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의 군사령부 위치
한성백제의 옛땅을 신라가 차지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장군이 바로 김무력이다.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 즉, 한성백제의 옛땅을 획득하고 그곳을 신주로 삼았다. 그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무력이다. 신라의 독특한 지역지배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무력 휘하 부대의 주둔위치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新州)뿐만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과 금현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요충지였다. 바로 그곳에 다름아닌 김무력휘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이 부대가 백제 태자 여창의 주력군을 배후에서 기습하여 관산성전투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신라가 설치한 신주(新州)지역인 한성백제 옛땅은 신라입자에서는 최전방중의 최전방이다. 보통 최전방엔 군최고사령부가 위치하지 않고 보다 후방에 위치하게 된다. 삼국사기 진흥왕 11년조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을 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명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획득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상 김무력이 획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진흥왕 11년엔 이미 이사부는 고령인데다가 실전에 참여하지 않는 병부령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직책으로 표시해 본다면 국방부장관 이사부->육군참모총장 거칠부 -> 제 1야전군 사령관 김무력 으로 보면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미 앞서서 필자는 도살성과 금현성이 있는 지역은 오늘날 충북 증평과 진천임을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역은 진천이다. 진천이 어떤 곳인가? 김유신장군의 탄생지이다. 여기서 잠깐 김유신장군 탄생비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진천의 만뢰산엔 김유신장군의 태실이 위치하고 있다.
사진설명 : 진천의 길상사. 김유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사진설명 : 진천의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도당산성 뒤 봉화산에서 본 진천읍 전경. 오늘날도 군사적 위치를 엿볼 수 있는 군의 진지 표시판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의 첫번째 장을 보면 김유신장군이 태어난 배경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다. 한마디로 자유연애를 통해서 잉태된 것이 김유신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김무력의 아들인 서현은 어느날 길에서 갈문왕 입종(入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눈이 딱 맞아 버린다. 그래서 한마디로 사고를 치고 만다. 이것을 알아버린 만명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자신의 자신의 딸인 만명을 별체에 가둬서 하인들로 하여금 지케가 하고 서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벼락이 쳐서 별채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만다. 그러자 만명은 뚤린 구멍으로 도망쳐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진천)으로 달아났다 고 전하고 있다.
좀더 적나라하게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여자친구 아버지가 여자친구를 가둬버리자 그 집에 쳐들어가서 여자친구를 빼내서 같이 도망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자니 천둥소리만큼 얼마나 시끄러웠을지는 뻔한 일 아닌가? 지금생각해도 좀 파격적이다. 그런데 도망간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오늘의 충북진천이다. 아버지가 지역사령관으로 있던 곳으로 도망간 것이다. 좀 비약해보면 어쩌면 아들여자친구를 구해내는데 아버지인 김무력도 어느정도 힘을 써 줬을지도 모르겠다. 시쳇말로 아들이 여자친구를 꼬셔도 왕족 딸을 꼬셨으니 아무튼 김무력 입장에선 아들이 애기까지 밴 여자친구를 데리고 도망왔는데 어쩌겠는가? 기록에 보면 서현은 만노군 태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버지 김무력의 영지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좀 빗나간 이야기이지만 김유신장군이 화랑인 시절 사랑에 빠졌던 천관녀와의 관계도 어찌보면 부전자전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김무력장군이 지휘사령부를 두고 있던 지역은 새롭게 설치된 신주(新州)인 한강하류지역이 아니라 오늘날 진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하류로 진출하는데 중간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진천지역이 관산성전투에서 또 한번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2. 김무력 군의 투입 이동로 추정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신라의 정예부대이자 신라팽창의 선봉장이었다. 특히 한강중하류지역을 관할하는 특임대성격까지 지니고 있는 부대였기에 관산성초기 전투에선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절박한 위기에 몰리게 된 신라는 김무력휘하의 부대까지 관산성에 투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사항을 삼국사기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사람과 사졸 2만9천6백여명을 베었으며,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인 일본서기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신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완전히 기습받은 형국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기록은 왜왕 흠명천황15년조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림설명 : 백제와 신라의 전투현장이 옥천 관산성으로 김무력의 신라군의 이동로 추정
관산성 전투지역으로 출동 명령을 받은 김무력 군은 오늘날 진천->청주->신탄진->대전->백골산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우리나라 지형상 큰 산줄기나 큰 강줄기는 거의 변하지 않는 관계로 고대나 현재나 주간선도로는 크게 변화가 없다. 그래서 김무력 군이 진천지역에서 옥천지역으로의 이동로를 추정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진천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중부고속도로와 거의 일치하는 이동로이다.
3. 백골산성의 발견
역사의 분수령인 관산성전투를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서 맞딱트린 첫번째 문제는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자들마다 관산성전투지역을 옥천의 삼성산일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백제 태자 여창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고리산(환산)일대라고 하는 견해도 있는 등 정확한 지역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백제태자 여창이 진을 쳤다는 고리산일대를 답사해 보았으나 그 역시 3만의 대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서에서도 설명하였듯이 현지답사 결과 고리산과 이백산성 그리고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백제의 산성들 역시 감시초소 성격으로써 대규모 병력주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환산(고리산성)일대의 상세지도를 유심히 설펴보던 중 환산성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지 않은가? 그래서 찿아보았더니 역시나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골산(白骨山)이었다. 우리나라 지역명을 보면 백골, 핏골이라는 명칭이 의외로 많다. 거의 대부분 전쟁과 관련된 지명인데 대체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때 붙여진 이름이 태반이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환산성 뒤편의 백골산의 유래를 여러 자료를 통해서 찿아보았더니 그 옛날 백제와 신라군이 이 지역에서 혈투를 벌였을때 생긴 지명임을 밝혀내었다
그림설명 : 백골산성 안내 표지판
또한 백골산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백골산성이 존재해 있었고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적어보면
시도기념물 종목 : 시도기념물 22호
명칭 : 백골산성(白骨山城) 테뫼식
분류 : 성지(성곽)
지정일 : 1991.07.10
소재지 : 대전 동구 신하동 산13
산성 둘레 약 400미터
백골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다. 옛 기록에 나오지 않다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백골산(白骨山), 대전(大田)의 동약4리(東約四里) 옥천군계(沃川郡界)를 이루는 산상에 석뢰로써 주위(周圍) 약이백이십간(二百二十間)"이라 하였고 <전국유적목록>에는 거의 그대로 옮겨 적었으며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344m의 백골산에 있는 산성으로 정상부에 석성이 있는데 백제때 축조된 것이라 하며 주위 약 396m이다. 백제와 신라가 싸워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고 하였다. 백골산은 대단히 험한 산세를 갖추고 있는데, 성벽은 산 정상부에 지형을 따라 축조하였고 성벽이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례로 완정히 무너져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산성은 백제측의 전략거점인 계족산성과동쪽으로는 신라측의 유명한 관산성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함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은 가파른 지형에 쌓여진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골산성의 서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어떻게 생긴 산성인지 그 일대 지형은 어떤지 검색해 보았으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 볼 수는 없었다. 군사적 식견이 없으면 대체로 산성자체만을 보기 때문인데 인터넷검색으로서는 백골산성의 가치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군사적가치로서의 산성은 산성자체보다는 주변의 지형지세와 연결성이 더 중요한데 그것을 책상머리에서 인터넷에 올라온 몇장의 사진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증에 현지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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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혁의 역사추적 1탄 관산성 전투의 최종라운드
*김무력의 신라군 백골산에서 백제군을 학살하다*
1.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의 군사령부 위치
한성백제의 옛땅을 신라가 차지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장군이 바로 김무력이다.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 즉, 한성백제의 옛땅을 획득하고 그곳을 신주로 삼았다. 그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무력이다. 신라의 독특한 지역지배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무력 휘하 부대의 주둔위치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新州)뿐만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과 금현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요충지였다. 바로 그곳에 다름아닌 김무력휘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이 부대가 백제 태자 여창의 주력군을 배후에서 기습하여 관산성전투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신라가 설치한 신주(新州)지역인 한성백제 옛땅은 신라입자에서는 최전방중의 최전방이다. 보통 최전방엔 군최고사령부가 위치하지 않고 보다 후방에 위치하게 된다. 삼국사기 진흥왕 11년조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을 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명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획득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상 김무력이 획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진흥왕 11년엔 이미 이사부는 고령인데다가 실전에 참여하지 않는 병부령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직책으로 표시해 본다면 국방부장관 이사부->육군참모총장 거칠부 -> 제 1야전군 사령관 김무력 으로 보면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미 앞서서 필자는 도살성과 금현성이 있는 지역은 오늘날 충북 증평과 진천임을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역은 진천이다. 진천이 어떤 곳인가? 김유신장군의 탄생지이다. 여기서 잠깐 김유신장군 탄생비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진천의 만뢰산엔 김유신장군의 태실이 위치하고 있다.
사진설명 : 진천의 길상사. 김유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사진설명 : 진천의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도당산성 뒤 봉화산에서 본 진천읍 전경. 오늘날도 군사적 위치를 엿볼 수 있는 군의 진지 표시판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의 첫번째 장을 보면 김유신장군이 태어난 배경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다. 한마디로 자유연애를 통해서 잉태된 것이 김유신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김무력의 아들인 서현은 어느날 길에서 갈문왕 입종(入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눈이 딱 맞아 버린다. 그래서 한마디로 사고를 치고 만다. 이것을 알아버린 만명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자신의 자신의 딸인 만명을 별체에 가둬서 하인들로 하여금 지케가 하고 서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벼락이 쳐서 별채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만다. 그러자 만명은 뚤린 구멍으로 도망쳐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진천)으로 달아났다 고 전하고 있다.
좀더 적나라하게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여자친구 아버지가 여자친구를 가둬버리자 그 집에 쳐들어가서 여자친구를 빼내서 같이 도망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자니 천둥소리만큼 얼마나 시끄러웠을지는 뻔한 일 아닌가? 지금생각해도 좀 파격적이다. 그런데 도망간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오늘의 충북진천이다. 아버지가 지역사령관으로 있던 곳으로 도망간 것이다. 좀 비약해보면 어쩌면 아들여자친구를 구해내는데 아버지인 김무력도 어느정도 힘을 써 줬을지도 모르겠다. 시쳇말로 아들이 여자친구를 꼬셔도 왕족 딸을 꼬셨으니 아무튼 김무력 입장에선 아들이 애기까지 밴 여자친구를 데리고 도망왔는데 어쩌겠는가? 기록에 보면 서현은 만노군 태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버지 김무력의 영지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좀 빗나간 이야기이지만 김유신장군이 화랑인 시절 사랑에 빠졌던 천관녀와의 관계도 어찌보면 부전자전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김무력장군이 지휘사령부를 두고 있던 지역은 새롭게 설치된 신주(新州)인 한강하류지역이 아니라 오늘날 진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하류로 진출하는데 중간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진천지역이 관산성전투에서 또 한번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2. 김무력 군의 투입 이동로 추정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신라의 정예부대이자 신라팽창의 선봉장이었다. 특히 한강중하류지역을 관할하는 특임대성격까지 지니고 있는 부대였기에 관산성초기 전투에선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절박한 위기에 몰리게 된 신라는 김무력휘하의 부대까지 관산성에 투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사항을 삼국사기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사람과 사졸 2만9천6백여명을 베었으며,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인 일본서기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신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완전히 기습받은 형국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기록은 왜왕 흠명천황15년조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림설명 : 백제와 신라의 전투현장이 옥천 관산성으로 김무력의 신라군의 이동로 추정
관산성 전투지역으로 출동 명령을 받은 김무력 군은 오늘날 진천->청주->신탄진->대전->백골산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우리나라 지형상 큰 산줄기나 큰 강줄기는 거의 변하지 않는 관계로 고대나 현재나 주간선도로는 크게 변화가 없다. 그래서 김무력 군이 진천지역에서 옥천지역으로의 이동로를 추정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진천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중부고속도로와 거의 일치하는 이동로이다.
3. 백골산성의 발견
역사의 분수령인 관산성전투를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서 맞딱트린 첫번째 문제는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자들마다 관산성전투지역을 옥천의 삼성산일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백제 태자 여창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고리산(환산)일대라고 하는 견해도 있는 등 정확한 지역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백제태자 여창이 진을 쳤다는 고리산일대를 답사해 보았으나 그 역시 3만의 대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서에서도 설명하였듯이 현지답사 결과 고리산과 이백산성 그리고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백제의 산성들 역시 감시초소 성격으로써 대규모 병력주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환산(고리산성)일대의 상세지도를 유심히 설펴보던 중 환산성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지 않은가? 그래서 찿아보았더니 역시나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골산(白骨山)이었다. 우리나라 지역명을 보면 백골, 핏골이라는 명칭이 의외로 많다. 거의 대부분 전쟁과 관련된 지명인데 대체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때 붙여진 이름이 태반이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환산성 뒤편의 백골산의 유래를 여러 자료를 통해서 찿아보았더니 그 옛날 백제와 신라군이 이 지역에서 혈투를 벌였을때 생긴 지명임을 밝혀내었다.
그림설명 : 백골산성 안내 표지판
또한 백골산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백골산성이 존재해 있었고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적어보면
시도기념물 종목 : 시도기념물 22호
명칭 : 백골산성(白骨山城) 테뫼식
분류 : 성지(성곽)
지정일 : 1991.07.10
소재지 : 대전 동구 신하동 산13
산성 둘레 약 400미터
백골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다. 옛 기록에 나오지 않다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백골산(白骨山), 대전(大田)의 동약4리(東約四里) 옥천군계(沃川郡界)를 이루는 산상에 석뢰로써 주위(周圍) 약이백이십간(二百二十間)"이라 하였고 <전국유적목록>에는 거의 그대로 옮겨 적었으며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344m의 백골산에 있는 산성으로 정상부에 석성이 있는데 백제때 축조된 것이라 하며 주위 약 396m이다. 백제와 신라가 싸워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고 하였다. 백골산은 대단히 험한 산세를 갖추고 있는데, 성벽은 산 정상부에 지형을 따라 축조하였고 성벽이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례로 완정히 무너져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산성은 백제측의 전략거점인 계족산성과동쪽으로는 신라측의 유명한 관산성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함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은 가파른 지형에 쌓여진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골산성의 서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어떻게 생긴 산성인지 그 일대 지형은 어떤지 검색해 보았으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 볼 수는 없었다. 군사적 식견이 없으면 대체로 산성자체만을 보기 때문인데 인터넷검색으로서는 백골산성의 가치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군사적가치로서의 산성은 산성자체보다는 주변의 지형지세와 연결성이 더 중요한데 그것을 책상머리에서 인터넷에 올라온 몇장의 사진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증에 현지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백골산성 현지 답사
그림설명 : 지도상에서 보는 환산과 백골산의 위치
지도상으로 백골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주 작은 소로로 표시되어 있다. 차량네비게이션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검색해보니 백골산성보다는 인근에 있는 대청호 주변의 김정선생유적지로 찿는 것이 쉽다. 차를 몰고 도대체 백골산이 어떠하길래 1500년이 넘도록 무시무시한 이름을 간직하고 내려오게 되었는지 그 모습을 보러 달려갔다. 고속도로에서 대전시가지로 빠져나와서 네비게이션은 대전 동부지역 간선도로로 안내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들어온 모습은 바로 70년대 건설된 경부고속도로의 대전터널 연결 고가도로였다.
요즘은 새롭게 난 경부고속도로로 지나기 때문에 이 고가도로를 이용할 일이 없는데 옛날 경부고속도로의 대전터널 고가도로를 보는 순간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난다. 어렸을때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던 일, 경부고속도로 화보에 항상 등장하던 아치형 대전터널 고가도로였다.
이 터널 밑으로 네비게이션은 길을 안내했다. 구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을 지나자 바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대청호반의 모습이었다. 대청호반의 옆길로 난 샛길로 접어들어서 좀 달려가자 지도상에 그려진 산봉우리 두개가 보였다. 그것이 바로 하나는 꾀꼬리봉이고 또하나가 백골산이다. 저녁놀 무렵 대청호반과 어우러진 백골산의 풍경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동안 숫하게 경부고속도로로 지나쳐왔던 그 대청호반의 바로 그곳에 백골산성이 위치하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사진설명 : 옛 경부고속도로상에서 본 대청호의 모습 (대청호가 없던 삼국시대엔 이 곳은 보다 넓은 초원지대였을 것이다
사진설명 : 대청호와 연결되는 차도에서 본 백골산의 전경(백골산 정상부의 산성까지는 매우 가파른 숲길을 올라가야 한다)
오늘날 대청호반과 이어지는 구릉과 바로 이어지는 높다란 백골산의 모습은 그 옛날 백제의 대군이 주둔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백제의 전초기지인 환산의 고리산성이 바로 코앞에 있고 백제의 주력군이 주둔할 수 있는 넓다란 구릉과 환산과 백골산을 끼고 돌아가는 금강의 맑은 물은 3만 백제군의 충분한 식수원이었으리라. 역시나 전투현장의 현지답사만큼 좋은 안내서는 없음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 계기였다.
5. 백제 주력군 주둔지의 치명적 약점
백골산 현지답사를 통해서 마침내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신라의 관산성을 굽어보는 백제의 최전초 기지인 환산 고리산성을 앞에 두고 백제 주력군은 백골산성 뒤편의 넓다란 대청호반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 약점을 백제지휘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백골산 일대는 관산성일대의 신라군을 상대로는 최적의 주둔지였지만 금현성과 도살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는 등뒤가 그대로 노출되는 치명적 위치였던 것이다.
그림설명 : 신주의 김무력 신라군은 환산과 백골산 일대에 주둔중인 백제군의 주력을 배후에서 기습공략하였다.
그림설명 : 김무력의 신라군이 백제군 주력을 배후에서 공략에 성공하자 관산성(옥천)일대에 있던 신라군은 전격적으로 백제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협공하게 되자 백제군은 완전히 포위공략에 빠졌다.
550년 신라가 차지한 금현성과 도살성이 관산성 전투에서 또 다른 비수로 다가와 백제군을 도륙낼 지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었으리라. 게다가 식수원이었던 금강은 배후를 기습당한 백제군에게는 도망갈 길조차 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된 것이다. 또하나 주목할 점은 이곳 백골산의 주둔 백제군은 주 병력이 기병이 아닌 보병 중심으로 편재되었을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백골산과 연결되는 탄현 고갯길은 기병이 작전하기엔 너무도 좁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의 기병은 주로 성왕이 이끄는 부대쪽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은 앞서에서 기술 한 바이다. 현재 마달령의 유래를 보더라도 탄현자체가 신라의 침입을 막는 가장 중요한 지역임은 백제의 성충이 언급한 그대로이다. 말 두필이 연이어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바로 탄현고갯길 이기에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백제군은 보병중심이었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6. 백골산에서의 대학살
신라조정의 명령을 받은 김무력 군은 성을 지키는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관산성전투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편재는 기병중심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신속한 이동이 필요했고 또한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기병을 주로 상대하였던 지역이기 때문에 전투의 양상또한 기병중심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삼국사기에도 보면 김유신장군이 도살성에서 신라의 기병을 훈련시키고 휴식하게 한 기록이 있는 만큼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무력이 이끈 부대는 기병편재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하겠다.
실제로도 백제 성왕을 참수하였던 김무력 휘하의 부대도 삼년산군의 기병 출신 고간 도도임을 본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보병중심의 백제군과 기병중심의 신라 김무력군, 더우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배후를 기습당한 백제군으로서는 신라 김무력의 기병을 상대로 전투자체가 불가능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때의 전황은 백제 지휘부가 제대로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였다. 백제성왕은 신라복병에 걸려서 참수된 상황이고 게다가 태자 여창 또한 몸져 누운 상태였으니 백제군의 상태는 최악 그자체였다.
이러한 모습을 글로만 표현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래서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 부분인 백골산전투에 대한 기술에는 많은 시간적 갭이 있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이 거의 학살에 가까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지 전혀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살수대첩모형도를 보고 있자니 그 지형지세가 백골산 일대와 판박이 아닌가?
사진설명 : 대청호반과 우측의 백골산의 파노라마 전경사진. 바로 이지역에 백제의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다음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배경이 너무도 흡사하다)
사진설명 : 용산 전쟁기념관에 살수대첩의 가상 모형으로 전시된 디오라마이다.(백마를 탄 장군이 을지문덕장군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의 대청호반과 백골산의 파노라마사진과 비교해보면 거의 흡사하다. 아마 백골산전투당시 김무력장군도 저렇게 지휘했을까?
사진설명 : 아마도 기병중심의 신라 김무력군은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백골산 뒤쪽의 백제군 주력을 디오라마의 모습처럼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했을 것이다
사진설명 : 전투의 현장을 리얼하게 표현한 디오라마
백제 태자 여창이 지휘하던 백제군 주력은 안심하고 무방비 상태로 백골산 뒤쪽의 구릉지대에 주둔하고 있다가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급습당하자 한마디로 퇴로가 차단당한 형국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옥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은 김무력이 백제군 주력을 배후에서 공략하자 바로 호응하여 백제 태자 여창이 지휘소를 꾸리고 있던 환산과 식장산으로 연결되는 백제 방어라인을 그대로 돌파해 버린 것이다. 이러니 백제군은 완전 포위된 채 신라군에 거의 학살되는 전투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백제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관산성 전투의 최종기록이다. 즉 백제 성왕이 관산성인근에서 참수되고 백골산 배후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 주력은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참살되었던 것을 말한다.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았을 때 삼국사기가 전하는 관산성 전투의 결과는 전혀 과장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서기 550년 나제동맹하에서 신라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차지하게 되고 553년 한성백제 옛땅에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면서 나제동맹이 파기되고 신라와 고구려가 은밀히 손을 잡게되자 그에 대한 백제의 응징으로 촉발된 전투가 관산성 전투였다. 서기 553년 겨울 12월에 백제의 선공으로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던 백제는 충북영동의 핏골전투와 옥천 굴산성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에 막혀서 퇴각하고 그 와중에 관산성부근에서 백제성왕이 신라군에 참수되었던 관산성전투는 서기 554년 7월 신주의 김무력 신라군이 백골산전투에서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인해서 백제는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또한 백제편에 섰던 대가야는 결정적으로 신라의 보복공격을 받아서 관산성 전투(554) 이후 562년에 신라 이사부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5세기초 광개토대왕의 남정이후 또 한번 동북아의 국제역학관계가 변화하게 된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