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운명의 일본 구축함
-태평양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구축함 유키카제(雪風)
사람으로 치면 모진 목숨이라던가 기구한 팔자라던가 하는 말이
그런대로 적용 될 만한 군함이 있었다.
1940년도에 취역한 일본 구축함 유키카제(雪風)다.
일본 해군 구축함 유키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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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카제는 주인 격인 일본 군부가 일으킨 침략 전쟁에
끌려 나가 모든 주요 해전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갖은 힘들고
위험한 임무를 다했다.
동료들은 거의 태평양 해저로 사라졌지만 유키카제만이
이 가공할 미군들의 화력을 버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의 모진 목숨은 기막히게 계속된다.
장개석의 중국 해군에 넘겨져 20년의 타국을 위한 의무를 다하고
70년대에 그 힘들고 긴 생애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정도 쓰고 보니 뭐 쓰고 싶은 이야기는 다한 기분이다.
그래도 더 자세히 소개해보자.
유키카제 (雪風)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40년 1월 취역했다.
간단한 제원을 말한다.
총톤수 :2,490톤
속도; 35 노트
승무원: 240 명
무장 : 5인치 -130밀리- 포 6 문
유키카제는 전쟁 전에 취역한 82척의 구축함에서 유일하게
태평양 전쟁을 살아 남았다.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전쟁 도중 20여척의 구축함이 더 건조되어 일본은 이들
백여척의 구축함을 전쟁에 투입하였는데 다 격침되고 끝까지
가동상태로 남아있던 일본의 구축함은 불과 세 척 뿐이었다.
유키카제는 그 중에서도 일본 해군의 자랑 93식어뢰를 발사할
수있는 기능이 살아 있었던 유일한 구축함이었다.
유키카제는 가게로(陽炎)급이라는 일본 함급(艦級)으로서
당시로서는 최신예 구축함이었다.
가게로 급은 20여척이 취역했는데 물론 유키카제는
이 중에서 전쟁 중에 살아남은 유일한 구축함이다.
참고로 가게로는 1905년 동해에서 해전중에 중상을 입고
기함 스와로프호에서 내려서 구축함으로 갈아 타고 도주하던
러시아 발틱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를 다른 구축함
사나자미와 함께 나포했던 영국제 구축함이다.
가게로(陽炎) 구축함- 러일 전쟁 때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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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구축함은 아주 작아서 불과 수 백 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구축함이 확대를 계속해서 지금은 4,5천 톤이나 되게 커졌다.
가게로 급 유키카제를 보면 높은 함수(艦首)를 살린
일본 구축함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 열도를 둘러싼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타기 위해서
이런 모습을 했다고 한다.
유키카제는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와키다 키이치로(飛田健一) 중좌의 지휘아래 출동하여 필리핀 침공 작전에 참가한 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이 싸운 거의 모든 작전에 참가했다.
인도네시아 침공 작전, 미드웨이 해전, 산타 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해전,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해전, 마지막으로 오키나와에 특공 출전한
야마토의 텐고(天號)작전들이 유키카제가 참가했었던 작전들이거나
해전들이다.
유키카제는 주요 포화를 주고받은 주요 8회의 해전과 대소16회의
주요 작전을 몸을 다하여 다 해냈다.
주요 해전에서 유키카제의 같이 작전하던 동료함들이 격침되거나
대파되고 수십, 수 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비운을 겪었는데
유키카제는 상처 하나없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연합군측의 항공 학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없는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도 살아 남아 두번이나 라바울로 왕복하며 생존자를 수송했다.
1944년 10월 레이테 만의 사마르 섬 해전에서 적의 호위 항모부대를
기습한 일본 중앙 기동부대의 호위함으로 참가해서 홀로 반격
나온 미 구축함 존스톤을 격침시킨 일본 구축함대의
한 척이기도했다.
존스톤의 활약상은 이미 4월에 소개했었다.
영웅 에반스 함장을 클릭 해보시기 바람
특이한 출동으로 6 만톤 급 전함 야마토와 동급으로
건조중에 항공모함으로 변경해서 진수한 시나노가 시험 항해 때
호위함으로 따라나섰다가 시나노가 미 잠수함에 격침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요 작전 사이 사이 보급 일본 해군 보급 부대의
호위 임무를 했다.
미군 항공 공격을 받은 것도 과장해서 말한다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사이 유키가제를 지휘한 함장이 다섯 명으로서 항복 때는
고에우 게이치(古要 桂次)중좌가 함장이었다.
유명한 전함 야마토가 출격 했을 때 유키카제도 호위함으로서
최후의 출동을 했었다.
유키카제같이 해전에 여덟 번이나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유키카제와
같이 불사조라는 별명을 받은 하라 다메이치 (原 爲一)대좌라는
유명한 구축함의 함장이 있었다.(그러나 유키카제의 함장은 아니었다)
하라 대좌는 일본 해군이 장기로 삼는 야간 어뢰공격의
최고 전문가였다.
울프독의 다른 글 ‘2700명의 자살 특공’에 잠깐 그를 소개한바있다.
유키카제처럼 8번의 주요 해전에 참가했었고 어뢰로 적함 세 척을
격침한 야간 공격의 최고 전문가였었고 최다 전투 경험자였다.
그런 그를 일본 해군에서는 유키카제와 같이 불사조라고 불렀다.
그는 마지막 전함 야마토의 출격 때 경순양함 야하기의
함장으로 유키카제와 함께 출격했었다.
미군기 400기가 공격한 이 마지막 출동 해전에서 그는
격침 당하여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경순양함 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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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위함 10척의 한 척으로 출동했던 그 많은 항공 공격에서
유키카제는 6척의 동료 구축함이 끔찍한 항공 공격으로 격침되는
지옥같은 상황에서 살아 돌아왔었다.
유키카제와 같이 불침의 행운을 누리던 다른 구축함이 있었다.
시구레 (時雨)라는 구축함이었다.
유키카제가 구레(吳)군항의 함대 소속이라면 시구레(時雨)는
사세보 항을 기지로 하는 함대의 구축함이었다.
시구레도 행운의 구축함이 있었지만 종전까지
버티지 못하고 1945년 1월 침몰하고 말았다.
유키카제의 행운의 함(强運艦)이라는 것이 유명해지면서
유키카제와 함께 동행해서 작전하고 싶어 하던 함대들도 많았었다
유키카제 작전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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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마토의 마지막 출동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일본 해군이 호위함으로서 출동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든다.
야마토의 출동에 호위에 나섰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구레 군항으로 돌아온 유키카제는 제해권과 제공권을 미군에게
전부 넘겨준 전황에서 더 이상 먼 바다로 출동을 하지 못하고
구레 군항 내외에서 대함 또는 대공 경비나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경비 활동 상황에서도 미 해군기 2기를 격추시켜
아직 유키카제가 건재 했슴을 알렸다.
헤아려 보면 유키카제의 눈앞에서 격침되어 사라진 일본
전함급들만 히에이, 공고, 시나노, 야마도등 네 척이나 되니
이 작은 구축함이 얼마나 자주 중요한 작전마다 참가했는지를
짐작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유키카제는 포탑등을 다 제거 당하고 해외의
병력과 일본 민간인들을 귀환시키는 운송 업무에 동원되었다.
유키카제는 46년 10월 2일 해상 수송작전에 나서 46년 12월 18일까지
중국, 라바울,포트모레스비, 라바울등에서 군병력과 민간인을
13,000명을 일본으로 수송해왔다
그 간 유키카제가 해외 일본인 수송을 위해서 항해한 거리가
38,000마일이나된다.
유키카제는 이 임무가 종료되자 1947년 7월 6일
전쟁 배상 물자로서 장개석의 자유중국 정부에게 양도되어서.
중국 샹하이로 보내졌다.
포탑을 제거하고 해외 수송 업무에 나선 유키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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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인도하기 전 미 해군이 검열했는데 승무원들은 일본 해군의
자부심을 끝까지 지키겠다며 있는 부속 없는 부속을 다 동원해서
배를 완벽하게 정비하고 깨끗이 청소해서 넘겨주었다
자유중국 해군에 인도하기 전의 유키카제.
위의 나팔같은 모양은 일본군이 전쟁말에 개발한 레이다 안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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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중국에 넘겨져서 샹하이에 온 유키카제는 함명을 탕안(丹陽)
으로 바꾸고 (DD-12) 재무장하여 자유 중국 해군에 취역하였다.
자유 중국 해군 장교들은 수 없는 사지에서도 살아남은 불사조
유키카제에 대해서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영접했다.
함명 탕얀(丹陽)은 표면적으로는 중국 대륙 남쪽에 있는 도시 이름을
따서 지었다지만 실은 유키카제가 속했던 가게로(丹陽)급에서
한 자(陽)를 따서 함의 명예를 계속 이어갔다는 뒤의 일화도 있다.
그리고 중국대륙 봉쇄 작전등의 여러 중국해군 작전에 참가하며
20여년의 세월을 자유 중국을 위해서 봉사하였다.
1064년 장개석 총통이 참석한 관함식(觀艦式)에 참가함으로서
세인의 눈길을 마지막으로 끌었다.
유키카제는 1967년 20년의 근무를 마치고 자유 중국 해군에서
퇴역하였다. 그 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소식에 접한 일본의 유키카제의 구 승무원들의 모임인 유키카제 카이(雪風會)가 중심이 되어 이의 반환을 중국 정부에 탄원하는
운동을 전개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장개석이 거부했다는 설도있고 돌려 주려했으나
태풍에 좌초되고 대파되어 항해 불능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설도있다.
유키카제는 1971년 고철로 해체되어 타국에서의 길고 기구한
일생을 끝냈다.
그 닻과 타륜만이 일본으로 반환되어 구 일본 해군 에다지마
(江田島)의 교육 전시관에 전시 되고 있다.
전후 세월이 흘러 일본의 미국 지배가 끝나고 일본의 해상 자위대가
탄생하고 신생 일본은 자체 구축함을 직접 건조했다.
하루카제-꼭 같은 모양의 자매함이 동생격의 유키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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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진수했던 두 구축함은 하루카제 (春風)급이라고 명명되었는데
두 자매함중의 한척 이름이 유키카제였다.
아직 대만의 자유중국 해군에서 있었던 유키카제는
자기 동생을 일본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해상 자위대의 두 함은 86년도까지 현역에서 활약하다가
퇴역하였다.
자료제공 : 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