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병 수색대 포스리컨/레이더스 ....2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8.15 1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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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당시... 미해병 저격수

 

한국전쟁의 미 해병 수색대 

 

2차대전 종전 후 해병대에게는 고난이 찾아온다.

해병대 전력은 축소되었고 궁극적으로는 해병대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려했던 것이다.

해병대 사령부는 의회와 외롭게 싸웠다.

한국 해병대도 전두환 대통령시절 똑같은 고난을 겪은일이 있었지만 그 역경을 이겨냈다.

*

해군과 해병대는 해군장관의 명령계통에 속해있었으나 합법적으로 이 두 부대는

엄연히 각기 독립된 부대였다.

태평양 전쟁동안 명령절차의 단순화 때문에 해병대는 FMF(사단과 비행대포함)을

해군의 관리 하에 두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해군은 전쟁이 끝나고도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했다.

트루만 행정부는 해병대에게 있어서 악몽의 시대였다.

1946년 의회는 이미 축소된 해병대를 해군에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서서히 없애려했고

1946년 5월 벤드그리프 장군은 의회에서 격렬한 연설로 이에 맞서 싸웠다.

메리트 엔더슨 장군은 군복을벗고 민간인으로서 맞서 싸워 결국 1947년 국가안전보장법

으로서 해병대를 승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죤슨 국방장관이 취임하여 해병대의 예산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해병대의 요구는 일절무시하고 공개적으로 해병대 축소를 천명하게된다.

공개적이며 악의적으로 해병대의 합병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다녔다.

해병대 창설 기념행사는 금지되었고, 장군의 관용자동차 마저도 압수했다.

해병은 물론 민간인들은 그때부터 멋진 해병대 의장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주변의 철회 요구에도 죤슨은 요지부동으로 1951년까지 6개대대정도 규모의

병력 만을 남길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가 해병대를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결국 죤슨은 해병대 축소라는 자신의 생각과는 정 반대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하여 해병대가 오히려 급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리자 맥아더는 인천상륙을 결심했다.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급격한 조수간만의 차와 좁은 수로, 높은 방파제와 높은파도,

곳곳에 이빨을 드러낸 암초들을 극복해내야했다.

이같은 악조건 때문에 심한 반대에 직면하지만 맥아더는

그 특유의 뚝심으로 반대파들을 설득해나갔다.

고위층의 반대를 무릎쓰고 반격의 열쇠를 인천으로 결정한

맥아더 장군에게는 태평양 전쟁의 신화를 일궈낸 해병대가 필요했다.

 

제1해병사단 소속 케네스 휴턴 대위 지휘하의 수색중대가 한국에 파병되었다.

수색대는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UDT와 함께 상륙지점을 수색정찰했다.

그리고 거의 200마일에 달하는 해안선 내륙의 교량과 터널등 주요시설물을 파괴했는데

중대병력으로 이 막중한 임무를 소화해낸다는것은 무리였다.

수색대는 영국 해병 제41특공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했다.

 

한국으로 파병된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확고하게 입증해보여줬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수색중대는 1950년 9월 19일 저녁에 한강을 건너야했다.

중대는 수륙양용장갑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으나

그 중에서 13명은 수영으로 횡단하여 강건너를 수색정찰했다.

서울로 들어가는동안 수색중대는 공격부대의 측면에서 패잔병과 저격수들을

처리했으며 다시 원산항에서 수색정찰 작전을 마치고 북진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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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수색중대장 케네스 휴턴대위(좌)와 선임하사 어네스트 데피죠.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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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병사(중앙은 한국군으로 보인다)

M-1951(좌), M-1952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스텐기관총으로 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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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T팀의 해상작전. 1950년10월. 원산항 ..해병 수색대는 UDT와함께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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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더그리프  (Alexander. Vandergrift) 장군과 제1해병사단 패치.

 

과달카날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지휘했던 그는 메달 오브 아너를 수상하고

미군역사상 최초로 사단마크를 어깨에 달 수 있는 영광을 해병대에게 선사했다.

1945년 4월4일 대장으로 진급하여 미해병대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1947년12월31일 퇴역한다.

 

2차대전은 적을 무조건 항복시키거나 또는 완전히 패배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그러한 총력적인 전쟁이 너무 비싸게 먹히는 장사라는 생각을하게 되었다.

 

미의회는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해병대를 해군에 통합하려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해병대가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되자  벤더그리프 장군은 이에 맞서 싸웠고, 

과달카날과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패배시켰던 것처럼 결국 그들을 굴복시켜 해병대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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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해병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소장(좌) 과

맥아더의 수석 보좌관 아몬드(Edward M. Almond)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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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33분, 제5해병연대 제1대대 병력이 상륙했다.

해병들이 방파제를 오르고있는 모습.

맥아더는 기함 맥킨리에서 이 성공적인 상륙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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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9월20일. 제5해병연대의 LV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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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9월21일. 병력수송을위해 한강을 교차 도강하는 LVT3C와 LVT4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에게 가로막혀 버렀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해병대는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완전히 포위 당하고말았다.

제1해병사단은 눈보라를 헤치고 장진호에서 동해의 흥남으로 탈출해야했다.

포위망을 뚫는동안 수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수색중대는 전차대대와함께 후퇴하는 사단의 최후위를 엄호했다.

 

콜세어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대는 포위망을 힘겹게 뚫어 나갔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해병대가 중공군 제9병단(9CPV)소속 4개사단의 포위망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중장비의 대부분을 온전히 가지고 빠져나왔다는 점이다.

또한 무조건 도망친 것이아니라 반격을 가해 고난에 빠진 부대들을 구출하는등

악착같이 싸워 중공군 2만명 이상을 살상시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큰 타격을입은 중공군 제9병단은 만주로 철수해야만했다.

사실 중공군 제9병단은 대만상륙을위해 준비되었던 부대였으나 갑자기

한국전쟁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방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었다.

그래서 혹한 속에서 얼어죽은 병사들도 상당했다.

 

해병대의 영웅적인 전투가 귀중한 시간을 벌어 줌으로서 제10군단은

흥남철수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해병대는 장진호 포위망 안에서 약 4400에 달하는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를 낳는 피해를 당했다.

해병대는 불굴의 의지로 이 고난을 극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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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해병사단 전차대대의 M26A1퍼싱 전차( 원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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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기위해 혹한 속에서 사투를 벌였던 미 제1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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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세어의 폭격원호를 받으며 흥남으로 향하는 해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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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수색중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진격로를 수색정찰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884고지전투에는 헬리콥터를타고 적진을 습격하는 헬리본 강습경험을하게된다.

  

한국전쟁에서도 스나이퍼는 큰 활약을 하였다.

M1소총에 M80 씨리즈 망원렌즈를 장착했으며 특히 적외선 망원렌즈가 개발되어

스나이퍼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제1해병사단은 한국전쟁동안 스나이퍼를 양성하기위하여 스나이퍼 학교를

가장 활발하게 가동시킨 부대였다.

 

전쟁이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되어 밀집된 화력에 의존해야만 하는 전투 양상으로 변해버리자 

수색대의 정찰활동은 한정되고 고정전투에만 메달리게되는 애매한 상황에 놓여졌다.

수색대의 활약을 지켜보았던 해병대 지휘부는 수색대의 인원과 화력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된다.

118명의 수색중대 병력과 화력으로서는 사단규모의 작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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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근교에서의 제1해병 수색중대원들. 1952년.

 

 

 

1955년, 수색대는 사단의 최첨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2개의 직할중대를 비롯하여 모두 4개의 중대가 편성되었으며

아울러 1개의 예비 중대도 편성되었다.

 

그리고 잠수함침투팀, 수중폭파팀 및 기습상륙팀등을 구성했다.

또한 타군에 비견될만큼의 수준까지 향상시키기 위하여 기동화된

고무보트와 상륙정, 스쿠바장비, 헬리콥터등의 도입을 결정하게된다.

한국전쟁은 해병수색대 발전의 결정적 동기를 마련해 준 셈이 되었다.

 

그리하여 1957년. 냉전과 핵무기시대에 들어선 미소양국의 군사경쟁은

수색대의 전력증강에 더 탄력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해병대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군사상 처음으로 헬리콥터 기동부대를

대폭 증강시켰으며 태평양, 대서양(FMF-Fleet Marine Force)상륙군은

증강된 수색대를 편성했다.

편성은 14명의 장교와 149명의 병력이 본부, 지원, 상륙수색, 공수수색등의 부서로 세분화 되었다.

또한 신형 낙하산과 잠수장비, 보트와 기관총등 최신무기들을 도입하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다음해 뉴 해병대라는 작전개념에따라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사전에 침투 습격하고 사후에

더 정밀한 수색작전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정해 수색중대가 대대급으로 확대개편되어졌다.

 

이렇게 해병대는 특수한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헬리본의 잠재적 가치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병력의규모도 확대되어 장교가 29명, 사병은 491명으로 기존에비해

배 이상으로 대폭 증강되었다.

무기도 신형 기관총은 물론이고 박격포를 비롯하여 로켓런처까지도 장비하게 되었다.

미 해병 수색대는 그이전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급속한 성장을 맞이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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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제21대 사령관 랜돌프(Randolph McCall Pate)장군이

제2수색중대원들의 고무보트와 장비들을 둘러보고 있다.

1958년. 노스캐롤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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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선배격인 레이더스와 여러 특공대의 경험과 전통을 계승하였지만

현재는 과거와달리 전통적인 수색정찰과는 다른 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였다.

냉전시대의 국지적 분쟁과, 폭동에 맞서고 이것을 역이용하는 게릴라 전술학이

육군 레인저학교와 해병대에서 집중 연구되었다.

 

소련과 심각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미국은 세계최강의 국방력을 무기로

스스로 세계경찰 노릇을 하려들었다.

 

1958년7월

레바논의 질서회복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여단규모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비롯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때는 강력한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해 소련을 굴복 시켰다.

라오스와 아이티에도 미군을 파견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병대는 특수부대로서 수색중대를 변형시키려했다.

 

수색중대는 거의 동일한 임무를가진 6개의 소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소대는 다시 3개에서 4개의 팀으로 나누어지며 팀원은 14명으로 편성되었다.

 

직할 수색대대는 항공통제팀을 포함하여 32명의 장교와 483명의 사병들로

4개의 중대를 가지게 되었다.

대대소속의 소대는 중대소속의 소대보다 그 규모가 더커서

장교4명에 23명의 사병을가진 2개의 분대를 가지고 있었다.

 

수색대는 M3 SMG를 비롯하여 M14소총, M79유탄 발사기, M60기관총등으로 무장했다.

1965년, 수색대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상륙부대보다 먼저 들어가 자국민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서 수색소대는 야간탐색 임무를 맡아 헬리콥터를 이용한 작전을 완벽히 수행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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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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