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군의 총력 방어전 핏골 전투와 굴산성 전투
1부 핏골전투의 전설
관산성 전투를 추적하다가 알게 된 것이 핏골전투의 전설이다. 이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마을고장에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인데 그 현장을 직접 찿아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직동이 바로 핏골 전설의 현장이다. 마을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금강의 상류 지류인 영동천위로 각계2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서 역사의 현장인 직동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강의 지류는 예로부터 군의 이동통로이자 식수공급원 역할을 하였다. 이곳 역시 삼국시대 신라군의 주요 이동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주와 추풍령을 넘어 황간을 지나면 바로 이곳을 거치게 된다.
사진 : 핏골로 연결되는 각계2교와 영동천 (이 영동천을 따라 올라가면 황간과 추풍령에 이르게 된다)
사진 : 각계2교 위에서 본 경부선의 열차와 KTX 고가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교통의 길목이다)
경부철도와 KTX고속전철고가 밑으로 지나서 드디어 신라와 백제의 숨겨진 격전의 현장인 핏골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엔 이 마을의 깊은 유래를 웅변하듯이 400년된 느티나무가 나그네와 동네사람들의 쉼터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엔 마을의 표지석과 유래비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핏골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 입구 표지석과 각계2리(핏골) 내력비 (內歷碑)
너무도 반가운 마을 내력비. 이런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역사가 된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뜻깊다.
핏골전설과 관련된 내력비 내용 소개
현 각계2리 동네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 동리 이름은 신라 진흥왕 15년(554)에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침공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격전을 하였는데 특히 핏골에서 전멸하였
으므로 그 후로 이 골짜기를 "핏골(血谷)"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핏골이 간직한 관산성 전투의 또 다른 비밀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이 증명되는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참으로 꽉 막힌 사람일 것이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그에 대한 정황과 사실적 재구성을 통해서 숨쉬는 역사로 재발굴 하는 것이 역사추적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래서 이 핏골전설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 특히 군사적 재해석을 해보고 관산성 전투를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해 보기로 한다.
먼저 핏골의 위치는 상주에서 추풍령을 넘어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은 현재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며 경상도쪽으로 가기위해선 필히 거치는 그런 곳이다. 비단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6.25전쟁때도 무력남침한 북괴군은 바로 이 루트를 지나서 낙동강 전선에 이르렀다. 대전-옥천-영동을 지나 황간-추풍령-김천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바로 그 길이다. 반대로 이 코스의 역으로는 상주에 본부를 둔 신라군의 보급로이자 또한 중부지역에 대한 진격로이기도 하다. 결국 백제와 신라가 맞 붙을 경우엔 영동 핏골은 결전장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이다.
그림 ; 핏골과 굴산성의 위치로 볼때 백제 주력군이 두군데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선 타당치 않다.
그런데 관산성 전투당시 기록은 백제의 태자 여창이 이끄는 주력군은 고리산에 성을 쌓고 서기 553년 12월9일 전격전을 벌여서 신라의 최전방 기지인 함산성을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전에서 옥천을 지나는 백제의 주력군이 신라군과 굴산성에서 한판 맞붙게 되는데 굴산성의 위치와 핏골의 위치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공격루트를 두군데로 나눈다는 것은 전략전술 상 맞지가 않다. 왜냐하면 병력집중의 원칙을 가장 중시해야 할 공격군이 분산된다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다.
또 핏골의 유래를 보면 관산성을 공격한 백제 성왕이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한번 혈전(血戰)을 벌였다고 하는데 어떻든 간에 백제군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벌였다는 부분만큼은 명백한 사실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핏골 전투의 유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퇴각하다가 전투를 벌였다는 의미속엔 그 전에 진격하면서 이곳 또한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릇 전쟁은 초기전투와 중기 후기 전투의 양상이 다르다. 따라서 초기 전투가 아닌 후기 전투만이 구전되어 내려왔다고 추정해 본다면 전쟁 초반 백제의 승기일때는 이곳을 백제가 진주하면서 상주의 신라 증원군 차단에 성공하였다가 후반기에 들면서 백제가 패퇴한 곳이라고 추정한다면 그것이 더 설득력 있다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이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재해석하여 재구성 하여 본다.
가정
1. 백제의 공격루트는 MAIN 공격선과 SUB 공격선으로 나뉘어 진격하고 나중에 최종 합류한다.
2. SUB 공격선은 신라의 병참지원과 지원군이 주(主) 전장(戰場)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차단역할을 한다
그림 : 관산성 전투발발 당시 백제의 신라 침공군은 2개의 공격루트로 구성되어 신라의 증원군을 차단하는데 이용됨
신라 증원군을 차단하는 백제, 왜, 가야, 혼성군은 금산에서 출발
즉, 핏골 전투의 백제군은 백제 태자 여창이 이끄는 주력군과는 다른 별도의 공격라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백제연합군의 구성에 이유가 있다. 일본서기에 보면 서기 548년 백제의 "도구니시(得爾辛)"에 성을 쌓는데 왜병 370명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축성 및 전쟁준비에 왜병도 동원되었슴을 말한다. 도구니시성은 백제의 덕근지(德斤支)이며 현재 논산의 은진지방의 산성을 말한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 직전엔 왜에서 왜병 1000여명과 병선 40여척에 나누어 타고 백제에 오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게 해서 백제의 신라 침공전에 동원된 왜병은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백제 진영에 분산배치되었을 것이다. 관산성 전투 종반전에 백제군을 포위한 신라군을 백제 태자 여창과 함께 있던 왜장의 활약상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백제 성왕은 신라에 대한 응징전에 대가야군까지 동원하였다. 백제 귀족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입장에선 동맹군의 지원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야군은 왜 백제편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텐데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가 적용된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이미 신라에 복속하였고 금관가야 멸망후 가야세력의 맹주이던 대가야는 계속되는 신라의 압박에 백제와 동맹으로서 그 타개책을 삼고자 했다.
그림설명 : 관산성전투에 참전하는 대가야군과 왜의 참전루트
즉 고령 함안 합천을 베이스로 하는 대가야군은 금산에서 백제성왕의 지휘아래 백제 왜 가야 혼성군을 구성하여 상주에서 올라오는 신라의 증원군을 차단하는 작전에 참가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즉 대가야의 위치와 핏골전투의 위치 두가지를 종합해보면 옥천을 통과하는 백제 주력군과는 다른 루트를 통한 또하나의 침공루트가 존재했스을 짐작케 한다. 예로부터 금산에서 영동 양산을 거쳐 가는 길은 경상도로 가는 길이었다. 바로 이 길을 통하여 백제 성왕은 백제군과 왜 그리고 가야군을 지휘했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도 관산성전투 후 백제 무왕시절에 신라에 대한 백제의 압박은 금산에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이때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이 양산가이다.
핏골전투가 간직한 백제 성왕의 비극적 죽음을 푸는 열쇠
이 상왕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즉 백제의 주력군은 관산성 일대의 함산성을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신라군의 사령부인 삼년산성으로 진격하고 금산에서 출발한 백제 가야 왜 혼성군은 상주의 신라 증원군을 막고난 다음 본진과 합류한다는 작전구상이다. 여기서 백제 성왕은 왜와 가야를 조율하는 외교력 발휘는 물론이고 가야와 왜 혼성군 지휘자까지 겸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기록된 내용에는 이런 실질적 내용보다는 몸져 누운 태자 여창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50기의 호위병력만을 대동하고 태자의 군영으로 가는 도중에 참수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이 시작은 왜 백제 성왕이 신라군이 빤히 보이는 관산성 밑을 불과 50기의 호위병력만을 대동하고 가다가 비극적 종말을 고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태자 부여창이 전쟁의 지휘를 맡은 상황에서 사비궁궐에서 보고만 받고 있는 위치였다면 태자를 위문하러 가는 길이 관산성 아래 구천을 지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핏골전투의 유래를 통해서 백제성왕은 사비궁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투현장에 있었슴을 알수 있다. 전쟁 종반 신라의 반격에 밀려 내려온 성왕은 금산에서 추부로 이어지는 성왕의 백제군영에서 고리산에 주둔하고 있던 태자 여창을 보러 가는 도중에 신라 복병에 결렸슴을 핏골전투의 전설을 우회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즉, 신라에 대한 공격루트가 백제성왕과 태자 여창이 지휘하는 2개로 나뉘어 있었던 관계로 전투지휘회담차 수시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교통로는 관산성 아래 구천을 통과하게 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관산성까지 백제가 차지한 시점에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군에 밀리고 있었던 시점에선 상황이 달라지는데 이를 성왕은 간과한 것이다. 늘상 다니던 교통로를 전속 호위기병 50기만 대동하고 평상시처럼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가던 성왕은 이를 눈치챈 신라복병에게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다.
↓ 관산성 전투 초기 전쟁 진행 상황도 :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과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 혼성군과 이에
맞서는 신라군의 기동로를 표현하였다.
신라군 시각에서 본 핏골전투와 굴산성 전투
그럼 신라군의 시각에서 본 핏골과 굴산성 전투는 어떻게 될가? 백제의 치밀한 신라 응징준비와 가야와 왜까지 동원된 백제군의 초기진공에 신라군은 숫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백제군은 한성고토까지 포기하고 약 1만의 대가야 병력까지 동원하여 병력의 집중화를 꽤한 반면에 신라군은 신주의 김무력군, 그리고 충주 중원방면의 거칠부군과 상주지역군 등으로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초기전투엔 신라는 백제군의 공격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삼국사기 진흥왕 15년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흥와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백제 제27대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 초기 백제군의 진격에 맞서 신라군 총지휘관은 각간 우덕이었다. 상주지역 군주(軍主)로서 그는 금산지역에서 진격해 오는 성왕의 백제군은 물론이고 백제 태자가 이끄는 백제 주력군의 공격까지 막아야 하는 중책을 맞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듯이 초반 방어를 맞는 사령관은 고전을 면키 어렵다.
말이 쉬워 불리한 것이지 실제로는 관산성 전투 초기 전투에서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의 고위 장수들이 모두 전사했거나 부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본다. 전투지 인근지역엔 장군묘로 전해지는 곳도 있는 것과 이 전투 이후 이들 최고 관등의 장수들은 기록에 드러나지 않는것 또한 전사를 추정해 보게 한다. 어떻든 방어선이 뚫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신라 지휘부는 별동대라 할 수 있는 신주의 김무력군까지 동원하게 되는 총반격으로 전쟁은 장기화 양상에 접어들게 된다.
다음 그림은 신라군의 시각에서 본 관산성 전투 초기 전황도를 그려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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