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진실 - 1. 그 사실적 재구성
백제군 드디어 38선을 넘다 - 관산성 전투가 시작되다
흔히 말하는 관산성 전투는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백제가 신라에 대한 보복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신라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백제의 내부사정으로 한성옛땅에서 백제는 자진 철수하였고 텅빈 그 땅에 신라는 깃발을 꼽은 것이다.
어찌되었건 애시당초 나제동맹의 고구려 공략의 밑그림은 한성옛땅은 백제가 그리고 한강 중상류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약속과는 어긋난 것이기에 백제 입장에선 신라의 배신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1차원적 시각이다. 백제입장에선 한성옛땅을 신라가 차지한 것도 차지한 것이지만 더 큰 눈에 가시는 신라와 고구려의 재결합이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백제의 신라에 대한 응징전쟁의 전개과정을 리얼하게 재구성토록 해 보자.
그림설명 : 일반적으로 알려진 관산성전투의 상황도
이 그림이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관산성 전투의 상황도이다. 지금의 옥천관산성에서 백제,왜,가야의 3만 연합군과 신라군이 맞붙어 싸운 일대 격전인데 그림에서처럼 신라는 보은지역의 신라군과 상주지역의 신라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경기지역, 즉 신주의 김무력군까지 합세한 전투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주공격선이 한성땅을 차지한 신라의 신주가 아니란 점이다. 단지 한성의 옛 백제 고토회복작전이 목적이었다면 응당 백제는 한성의 신라군을 공격함이 순서이겠지만 백제의 주공격선은 한성땅이 아니라 옥천지방이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또한 초기 격전지를 보면 삼년산성으로 가는 길목인 굴산성과 영동 각계리의 직동이었다. 보은의 삼년산성은 당시 신라에게 있어서는 소백산맥넘어 신라의 각군영으로 연결되는 허브(HUB)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군사령부이다. 따라서 백제가 신라군의 허브(HUB)라 할 수 있는 삼년산성을 공략하여 수중에 넣는다면 그 휘하의 신라 진영은 자연도태시킬 수 있는 잇점을 갖게 되는데 따라서 백제가 한강의 한성땅이 아닌 삼년산성쪽으로 주공격선을 잡은 것은 신라의 허리를 끊어 놓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2. 전쟁초반의 승세는 백제편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초기 전장(戰場)과 후기 전장(戰場)이 다르다. 관산성 전투 역시 그렇다. 전쟁의 발발시점에선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함산성이고 그 다음은 구전되어 전하는 전장터는 굴산성과 직동 핏골전장터이다. 일단 전쟁 발발시점의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 삼국사기엔 백제와 신라의 대회전인 관산성 전투의 결과만을 말하고 있다. 554년 7월에 성왕이 참수되고 백제의 참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관산성 전투의 발발은 언제일까? 그 기록은 일본서기 흠명기 15년조에서 찿아볼 수 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
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
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령(領)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
連)을 보내 자(自)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
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병사 죽사(竹) 물
부(勿部) 막기위사기(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
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
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신라가 신주를 설치한 것이 서기 553년 7월이고, 이미 그 한달전인 6월에 왜에서 백제로 지원군을 보냈고 553년 12월 9일에 신라의 함산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관산성 전투는 정확하게 553년 12월에 시작해서 그 다음해인 554년 7월에 끝이 난 당시로서는 장기전에 속하는 전쟁임을 알 수 있다.
그림설명 : 554년 12월 9일 관산성 전투의 발발과 동시에 신라 함산성 함락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함산성(函山城)을 서산성과 삼양리토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어차피 탄현쪽을 넘어온 백제군으로서는 당연히 서산성과 삼양리 토성을 함락시키지 않고선 신라진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에 함산성을 그곳으로 보는 것은 군사적으로도 타당하다 하겠다. 삼양리토성이나 서산성은 신라입장에선 하나의 전초기지 성격이라고 볼 수 있기에 백제의 주공격선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림설명 : 전쟁발발당시 백제 공격군 시각에서 본 전장 상황도
전쟁발발 초기엔 관산성은 그리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재 관산성으로 알려지고 있는 삼성산은 위치상 많은 군이 주둔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둔형 지휘소형 산성이라기 보다는 관측형 산성에 가깝다. 관측형 산성은 주둔 지휘소형 산성이 함락되면 자연적으로 나가떨어지는 그런 산성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면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림 : 옥천역에서 본 관산성과 삼양리토성(건물에 가려짐)과 서산성 그리고 멀리 백제진영의
고리산성이다. 이 사진은 신라진영에서 본 시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림에서 보이는 아파트와 서산성 사이의 길로 백제의 선봉이 물밀듯
내려와서 순식간에 삼양리토성(함산성추정)과 서산성을 점령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응징의 칼을 빼든 백제군은 신라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함산성(삼양리토성)과 서산성 및 인근의 관산성까지를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신라군의 본진지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이렇게 초기 전세는 전적으로 백제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숫적 열세에 있던 신라는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알 림 : 위 자료는 사실과 다소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