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군기문제 및 한국군의 문제에 대해서..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8.10.10 17: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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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댕 북진이후 한국군의 추태는 1.4후퇴와 더불어서 현리전투의 1개대대 뒷총에 군단이 와르르 무너지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바 있습니다. 이에 문제는 한국군의 전장군기문란문란도 있지만.. 한국군의 능력적 문제도 상존합니다.

 

단순한 비판의 문제를 비난으로 하는가 비판으로 해서 이를 적용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 나름대로 자료를 모은 것에서 북진 이후 특히 평양점령이후 한국군의 군기문란및 현리전투와 같은 문제에서의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문제점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전쟁사를 중요하게 보고 비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큰일이니까요.

 

-전쟁사 연구는 군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며, 지휘관은 조국과 부하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마샬.

 

북진이후 한국군의 문제점은 가장 심각하게 들어나는게 바로 있다면.. 군기문란이었습니다.

 

김종오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평양을 점령한 이후 아군의 군기는 걷잡을 수 없이 문란해졌다. 낙동강선에서 북진할때만 해도

대대에 차량이라곤 대대장용 지프한대가 고작이었는데, 평양이북부터는 중대에서 노획한 차량이

3-5대가 되었고 알게 모르게 현지에서 뒤따르는 간호원의 이름이 붙은 여자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이 폐단을 없애려고 강력히 지시했으나, 때가 너무 늦었다. 물론 이 책임을 나도 면할수 없으며

작전실패의 원인은 이러한 불미스러운 전장 군기의 와해와도 관련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라고 한 사례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전쟁때 한국군은 위안부를 운용한 사례가 있습니다. 혐한일본인들이 헛소리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것인데.. 제가 알기로는 일본군의 위안부가 아니라 소위 매춘업을 하는 여성분들을 고용했다는 점입니다. 강제동원은 거의 아니긴 하지만.. 한국전쟁때 이러한 모습은 군기문란중 중요한 불명예이기도 하다 생각합니다.

 

장교들의 군기문란은 결과적으로 하사관들이나 사병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한국군의 군기문란은 북진이후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그때문에 미육군에서는 한국군의 문제점에 대해서 미군 고위 장성들이 걱정했고 특히 장교들의 능력적 문제는 브래들리합참의장이나 콜린스 참모총장의 의회증언을 보면 한국군지휘부의 무능과 전의부족 그리고 투지부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을 볼수 있다고 합니다.

 

전선에서 군기가 허술해지지 않도록 해야하며 솔선수범하고 동시에 전선에서 하사관이나 사병들의 패닉상황을 통제하여 정상으로 돌아오게해야할 장교라는 위치에서의 존재들이 군기문란에 앞서고 동시에 전장에서 오히려 사병과 동일하게 패닉상태에 빠지는 최악의 경우가 되어버리거나 심지어 먼저 도주하는 경우까지 발생하니 당연하게 심각할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아주 이런 모습은 2군단 붕괴 3군단 붕괴 금성전투까지.. 너무나 전쟁에서 뼈아픈 발단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백선엽 장군의 자사전에서도 2군단 붕괴때 한국군의 추태에 대해서 민망할 정도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한국전쟁때 북진이후 한국군의 군기문란의 문제점은 차후나 현재 한국군에게서 전시에 북진이후나 현재 전력적 우세에 따른 승리도취감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할 만한 사례라 할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그때의 군기문란의 교훈은 오늘날 장교육성에서 극단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사례가 되니 문제가 있긴 하다 생각됩니다만..

 

두번째로는 장교의 자질능력 리더쉽 문제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때 부대를 찍어내듯이 부대창설을 했습니다. 사실상 급조한 부대라는 셈입니다. 급조한 부대가 되면 문제점은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사병에 이르기까지 교육수준이 떨어짐을 의미합니다. 물론 기존의 사단에서 병력차출을 하면 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1940년 서부전역직전 독일군의 군비팽창에서의 장교/하사관읜 질적 문제를 예로 들수 있듯이 기존의 정예부대의 질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한국전쟁 북진전까지만해도 한국군의 고위장교들은 대부분 일본군 학병출신이 다수에 그리고 장교/하사관 출신 그리고만주군 출신이 주축이었습니다. 물론 독립군 출신들이 없는건 아닙니다. 독립군 출신들의 경우 대단히 고맙게도 좌익계열에서 일으켜주신 여수반란사태 14연대 반란사태/4연대 반란덕에 독립군 출신들이 대거 물러나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49년의 숙군작업은 김창룡같은 악질친일파께서 맡았고 그덕에 심지어 이범석 국방장관까지 물러날 정도였다는 점에서 독립군 출신들의 박해가 심하게 되었습니다. 아.. 잡설은 여기까지이고.. 북진전이나 후나 한국군 고위장성들의 연대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의 능력부재는 오늘날 한국군의 한국전쟁에서의 치욕적인 사례인 2/3군단 붕괴를 자초하게되는 원인이 됩니다. 물론 한국전쟁때 한국군 위관/영관급에는 그래도 독립군 출신들도 많았습니다. 이 언급은 일본군 출신이었다고 다 무능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해는 없으시길.. 백선엽 장군이나 김종오 장군같은 사례가 있죠. 대표적으로..

 

물론 당시 한국은 신생국가였다는 점에서의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장교들의 대부대 지휘 능력의 결여는 전투역량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거나 부대 붕괴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게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미군에서 한국군 사단 지휘부를 미군으로 교체하려고 하는 극단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였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쩔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신생국가이고 급격하게 급조한 부대에서의 장교와 하사관들에게 많은걸 바라는건 무리이고 고위지휘관들의 역량적 문제도 고려했어야하는 문제이지만.. 영단과 아부적인 문제/ 무책임에는 뛰어난 사람들 덕에 전쟁에서 악영향을 미쳤다는게 문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군이 용감하게 싸웠다는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점에서 한국전쟁에서의 한국군과 남베트남에서의 남베트남 정규군과 비교되는게 바로 이점입니다. 똑같이 고위 장성들이 무능한 면이 존재했어도 그래도 유능한 존재들이 있었기에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제대로 싸우는 법을 취득했다는 점일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실제로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1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단들이 와해되었어도 한국군이 저항을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대표적인게 아마 2/7사단일 겁니다.

 

물론 여담이지만 남베트남에서도 그래도 유능한 장군들이 존재했습니다. 1군단장이나 18사단장의 경우에도 북베트남군조차 놀랐을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18사단과의 전투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세번째가 바로 지휘부의 능력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한국군의 지휘부의 능력은 매우 질적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부대 지휘능력이나 실전경험이 있는 간부가 적다보니.. 결과적으로 대부대 운용에서의 간부들이나 참모부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인민군보다 떨어질수 밖에없었습니다. 같은 신생국인데도 말이죠. 인민군의 경우 류경수땅크여단만 해도 여단장 류경수만 해도 전차부대장으로서 동부전선에서 참전했을 정도였다는 점과 그외 지휘부가 일본군 출신도 다수였지만.. 대체적으로 좌익계열 독립군 출신들이 많았었던 관계로 실전경험이 나름대로 풍부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중공군의 경우에도 그렇지요. 위에서 이야기했던 지휘부문제의 경우 미군에서 고려했던 문제가 바로 이점때문이기도 합니다.

 

중공군이나 인민군의 지휘부능력은 한국군보다 우세했다는 점에서 이점은 분명하게 우리가 봐야할 문제일 것입니다.  중국군의 질서정연함과 엄정한 군기에 대해서 리지웨이장군조차 '적들의 모습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라고 칭찬할 수준에 이르렀다는 발언은 한국군의 지휘부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솔선수범능력 및 군기유지나 전선통제능력의 부재를 볼수 있습니다.

 

1950년 겨울 한국군 2군단이 중공군 동계 대공세때 무너진 이유도 바로 지휘부가 먼저도주가 문제였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전차쇼크등을 고려하지만.. 전선을 통제하고 군기유지를 해야할 지휘부가 먼저 도망갔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패배원인을 얼버무리려는게 문제라는 거죠. 사실 말이 좋아 전차쇼크지 당시 겨울이면 3.5인치 바주카포를 한국군도 공급받았고 미육군 전차중대도 사단에서 배속받아 운용될 정도였고 여름내내 겪었던 전차쇼크를 한국군이 노하우로서 습득하지 못했다는 점은 지휘부 능력외에도 급조된 부대의 문제점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만.. 이를 통제해야하는게 지휘부라는 점에서 통제하지 못했다는건 분명한 문제입니다.

 

그로인해 2주일동안 좌우에 있던 미육군 10군단과 8군단의 전선붕괴로 250km를 미육군은 치욕적인 도주에 가까운 형태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그 유명한 1.4후퇴의 원인이 바로 이겁니다. 그 결과로 인해 미해병대 1사단은 중공군 7개사단에게 포위되었고 전쟁이 어떻게 되었다는건 다들 아실 겁니다. 2군단은 지휘부가 도주하면서 군단급 제대와 전선이 아예 녹아내림반면에 미 해병대 1사단은 7개 사단에게 포위되었어도 전선유지까지 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지휘부의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볼수 있지요.

 

물론  미해병대의 능력까지 신생국가의 한국군이 여기까지 바라는건 곤란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전선유지를 하면서 퇴각하는건 용인될수 있어도 전선상황조차 갑작스럽게 군단제대가 녹아내릴정도의 전선공황으로 나온 상태의 패주는 그 지휘부에 대해서 용납될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제대로 교훈이 안되었는지 3군단의 현리전투에서도 그대로 보여줍니다. 1.4후퇴의 문제점은 중공군은 그동안의 전술이 매우 독특했다는 점도 있지만.. 한국군의 이런 군단제대로 패주와 전선붕괴는 1.4후퇴의 원초적 제공인 셈입니다.

 

3군단의 붕괴의 경우에도 미군측과의 협조및 한국군과의 부대배치 갈등/ 오마치고개의 확보문제등이 요인들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 패주 요인중 하나는 바로 군단의 통제불능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군단장이 전선시찰을 비행기로 하고 있는데 군단장이 도망간다는 유언비어에 놀아날 정도로 군단이 패닉상황이었다면 이를 통제해야하는게 간부여야하는데 간부조차 그러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1개 대대가 뒷총사격을 때려대자 2개 사단이 소문에 의해서 공황상태로 패주합니다. 이건 지휘부의 통제능력이 얼마나 미비하고 능력이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3군단의 경우 당시 유명한 김종오 소장외 3사단의 정예 하사관들이 다수 포진한 18연대도 존재했습니다. 그외 유능한 부대들이 그래도 존재했다는 점에서 이들 부대가 한순간에 녹아내리면서 미군이 한국군 1군단에 대한 통제를 어떻게 했는가는 결과론적으로 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네번째로 하사관의 프로의식 결여입니다.

 

군대는 장교가 통제한다고 하지만.. 전투는 하사관이 지휘한다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전투에서 하사관들의 능력도 장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장교만큼이나 사병들을 독려해야하고 위험한 순간에 솔선수범헤애하기 때문이죠 그때문에 한국전쟁에서 하사관들의 피해는 사병이나 초급장교에 비해 2배에 이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성 육탄 10용사의 사례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하지만 급조된 부대에서의 초급장교들의 전투지휘능력의 부재도 한몫을 했지만.. 하사관들의 솔선수범 의식이나 능력도 부재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급조하게 초급장교와 하사관들을 채용해하고 전선상황은 병력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는 상황에서 빠른 배치에 의한 검증적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 결과가 2/3군단 붕괴에서도 하사관들조차도 공황상태에서 무질서 패주에 동참했다는 점은 분명하게 문제가 될수 있습니다.  결국 계급장에서만 동일할뿐 그 문제는 사병과의 문제점과 다르지 않았다는게 원인적 요건입니다.

 

다섯번째로 사병의 기초군사훈련 부족입니다.

 

갑작스레 거대 팽창을 하는 상황에서의 사병요구나 급한 전선상황에서의 병력증대 요구는 한국군 사병들에게 훈련 한번 받지 못하고 바로 실전투입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겪에 만들었습니다. 2차대전때 소련군도 그랬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고참병으로서 존재했어도 다수의 병사들이 기초군사훈련이 전무한 상황이었습니다. 군사훈련의 전무는 결과적으로 군기확립이나 전투수행의식 부족등을 낳았고 괴소문에 바로 사병들이 공황을 일으켜 대규모 탈주나 혹은 패닉상태에 이르게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초기 전차쇼크에 의한 전선붕괴(대표적:미아리전선)만해도 훈련된 모병병력(한국군은 창군초에는 모병이었습니다.)이 그랬는데 징집되어서 기초훈련도 안받은 존재들의 전선붕괴는 어찌보면 당연하게 예견된 일일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현리전투이후 사병들 교육철저및 부대편성과 훈련에서의 대대전투훈련 사단전투훈련등을 통해서 부대를 강화해갔고 그이후로는 전선붕괴라는 치욕이 없었지만.. 이미 전쟁에 너무나 뼈아픈 문제를 두고 시행된 늦은감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속담으로 보자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의 격이 될수 있었다 봅니다.

 

 

대략 제가 한번 알아본바는 5가지 정도입니다. 대체적으로 지휘부의 무능을 한국전쟁때 한국군에게 볼수 있었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떨쳐버릴수 없다는게 유감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저의 생각이 틀린 것도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인터넷에서 전쟁사 자료를 수집해서 작성한 것이긴 하니까요^^; 하지만 한국전쟁당시 한국군의 군기문란/지휘부의 무능/장교의 자질능력/하사관의 프로의식 결여/사병의 기초군사훈련 부재등과 같은 요건은 한국전쟁을 최악으로 만들어버린 분명한 요건이라 보이며 철저한 한국전쟁의 연구는 현재 한반도 유사시 상황에서도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 봅니다.

 

우리군에서는 우리군의 문제를 자꾸 감추려는 문제가 강합니다. 사건사고라든지등이 그러해서 문제가 되기도 하죠. 그리고 은폐시키려는 문제의 성향도 강하지만.. 물론 자기잘못을 감추려는 것이 어찌보면 인간이 살면서 자기방어본능에 가깝지만.. 이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폐인분석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군이 전투에서 얻을수 있는 교훈은 매우 적을 것입니다. 아 물론 한국군에서 한국전쟁의 폐인연구나 역사연구를 잘 안한다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철저하게 우리가 장교후보생들에게 전쟁사 교육에서 과감하게 비판할 문제는 교육을 시켜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2차대전때 구 일본군은 자신들의 패배나 문제점을 제대로 분석하려고 하지 않았고 은폐에 급급해서 2차대전에서 패배에서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 다는점은 우리는 역사로도 볼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이상으로 긴 장문을 마치겠습니다^^; 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글참고:네이버 밀리터리 군사카페/인터넷 검색

사진출처:네이버 밀리터리 군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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