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의 ANZAC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0.21 21:27:46
댓글 0조회 1,746추천 0

122459156092281.jpg베트남의 호주, 뉴질랜드군-anzac(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호주와 뉴질랜드는 1915년부터 연합부대를 결성하였고,

2차대전을 거치며 동남아시아에서만 15년의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가진부대였다.
anzac은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말레이반도에서 영국과 함께 공산 게릴라와 싸웠으며

싱가포르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어 1963년에도 이 세 나라의 부대는 말레이,

보르*의 밀림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루었다. 일찍이 이들 나라들은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anzus조약을 체결하였고, 1954년에는 미국의 주도하에

동남아시아 조약기구를 결성하게된다. 유럽에서의 소련 공산주위 확장을 막기위한

기구로써 나토(nato-북태평양 조약기구)가,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 공산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기구로써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south east asian treaty

organization)가 창설된 것이다.

 

이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이른바 냉전체제가 도래하자 이들 나라들은

미국 주도하에 합동훈련을 실시했으며,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밀림지대에서의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anzac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1965년, 동남아시아의 공산세력확장을 우려한 도미노 이론(하나가 공산화되면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줄줄이 공산화된다는 주장)이 팽배하였다. 그해 로버트 맨자이즈

호주 총리는 미국의 들러리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보병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총리가 파병을 공식 선언하기 훨씬 이전인 1962년부터

이미 호주군은 베트남에 들어가 있었다.

1962년 8월 3일, 사이공 탄손 누트 공항에 도착한 이들 30명의 호주군 군사 고문팀-

aattv(australian army training team vietnam)은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sas(special air service)출신이 많았다.

팀은 미 군사고문단- 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maag)의 일원으로서

남베트남군에대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전원이 직업군인으로서 풍부한 밀림전

경험을 지닌 aattv팀은 당시 밀림전술을 개발해야했던 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anzac은 1962년 베트남에 파병한 30명을 시작으로 가장 병력수가 많았던 1968년에는

약  8000명이 베트남에 주둔했으며 1972년 완전철수 때까지 연인원 5만명의 병력이

베트남에서 근무하게된다.
anzac은 베트남에 파병된 여러나라 중 유일하게 자국의 센츄리온 전차와

20여대의 uh-1b 헬리콥터, m-113 장갑차량 등을 보유한 부대였다.


뉴질랜드도 1964년 6월에 2명의 장교와 24명의 기술하사관과 병들을 베트남에 이미

들여보낸 상태였다. 이 소수의 병력들은 베트남주둔 뉴질랜드 분견대 - new zealand

army detachment vietnam (nzadvn)로써 anzus조약에 따른 anzac

포병지원부대원이었다.

122459167330684.jpg
호주 제1기갑연대 센츄리온 전차와 m-16소총으로 무장한 anzac병사/ 1970년 베트남

122459170962349.jpg앞의 병사는 미제 5.56mm m-16자동 소총을,

뒤의 anzac 병사는 호주제 7.62mm l1a1소총으로 무장했다

aattv와 cidg

122459177137692.jpg정찰에 나서기 전 몽타냐드 족의 m/50 9mm 서브 머신 건을 점검하는 미 특수부대 장교.
몽타냐드 정찰팀은 고산지대 루트를 사용하는 베트콩을 강타했다.

122459181192676.jpg
그린베레와 몽타냐드족 병사

 

maag에서의 호주 고문단의 역할과 비중은 증대되었고, 따라서 파병병력도 점차 증가

되고 있었다. 초기 sas연대에서 파견된 aattv중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는

배리 피터슨 대위였다.
 

밀림오지의 부족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던 미국 그린베레와 마찬가지로

sas도 밀림의 소수민족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피터슨 대위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의 몽타냐드족 중 하나의 부족을 민간 비정규 방위

조직으로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피터슨 대위는 몽타냐드족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전통적인 관습도 적극 받아들였다. 그 결과, 피터슨은  2년 이내에 약 1000명의

병력을 무장시켰고, 심지어 명예 부족장으로도 임명되었다.

피터슨 대위의 부대는 단순히 마을만을 방위하는 부대가 아니었다.

부대는 직접적으로 적을 찾아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대부분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로서 근본적으로 고산 소수부족의 작전능력에 강한 회의를 품었던

남베트남정부도 민병대에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aattv의 몽타냐드 무장 프로그램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출발했다.
이는 그린베레가 추진하고 있던 cidg(civilian irregular defence group)프로그램과

똑 같은 것으로, 비정규 방위대가 지역에 출몰하는 베트콩을 공격하도록 한다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다. cidg프로그램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비정규 민병대가 정규군인

남베트남군보다 더 용감하고 더 잘싸웠다.

 

갈 수록 전쟁이 격화되자 aattv팀원들은 남베트남군 대부분의 부대에 배속되었다.
aattv팀원들은 통상 각자 1명의 미군사 고문단원과 조를 이루어 남베트남군에 배속

되었는데,  aatv팀원은 일반 보병부대는 물론이고 기갑부대와 레인저 대대, 특수부대,

경찰등에 다양하게 배속되어졌다.

특히 1군단 지역의 aattv팀원들은 그린베레과 함께 마이크 포스(mike force)의

고문관으로 배속되었다. 마이크 포스는 강화된 cidg프로그램에 따라 조직된 기동

타격부대로써, 비정규 방위대를 정규군 수준으로까지 격상시킨 것이다.

마이크 포스는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신속히 작전지역에 투입될 수 있었으며 포병까지도

자체적으로 보유한 강력한 타격부대였다.  마이크 포스는 주로 최전방이나 주요거점에

그린베레와 함께 주둔했다.

 

소 수의 aattv팀원은 cia에 배속되어 적진에 침투,  비밀정찰을 수행했는데 베트남화

전략에 따라 anzac의 철수가 시작되던 1970년에는 그 조직이 더욱 확대되었다.

전쟁의 막바지까지 남아 비밀스런 전투를 벌였던만큼 피해도 많았다. 이 조직에서

피터 베코이 소령을 비롯한 4명의 대원이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수여받게된다.

 

122459188817718.jpg
그린베레와 함께 m101a1 105mm 곡사포 포술훈련 중인 마이크 포스대원들

122459192729507.jpg누이닷 기지의 호주군 105mm 곡사포진지

122459196161798.jpg누이닷 기지를 출발하여 푸옥 투이의 베트콩 섬멸작전에 나선 anzac

 

 

 

 

 

 

 

 

 

 

 

 

 


 

슈퍼스탈리온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