜻대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오후4시 15분, 종대는 마침내 고토리 북방 6.5km지점에서 완전히 정지되어 버렸다.

이 무렵 종대 후미의 전차대대 B중대는 겨우 고토리를 출발했을 뿐이었다.

선두에서 전진하고 있던 클라아크 대위는 전차 2대를 내보내 전방을 정찰시켰다.

그 결과, 중공군진지와 도로상황으로 보아 전차는 돌파할 수 있어도 트럭은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때까지 종대 내의 무전기는

전차무전기 외에는 모두 파괴되어 부대장이 적절한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일몰이 다가오자 어둠이 짙어지면서 추위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대장은 전차무전기로 하갈우리의 스미드 사단장에게

보고하여 더 이상 돌파를 강행할 것인지를 물었다.

사단장은 증원군이 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하갈우리 방어진지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

판단했기 때문에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사단장의 명령을받아든 부대장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전진을 계속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갈우리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전차는 재 급유를 마치고 전진을 개시했다.

 

이 부근에는 중공 제58사단이 도로를 통제하기 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드라이스데일 중령도 부관도 부상을 당했고 G중대의 차량도 파괴되었다.

미군의 피해가 극심한 가운데 전진은 느리고 어둠만 짙어갔다.

종대가 정지했을 때는 트럭을 도로 옆에 대피시켜 놓았는데, 전진을 시작할 때에는

점차 순서가 흐트러져 각 부대가 서로 혼합되어 버렸다.

그리고 전차는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우려했던 것 처럼 G중대의 차량종대 안에서

자연히 분산되어 전진하게 되었다. 하갈우리까지의 대략 중간지점으로부터

약간 남쪽 지점에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사격이 격심해져서 종대는 또 다시 정지 되었다.

이곳은 도로 바로 동쪽에 깊은 도랑이고, 그 동쪽으로는 약 150m의 평지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건너편 철도의 동쪽에는 6~9m정도 높이의 언덕이 있고,

다시 그 동쪽에 산이 솟아 있었다. 도로 서쪽에는 얕은 도랑,

그 다음에는 논이 약 300m 정도 계속 되었고

그 서쪽에 장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장진강 서쪽은 험한 산악지대였다.

 

이때 영국 제41코만도부대 후미의 탄약차량에 박격포탄이 명중하여 불이 붙었다.

이로 인하여 도로가 폐쇄되고 후송부대는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차량보다 전방에 있는 부대, 즉 선두의 D전차중대, G중대, 제41코만도부대

병력의 4분의3을 포함한 모든 부대는 특수임무부대장 지휘 하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진하라는 사단명령에 따라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후속부대가 차단당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날 행군하는 동안의 전투에서는 종대간에 항상 간격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종대간의 간격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목표인 하갈우리 활주로의 밝은 조명이 보이고 있었고,

전방으로부터는 중공군의 탄환이 쏟아져 오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전방만 주시한 채 장애물을 통과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도로가 차단되어 잔류부대 지휘관은 특수임무부대장과 통신을 하려고해도

무선이 불통이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후속부대가 차단당한 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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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부대를 통과시킨 다음 중공군은 차단된 후속부대에 대하여 소화기와 박격포사격을

맹렬히 퍼부어 도로상의 파괴된 차량 제거작업을 불가능하게 하여 전진을 계속 차단했다.

뒤에 잔류한 후속부대는 영국 코만도부대원 일부, 제31연대 B중대의 대부분,

그리고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사단 군수참모 보좌관인 아더 챠이데스타 중령이 이 가운데에서 최고 선임자였다.

그는 저지당한 차량종대에게 고토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퇴로도 이미 중공군에 의해 차단되어 이제는 전진도 철수도 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후속부대에 대하여 중공군은 먼저 동쪽 언덕으로부터

사격을 가해왔다. 어두워져서 공중지원이 불가능해지자 중공군은 도로에 더욱 근접하여

기관총과 박격포탄 사격을 하였고 때때로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하면서

선두의 찦차와트럭 3대를 파괴했으나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미군은 도로 옆의 도랑과 철도의 둑, 그리고 트럭 위에서 무리를 지어 응전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서 종대를 토막내어 분리시키려는 중공군의 의도대로

자연히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제일 북쪽에는 존 맥롤린(John Mclauglin - 미 제10군단 작전부장보좌관 겸

해병사단 연락장교)소령이 지휘하는 130~140명의 그룹으로서 이들은

미 육군 제31연대 B중대장과 대원 약간명, 해병사단의 헌병들,

수명의 영국 코만도대원, 해병사단의 사령부요원과 관리요원 등

잡다한 부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챠이데스타 중령도 여기에 끼어 있었다.

 

이 집단으로부터 약 300m 남쪽에는 육군 2개 소대 병력이 수명의 해병대와 같이

도랑 속에서 제2의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으며,

그로부터 남쪽으로 약 30m 에는 사단 공보장교 마이클 카프라로 대위 이하

약 16명이 세 번째의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100m 남쪽에는 사단 수송장교인 헨리 실리(Henry Seeley)소령이

수명의 해병대원을 지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들은 종대의 후미에있는 제1전차대대 B중대의 전차가 북진하여 구원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차중대도 중공군의 공격 때문에 3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고토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룹의 전차와 트럭은 별다른 피해없이

밤9시가 지나서 고토리 방어진지로 돌아가 버렸다.

 

가운데 있던 그룹은 트럭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트럭과 인명에 많은 피해를 받았으나,

새벽 2시 30분에는 겨우 고토리로 되돌아갈 수가 있었다.

가장 북쪽 그룹은 전차 1개 소대로 되어있었는데 실리 소령의 그룹으로부터

약 800m 남쪽에 전차진지를 편성하고 고토리의 포병으로부터 저지사격을 지원받고

있다가 날이 새자마자 이 부대도 고토리로 철수해 버렸다.

그러므로 차단당한 부대로서는 왜 전차가 구원하러 오지 않는가를 알 수 없었다.

이들 부대는 장비와 무기도 부족하였으며 가장 북쪽에 있는 맥롤린 소령의 그룹에는

 75mm무반동총 1정과 칼빈소총, 수류탄뿐이었다.

그러나 통신병, 행정병, 취사병, 타자병, 운전병, 헌병 등은 부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치 서부활극의 포장마차부대처럼 방어에 진력했다.

맥롤린 소령은 다른 그룹과 연락을 취하려고 척후병을 남쪽에 파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날이 밝을 때까지 방어진지를 지탱하여

공중지원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세사람이 짚차에 올라타고 고토리로 달려가 보려고 했으나 길을 막아선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은 기관총을 앞으로 추진하여 도로 양측의 도랑에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상자는 점점 더 증가했다. 75mm무반동총은 파괴되고

새벽2시경에는 수류탄도 바닥이 났다. 탄약도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한발 한발 신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벽4시 30분경, 중공군은 포로가 된 한명의 미군 중사를 동반하고는 항복을 권하려

맥롤린 소령을 찾아왔다. 맥롤린 소령은 중공군에게 "항복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중공군은 좌우로 머리를 흔들고는 중상자를 고토리로 보내는 것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해왔다. 맥롤린 소령은 항공지원이 가능한 여명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교섭을 질질 끌려고 했다.

부상당한 챠이데스타 중령의 의견을 듣고 다시 남쪽 그룹의 실리 소령에게도 연락하여

의견을 물었다. 사단 수송장교인 실리 소령은 자신의 그룹엔 중상자도 없고 어느정도

탄약이 남아있으니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맥롤린 소령은 전령을 보내어

" 부상자를 치료해야할 시간이 필요하며 아침 6시 30분에 항복하겠다"고 전했지만

중공군은 맥롤린이 시간을 끌려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탄약도 떨어지고 부상자가 속출했던 미군으로서는 사실상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했는데, 약속과는 달리 무장을 해제시키기 시작한

중공군은 중상자들을 고토리로 후송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전투중지 명령이 떨어지자 중공군은 트럭에 올라타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해병, 코만도, 육군 그룹으로 나누어 포로들을 어디론가 행진시키려했는데

이 틈을 타 몰래 탈출한 미군도 있었다.

 

중공군이 트럭의 전리품 챙기기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실리 소령은 자신의 그룹을

인솔해서 약간의 부상자를 데리고, 서쪽 방향으로 탈출하여 장진강을 건너 산을 타고

고토리로 향했다. 부상자를 대동했기 때문에 전진속도가느려 추격해 오는 중공군과

교전하면서 5시간 후에야 천신만고 끝에 고토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30일에는 개별적으로 탈출해서 나온 미군과 영국 코만도부대 대원이

고토리와 하갈우리로 계속해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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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자를 트럭에 싣지못하도록했던 중공군은, 경상자는 포로로 데려가고

중상자는 도로변의 민가에 두고 갔다. 주민들은 이들 부상자에게 몰래 물과 식량,

그리고 모포를 제공해 주고 간호까지 해 주었으며 며칠 후 미군이 철수하여

이 지점을 통과할 때 소속부대로 보내 주었다.

 

차단되어 포위되었던 후속부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소수의 인원은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나 상당한 인원이 어둠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와

고토리로 탈출하여 왔다.

 

한편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지휘하에 선두에 서서 전진중이던 전차대대 D중대,

보병G중대 그리고 제41코만도부대의 주력은 후속부대가 포윈된 것도 모르고

적탄을 뚫고 전진하였으나, 하갈우리 남방 2km지점에서 다시 저지되어

방어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전차 1대가 파손되었고 차량 수대가 불타 버렸으며,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또다시

부상을 당하여 G중대장 칼 시터 대위가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시터 대위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29일 저녁7시 15분 하갈우리에 도착하여 리지 중령 앞에 나타났다.

드라이스델 특수임무부대는 병력 중 대략 150명이 전사했고

150명 정도가 부상이나 포로가 되었다.

141대의 차량 중 74대가 파괴되는 등 부대의 3분의 1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불과 2개 중대의 보병밖에 없었던 하갈우리에 약 300명의 보병과 100명의 전차병이

증강됨으로서 진지를 방어하는 지휘관인 리지 중령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리지 중령은 G중대와 영국 제41코만도부대를 우선 하갈우리방어진지의 예비병력으로

지속시키기로했다. 이 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함으로서 그 후 사단작전에 필요한

하갈우리기지를 확보하는데 크게 공헌한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고토리로 돌아간 약 300명은 그 후 고토리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

시터 대위는 이 전공으로 명예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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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를 하갈우리로 이끈 공로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제1해병연대 3대대 G중대장 칼 시터 (Carl Sitter)대위

 

 

드라이스데일 부대의 피해 현황은 아래와 같다.

부대                          병력     전사및실종      전상     피해합계     피해율     차량     차량손실     전차    전차손실

 

영국 해병

제41코만도                235           18               43           61           26.0           

 

제1해병연대

3대대 G중대               205            8                40           48           23.4

 

미육군 제31연대

B중대                        190          100               19         119          62.6         22         22

 

제1해병사단
사령부대대 파견대       62            25               25            50         80.6         17         17

 

해병 제1통신대대

파견대                          8              4                 2              6          75.0          4

 

해병 수송대대             12              2                 3              5          41.7          22          5

 

해병 제1전차대대
본부중대 파견대          18              5                 6            11          61.1          31        30

 

해병 제1전차대대
B중대(1개소대감편)    86              0                12           12          13.9          23                        12 

 

해병 제5연대 대전차
중대 전차소대             29              0                  1             1            3.4                                       5          1?

 

해병 제1 전차대대
D중대(1개소대감편)    77              0                  8             8          10.4          22           1           12

 

합  계                        922           162               159         321        34.8        141          75          29         1?

 

 

29일에는 드라이스데일부대가 하갈우리 남쪽에서 교전한 것 외에 큰 전투는 없었으며,

미군이 야간에 박격포와 전투기로 중공군의 예상 집결지에 폭격과 포격을 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고 중공군 제58, 제59사단의 일부가

다음날인 30일의 하갈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단본부에는 중공군이 하갈우리 방어선의 남서쪽으로

대규모 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첩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갈우리의 C-47 수송기용 활주로는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30일의 전투는 미군의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드라이스데일부대의 일부로서

하갈우리에 도착한 G중대는 하갈우리지역의 지휘관인 리지 중령의 명령에 의하여

오전 8시에 소대와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동부고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의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고 능선은 여전히 중공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G 중대는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부근의 요충지를 확보하였고,

동부고지의 미군을 증원할 수 있는 태세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밤이되자 중공군의 행동은 활발해졌다.

0시에 남쪽의 I중대정면과 동부고지의 G중대 정면으로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가해왔다.

I중대는 비행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형은 유리한 편이 아니었으나

방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 구성으로 화력계획을 수립함으로서

하갈우리지역에서는 가장 잘 준비된 진지였다. 바로 이 정면으로 중공군은

밤11시 30분 경부터 탐색 공격을 실시하고 이어서 0시에 본격적인 공격으로 전환했다.

1파, 2파, 3파...... 순으로 미군의 조밀한 탄막사격과 가공할 공격파괴사격을 무릅쓰고

많은 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을 감행하여 그 일부가 I중대의 진지로 돌입했으나

결국 격퇴되고 말았다. I중대의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10명이었는 데 비해

중공군은 전사자만 해도 500~700명을 헤아렸다.

 

한편 0시경 동부고지에서는 중공군이 박격포 지원하에 경사면 위로부터 밑을 향하여

돌격을 개시하면서 G중대를 압박하고 중대일부를 경사면으로부터 밀어냈다.

중공군 포탄이 집적된 연료 드럼통에 명중되어 부근 일대는 대낮처럼 밝았다.

 G중대장은 부상을 당하면서도 지휘를 계속했다.

하갈우리 방어 대대장인 리지 중령은 새벽에 영국 코만도부대를 동부고지에 투입하여

역습을 실시했다. 이 결과, 12월 1일 아침 9시경에는 전날의 진지를 회복했으나

G중대는 사상자가 약 60명에 달했다.

 

이날 밤의 중공군은 28일 밤에 하갈우리에 가해진 제1차 공격에 비하여 병력도 많았고

작전도 잘 계획되어 있었으나, 그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에는 불충분 하였다. 그리고 주공은 지난번과 같이 가장 견고하게 방어된

I중대정면으로 지향되었다. 중공군은 하루 동안이나 동부고지의 감제지점을 점령하고

미군기지의 상황을 충분히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같은 정면에

주공격병력을 투입하여 실패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유리한 상황하에서 시작된 동부고지의 조공은 어느,정도 진전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미군은 이 정면에 미리 보병G중대를 배치했고, 예비로서

정예의 영국 해병 제41코만도부대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중공 제58사단은 전후 두 번의 공격에 의해 확인된 전사자만 1,500명이라는 많은

인적 손실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귀중한 탄약을 대량으로 소모하고 말았다.

하갈우리에서의 리지대대의 손실도 전사 33명, 부상 270명, 행방불명 2명, 기타 10명 등

총 315명으로, 이것은 11월 28일부터 12월 1일 사이에 발생한 것이며

방어진지 내의 기타 부대의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하갈우리의 미군이 추정한 중공군 사상자는 다음과 같다

(1950년 11월 28일부터 12월 5일 사이).

중공 제58사단 172연대 - 3300명

중공 제58사단 173연대 - 1750명

중공 제58사단 174연대 - 1750명

중공 제59사단 176연대 - 1750명

(기타 연대는 식별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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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병 제41코만도 대원들

 

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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