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11B개발이 순조롭지 못하자 실패를 예감하여 그 대안을 모색하던 그루만 사는
F-111의 엔진, 전자시스템, 무기 기술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함대방공 전투기(FADF-Fleet Air Defense Fighter)를 구상하였으며
1967년10월, 303-60이라는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내었다.
이 안은 함대방공은 물론이고 요격임무, 제공전투임무를 비롯한
비행대 호위임무까지도 수행할 수 있는, 그야말로 해군이 원했던
모든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해군 전투연구 부서 2(Navy Fighter Study Group II)는
1968년2월부터 5월까지 그루만으로부터 제안된 303 안을 검토하였고,
그 결과로 그루만이 제시한 303-60안 대로만 제작된다면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우수한 기체일 것으로 평가하였다.
연구부서는 303안이 함대방공외에 호위, 제공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가졌고, 특히 2기의 엔진을 탑재하여 4천피트 상공에서 2분 만에
마하0.8에서 1.8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루만의 구상에 큰 기대를 가지게되었다.
이때, LTV(ling Temco Vought)사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작업을 실행하여
해군에게 자신들의 신형 전투기를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다.
LTV사는 다양한 미사일들을 장착할 수 있는 기체의 모형을 제작하여
달라스의 해군항공기지에서 테스트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LTV 사가 해군에 제시한 차세대 함대방공전투기 목업
F-111A 아드바크 공군형
F-111B 해군형. 중량 문제 때문에 개발이 중단되고말았다
애초부터 F-111B아드바크가 실패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던 해군은
1968년5월,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국방부에 상신하였고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이로서 해군형 F-111B의 개발은 취소되었다.
이어 1968년6월18일, 해군은 신형 함상전투기 개발계획(VFX)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미 그루만 사의 VFX안을 수용할 생각이었으나 공평성을위해
여러회사의 안을받아 심사하기로 결정했다.
VFX계획에는 그루만을 비롯하여 제너럴 다이내믹스, LTV, 맥도넬,
노스 아메리칸 등 모두 5개 회사가 참여하여 경쟁에 들어갔다.
해군은 F-111B와같은 병렬 복좌형이아닌 2인승일것, 2개의 엔진,
F-111B용으로 이미 제작된 강력한 레이더(휴즈 AN/AWG-9)를 이용한
무기시스템의 구성을 요구했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공대공 미사일(AIM-7 스패로우 Ill, AIM-9 사이드와인더, AIM-54 피닉스)운용과
제너럴 일랙트릭 사의 M61A1 20mm 발칸포도 해군 제안요구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행콕 클래스 항모에서 운용할 수 있어야하며
항모로부터 100~200마일 떨어진 곳까지 (2시간)작전할 수 있을것,
최대14500파운드 까지의 폭장 능력, 최고 속도 마하2.2가 요구 되었다.
1968년9월25일, 해군은 심사와 평가 규정을 확립한 후,
주 계약자 최종 선정 방침들을 제작사에게 설명하였고
10월1일, 5개 경쟁사들은 모두 해군의 심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평가를 거쳐 3개의 회사가 탈락되고
12월17일, 맥도넬과 그루만 2개 회사로 압축되었다가
1969년1월15일, TF30엔진을 사용하는 VFX-1안에 이어
공군의 F-X (F-15)기에 사용될 통합 엔진인
ATE(Advanced Technology Engines)엔진을 사용하는
VFX-2안을 채택하기로 합의하여 그루만 사가 주 계약자로서 최종 선정되었다.
이미 양산을 서두르기로 마음먹은 해군은 F-111에서 실속과 출력부족등으로
불만족 스러웠던 플랫&휘트니 TF30엔진을 탑재한 초도기들을 제작한 다음,
F-15에 사용되는 엔진이 해군형으로의 개량이 완료되면
F-14B, C 시리즈로 이어가며 양산한다는 계획이었다.
1969년2월3일, 해군과 그루만 사는
우선 6기의 원형기생산 (RDT&E-research, development, testand evaluation)계약과
추가분 6기, 총12기의 F-14A톰캣 발전형 생산계약을 체결함과 아울러
총 26기의 초도기 발주도 병행 되었다.
원형기 12대는 서로다른 여러종류의 테스트를 각각 받게될 계획이었다.
그루만 사는 해군이 테스트와 평가용 기체를 제외하고
모두 463기의 발주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 도입분을 고려하면 총 700기 이상이 생산될 것으로 기대했다.
F-14 톰캣의 주 계약자가된 그루만 사는 알루미늄과 박판을 이용한
모형 엔진 테스트 장치인 EMMA (Engineering Mock-up and Manufacturing Aid)를
가동하여 모형엔진을 재현해냈는데 테스트 결과 TF30엔진을 능가한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또한 비행조종장치와 연료, 유압시스템 테스트도 실시되었다.
그루만 사는 애초 303안을 계획하면서 고정 후퇴익과 가변익 모두를 고려했으나
고정 후퇴익을 채택할 경우 기체중량증가와 대형화가 될 것을 우려했으며,
항공모함의 제한된 공간에 영향을 받는 함재기이기 때문에 가변익을 채택하면
주익을 접을 필요가없어 결국 F-111처럼 가변익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컴퓨터를 이용하여 6G의 극한 기동 때 뿐만 아니라 모든 비행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가장 적당한 후퇴각을 신속하게 제공해주어
경쾌한 기동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루만 사는 가변익기인 F-111B와 F-14톰캣을 제작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가변익 기술을 습득해놓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개발했던 P.1101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1951년 6월 시험비행했던 벨 X-5기에 이어 항모 이 착함 능력 향상을위하여
미국 최초로 가변익을 채택한 XF10F-1재규어를 제작하면서 얻게된
기술적 경험들을 F-111과 F-14를 제작하는 동안 유용하게 사용하게되는 것이다
Me P.1101
벨 X-5
XF10F-1재규어
이러한 기술적 바탕으로 F-111의 가변날개 가동부분이 D6AC 강철제 볼트등으로
제작된 것과달리 그루만은 100만 달러를 들여 독자적으로 개발한
6만 볼트 전자 빔 용접기를 사용하여 진공실에서 제작하게된다.
F-14A의 가변날개 제작은 기계로가공된 6A1-4V 티타늄 합금 재질의 33개 부품이
사용되었으며 용접 가스가 접합부분을 오염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공상태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자사의 303프로그램을 적용하여 세계 최초로 카본 복합제를 사용한
수평안전판을 채택하게된다. 이렇게 그루만 사는 F-14A에 티타늄 합금과
신소재를 사용함으로서 내구성과 중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마틴- 베이커 GRU-7A 로켓추진 사출좌석
F-14A 톰캣 후방석
GRU-7A 로켓추진 사출좌석은
마틴 베이커사와 해군이 캘리포니아 엘 센트로의 해군 항공 부서에서
F-106B 델타 다트와 더글라스 A-3 스카이워리어를 사용하여
22회의 공동 테스트를 실행했다. 1969년12월, 사출좌석을 포함한
모든 조종실 시스템들이 차이나 레이크의 해군 무기 센터로 옮겨져
로켓추진 썰매에 의해 100에서600노트의 고속으로 사출되어 신뢰성 테스트를 받았다.
드디어 부분적으로 제작되어 트럭으로 뉴욕 칼버튼의 그루만 사 공장까지
운반된 최초의 1번 원형기(제조번호-157980)가
지반 진동 테스트, 연료 추진 계통의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처녀비행 직전의 F-14 원형1호기(제조번호-157980). 칼버튼
원형 1호기의 택싱 테스트는
그루만 수석 테스트 파일럿 로버트 스미드와 빌 밀러에의해 1970년12월14일부터
테스트가 진행되었으며 1호기는 그 처녀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1970년12월30일,
이날 두 조종사의 임무는 랜딩 기어를 내린 채로 비행하면서
안정성과 제어 평가를 하는 것이었다. 이륙한 지 약 25분 후
추적 항공기로부터 기체에서 연기가 보인다는 통고를받은 F-14 테스트 파일럿 밀러는
1차 유압계통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고했고, 활주로로부터 6km거리에서
랜딩기어를 내리고 착륙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2차 비행 유압계통도 고장이 나자 기체는 자동으로 비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이 비상 시스템은 소형 전기식 펌프로 유압장치를 작동시켜
오직 방향타를 안정시켜주는 것이었으나 이 마저도 고장을 일으켰다.
조종사 밀러는 F-14를 어떻게든 착륙시켜보려 노력했으나 기체는 전혀
제어되지가 않았다. 두 조종사는 칼버튼 활주로로부터 약 1.6km지점까지
도달하였으나 결국 비상탈출을 선택해야만했다.
이 사고로 긴급히 탈출한 두 조종사는 무사했으나
원형 1호기는 탄생과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해군항공사고 조사반이 티타늄으로 제작된 유압라인의 문제점을 찾아내었으나
이 사고는 F-14 양산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뒤 이어 1971년5월24일 실시된 원형 2호기의 첫 비행은 58분 동안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이 비행도 1호기와 마찬가지로
테스트 파일럿 로버트 스미드와 밀러가 맡았다.
가변익 가동 테스트 중인 F-14A 원형 2호기(제조번호- 157981)
F-14A 톰캣 원형 2호기의 처녀비행(1971년5월24일)
비행전환 훈련 중인 VF-124 소속 F-14A 톰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