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미 해병 수색대 포스리컨/레이더스 ...1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8.07 20: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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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특수부대 포스리컨 (미 해병 수색대) 1

                               

 

 

2차대전의 미 해병 수색대

 

 

인류의오랜 전쟁 역사 속에서 그방법과 수단은 달랐을지언정  적을 알고자하는

동일한 목적하에 수색 정찰(reconnaissance)은 예로부터 수행되어져왔다.

그러나 미 해병 수색대는 그리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국 해병대는 태평양전선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과달카날에서  부겐빌, 타라와, 뉴 브리테인, 사이판, 괌, 티니안, 펠레류, 이오지마,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일본을향한 징검다리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주역이 해병대였다.

 

2차대전이 종결되기까지 해병대는 6개의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다섯 개의 항공단을 포함하여 총 48만5천1백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8만7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동안 조직되었던 해병대 내의 여러 특수한 부대들,

예를들면 기지방어부대, 레이더스를 포함한 특공대, 해병공수부대등 여러조직들은

2차대전이 끝나자 대부분 해산되었으나 상륙수색 부대는 오늘날까지도

해병대에 온전히 남아있게된다.

 

상륙부대는 상륙지점 해안의 정보를 얻고자하여 소규모의 정찰조를 먼저 투입해야했다.

정찰조는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편성되었고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였다.

작은 보트를 이용하거나 혹은 수영을해야했으며 오직 소화기만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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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군의 상륙정(LCPR)에 승선하여 남태평양에서 작전 중인 제1해병사단 수색대원들.

수색대에는 공수대대와 레이더스 대대 병사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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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제1해병사단 수색중대의 수색정찰 훈련.(노스캐롤라이나)

이것은 첫 번째로 조직된 수색중대의 M3A1 정찰장갑차를 이용한 수색정찰훈련이다.

 

 

처음 2개의 해병사단이 창설되고난 뒤 사단은 수색정찰 중대를 가지게

되었으며 장교7명과 132명의 사병으로 구성되었었다.

1941년 3월에 조직된 수색정찰중대(중대장  제임스 존스 대위-James L. Jones)

의 경우 중대본부 휘하에 3개의 소대를 두고 있었다.

수색중대 병사들은 걷거나 또는 오토바이와 M3장갑차를 타고

정찰하도록 훈련 받았다. 그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어서는 고무보트를 지급받았고

일명 "바나나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밀림에서의 전투를 경험하며 

수색정찰 기술들을 습득하게된다.

고무보트는 수색정찰에 널리 사용되었고, M3A1 장갑차는 1942년까지

정찰용 차량으로 쓰였으나 그후 윌리스 짚(JEEP)차로 교체된다.

초창기의 수색대병사들은 수색소년(Recon Boys)들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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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ing Craft Personnel-LCP에서 뛰어내리는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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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레이더스 대대 병사들의 상륙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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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수색정찰 중대원들이 10인승 고무보트로 작전 중

 

병사들은 수색과 정찰의 노하우를 얻기까지 많은 피를 흘려야했다.

과달카날에서는 상륙수색정찰활동이 숙련되지 못했던 까닭에

노련한 일본군의 매복과 습격에걸려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는동안 특수임무에관한 교리와 장비들은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었다.

 

 

1942년8월, 해군은 플로리다 주 포트 피에르스에 수색정찰과 습격학교

(Scout & Raider School))를 만들어 병사들에게 특수교육들을 실시했다.

교육은 주로 매복과 정찰 그리고 습격기술의 숙달이 주 목적이었다.

3명또는 4명이 한개의 팀으로 구성되고 총기는 M1소총, 톰슨 경기관총

또는 M-1918 자동소총으로 무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러 팀이 모여 한 개의 분대를 이루게되는데

분대는 분대장을 비롯하여 총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한척의 고무보트에 탑승할 수 있는 최대인원인 것이다.

 

얼마 지나지않아 12인승 고무보트가 나오게되지만 당시에는

주로 10인승이 분대단위용으로 사용되었다.

분대보다 더작은 규모로 쪼개져 각자 임무를 수행하기도했지만

그 기본단위는 4명이 한팀을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학교를 졸업한뒤 이렇게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된 수색정찰팀들은

부겐빌 작전에서 아주 성공적인 성과를 올리게된다.

 

수색대는 잘알려지지 않은 부대였으나

해병 특수부대인 레이더스는 태평양전쟁 내내 그 명성을 크게 떨친 부대였다.

영국의 코만도를 보고 감명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해병대에

레이더스 라는 특수부대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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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레이더스(Marine Raiders) 2개 대대는 1943년11월

부겐빌 침공작전에 앞서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2000명의 레이더스 병사들은 상륙하기가 아주 어려운 지점을 택해 기습했다.

일본군은 지세가 험악한 토로키나 곶으로 미군이 상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경계를 허술히 하고 있었다가 기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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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레이더스의 유격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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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스의 상륙기습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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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키나의 진흙길을따라 부겐빌 섬 내륙으로 전진해들어가는 제2레이더스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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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데빌 독으로 불리우는 군견정찰대.

도베르만과 독일산 셰퍼드(앞의 2마리)들은 일본군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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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저격병이 공격을 가하자

노획한 일본군 37미리포로 숲 속의 저격병을 공격하고 있는 레이더스와 공수대대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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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상륙한 레이더스.

오른쪽끝에 망원렌즈를 장착한 스프링필드 소총을 든 해병 스나이퍼가 보인다

 

 

 

해병 레이더스는 타라와 환초 상륙작전이 실시되기전에

이미 인근 매킨환초에대한 수색정찰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매킨환초에는 약 300명의 일본군 전투병력이 주둔했고

미육군 제27사단 165연대 병력 6500명이 공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육군은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하지 않아 이 작은 섬을 점령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또한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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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환초 수색정찰에 투입된 레이더스 특공부대원들이 잠수함으로 귀환했다(진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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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스를 이끌고 매킨 환초 수색정찰을 수행한 후  미 잠수함 노틸러스 호에

승선한(왼쪽) 에번즈 칼슨(Evans F. Carlson)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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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레이더스 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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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미해병대 상륙작전에 뼈아픈 교훈을 안겨주게되는 길버트제도 타라와 환초에서의

피비린내나는 전투에서 수색중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제2해병사단은 환초의 베티오 섬을 공격했다.

제2수색중대는 보병과함께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여러 섬들에

수색정찰을 강행하여 일본군을 습격했다. 

그결과로 일본군이 다른 곳으로 병력을 증파하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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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

이 한줌의 작은 섬을 점령하기위해 해병대는 3일 이상을 싸워야했다.

물론 엄청난 희생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점령할 수 있었다.

한시간에 25m전진이라는 기록을 낳은 타라와 환초전투.

12000명 중 1056명이 전사하고 2300명이 부상당했다.

 

타라와 환초 전투 이후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타라와에서 날아온 비극적인 소식은 미국전역을 뒤 흔들었다.

온갖 비난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해병대는 타라와 희생의 교훈을 받아들여

더 많은 상륙주정과 암 트랙을 생산해냈고, 장갑을 증가하여

방어력과 공격력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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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환초지대 해안에 널려진 미 해병대원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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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아래 부패한 시신들이 뿜어내는 악취가 섬을 뒤덮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가스 마스크를 착용한 채 시신을 옮기는 해병대원.

 

 

 

1942년, 남태평양 전투의 출발점이되었던 과달카날전투에서

해병대는 일본군 저격병의 활약에 깜짝놀랐다.

정글 속에서 날아오는 총탄은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하였고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일본군은 동굴 속이나 울창한 정글의 나무 위에 교묘히 몸을 숨기고

정확하게 미군을 저격했다.

 

저격병에 혼이난 미군들은 정글로 들어가기 전에 아예 엄청난 양의

기관총탄으로 나무 위를 청소해 버리고서야 겨우 전진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에 해병대도 저격수를 급조하기로 결정하여

윌리엄 왈링(William J.Whaling)대령의 지휘 하에 저격병 양성이 시작되었다.

저격총기로서는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에 망원렌즈를 장착하여 사용하기로 결정되었고

1943년 초까지 34명의 정찰저격수(scout-sniper)소대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3개의 분대단위로 나뉘어져 각 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저격수와 관측병이 한팀이되어 활약했다.

당시 미군은 저격을 아주 비겁한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저격수 양성에 그리 많은 투자를 하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선을 누비며 활약했던 이들 저격수들은 전쟁이 끝나자

보잘것없는 조직으로서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했을 뿐 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다시 맹활약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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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정찰 스나이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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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903 스프링필드 저격소총으로 스나이퍼 교육을 받고 있는 해병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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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정찰 저격소대원들   marine scout-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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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저격수가 위장된 참호에서 소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부겐빌.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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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5월,

제5해병사단은 5명의 장교와 122명의 사병으로 새롭게 편성된

수색중대들을 몇개의 대대에 배속시켜 전투에 참여시켰다.

여기에는 제법 많은 수의 공수연대와 레이더스 연대병력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수색정찰 전술학과 장비들이 한층 더 향상되어졌다.

 

또한 수색중대는 사단직할 중대로서 그 위상이 승격되었으며

짚차와 고무보트등을 이용한 수색정찰이외에도 사단 지휘소방어를

위한 독자적인 소총중대로서의 역할도 병행했다.

 

사이판 전투에서 제2해병수색대원들은 사단장 벙커를 향해

바로 코앞까지 돌진해오던 일본군 전차를 격파시켰으며,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사단지휘소 후방을 습격하려던

일본군에 맞서 성공적인 방어 전투를 벌이기도했다.

이렇게 수색중대는 사단지휘본부를 방어하는 근위병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이판과 티니안 전투에서는 상륙작전에 앞서 UDT와 함께 해안수색과

수로 측량을 위해 야간에 은밀히 침투하였다.

이오지마에서는 제5해병사단의 수색대대가 UDT와 함께 작전에  참여했으며

오키나와에서는 대대병력이 연대병력 만큼의 전투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6개의 직할 수색중대와 1개의 수색대대가 남아있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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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공수대대원

 

 

 

다음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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