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미국에 넘겨준 군사기술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05 18:5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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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기술로 잉태된 설계로 만든 스텔스 기 F-117 나이트호크기

 

 

지금은 미래 전투기의 표준이 된 스텔스 성능,다시 말해서

항공기가 레이다에 걸리지 않는 성능은 월남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었던 기술이었다.


레이다에 안 잡히는 스텔스 기술의 태동은 1973년 이스라엘의 공군이

큰 피해를 입은 1973년 제 3차 중동전인 욤 키프르 전쟁에서부터

태동되기 시작했다.


1973년 욤 키프르 전쟁이 끝나고 록키드 경영진을 포함한

각 항공사의 개발 담당들은 미 국방성이 비밀리에 실시한

욤 키프르 전쟁의 이스라엘 피해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브리핑은 미 공군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무시무시한 결론을

담고 있었다.


전쟁 중 이스라엘 공군은 미군이 가지고 있던 최신예
전투기를 투입했었다.

조종사의 수준도 미 공군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아랍 군에게 제공했던 30,000기로

추정되는 미사일 때문에 이들은 커다란 손해를 입었다.


이스라엘은 18일 동안에 무려 109기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그 태반이 변변히 훈련도 받지 못하고 규율도 형편없는 이집트 군과

시리아 군 병사들이 조작했던 레이다 유도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들에

의해 격추당했다.


특히 공군의 작전 연구관들이 공포감을 아니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월남전에서 월맹군이 운용했던 SA-2에 대응해서 미 조종사들이
사용해서 잘 통했던 미사일 기피 비행이 새로운 미사일인
SA-5나 SA-6에는 전혀 먹히지가 않아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이 기피 비행 중에 다 피격 당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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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조종사들이 공중 전봇대로 불렸던 SA-2. 비교적 구식이라서
미리 발견만 한다면  회피운동으로 피할수도 있었다.

 

 

미군들도 꼭 같은 대피 기동으로  소련 미사일을 회피하는
훈련을 받아 오고 있던 터였다.

결론적으로 현대화 된 적의 방공망 돌파에는 이제는
별로 뾰죽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18일간 아랍 군에게 당한 손실율을 아랍 군보다는

미국 대 훨씬 더 훈련이 잘 된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 군과의 전쟁에

대입하고  항공기수, 조종사의 훈련도, 대공포화가 동일했을 경우

단 17일 만에 미국의 항공 전력은 괴멸되고 만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 결론은 나중에 여러 걱정을 군부 내에 낳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직경이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레이다로서 수 백 킬로에서

접근하는 미군기를 탐지 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15종이 넘는 각종 대공 유도탄과 대공 화기를

보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새로 개발한 SA-6는 미군의 저공 침투 항공기와 크루즈
미사일을 격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강력한 추진체를 가진
SA-5는 미군이 가진 어떤 고공 정찰기도 격추 할 수 있는
125,000피트의 최고 상승 고도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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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5 대공 미사일 - 미군의 SR-71기 같은 최신기들이 오를 수있는
어떤 고도도 도달할수 있는 고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무려 3,000억불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 부어 이런

레이다와 대공무기로서 소련 전역을 감싸놓았으며 더 골치 아픈 것은

이런 고성능 레이다나 SAM 미사일 같은 대공 무기들을 소련이

다른 호전적인 국가에 판매하는 사실이다.


미 공군은 가상 적국 소련과 전면전보다도 세계 각처에서

불량국가들에게 주어진 소련제 위협들을 직면해야 했다.


미국은 여기에 대해서 대비를 하기도 했다.

미국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저공 침투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것이 B-1 폭격기였다.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는 물론 충분하지가 않았다.


스텔스 이야기는 중동의 3차 대전이 끝나고 전설적인 록히드사의

켈리 존슨이 록히드 사의 유명한 연구 개발적 조직인

스컹크 워크스 책임자를 물러 난 뒤 그의 후계자인 벤 리치가
그 후임으로 임명 된지 6개월이 지난 1975년 록키드 사는
미국 정부가 발주하는  대 레이다 저 노출 항공기 개발에 참여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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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켈리 존슨 - 불같은 성질과 번득이는 창의력으로
스컹크 워크스를 만들었고 이끌며 P-38, P-80.F-104,U-2,
SR-71등을 개발했다.1990년 타계

 

 

그것은 요즘 말하는 스텔스기의 개발이었다.


록키드는 1950년대 초 F-104를 개발한 뒤로 전투 폭격기를 만든 일이

없었으므로 DARPA[국방 선진 연구 계획국]은 다른 5개 전투기

제작 회사들만 접촉하여 연구 개발비를 각각 100만 불씩 나누어
준 뒤였다.


다섯 개 항공기 제작사들로 하여금 개발 안을 내게 하고 경쟁시켜

그 중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록히드사는 뒤 늦게 알고 참여를 신청했지만 이미 초기 개발비
500만 달라는 기존 5개사에 모두 분배한 뒤였다.

할 수없이 록히드사는 미국 정부에 초기 개발비를 자사 부담으로
하기로  하고   뒤늦게 참여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결과적으로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정부가 주는 돈 백만 달라를 받고 스텔스기를 개발했다면 스텔스

기술에 관한 모든 특허는 미국 정부가 가져갔을 것이다.

더 설명하자면 록히드 사는 신 기술 개발로 떨어질 막대한 이익을

못 챙겼었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록히드사는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스텔스기 개발의 키를 다른 어떤 항공기 제작회사 보다

앞질러서 이미 잡아내고 내부적으로 극비리에 벌써 백만 달라의
자금을 퍼부어서 개발 중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개발의 이해를 위한 두 가지 다른 기본 정보를
말해 드리겠다,

1975년 이 시점에 록히드사는 빈사상태에 빠져 언제 도산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월남전이 미군의 패배를 끝나 여론도 좋지 않았고 군사 예산은

일착으로 난도질당해 록히드사는 감원에 감원을 거듭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였던 5,000명이었던 사원이 1,50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더해서 군수 산업 축소를 내다보고 록히드사가 사운을 걸다시피하고
뛰어 들었던 민간 여객기 개발 사업이 예상치 않은 시행착오로
실패함으로서 회사에 대 타격을 가했다.


록키드 사는 보잉의 B-747기나 더글라스사의 DC-10에 대항하여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 삼발엔진의 대형 여객기인 L-1011 트라이
제트기를 개발하면서 유럽시장을 겨냥하고 엔진은 영국제
롤스로이스 엔진을 쓰기로 계약을 맺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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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트라이스타

 

그러나 엄청난 개발비를 투자해서 미리 주문 받은 트라이 스타 12기를

제작해 놓았을 때 영국의 엔진회사 롤스 로이스는 도산하고 말았다.

록히드의 트라이스타기들은 엔진도 없는 거대한 그라이더와 같은

처지가 되었고 비행기는 롤스 로이스가 영국정부의 지원으로

경영 정상화된 1971까지 고객들에게 인도되지 못했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벤리치가 스컹크 워크스의 책임자가 되던 1975년에서 일 년 전
1974년 록히드사가 그 지난 10년 동안 일본, 서독, 네델란드,
그리고 홍콩이나 사우디 아라비아등의 6개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터져서 주문 수주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런 부패한 회사에 세계 어느 나라도 주문을 주려고 하지를 않았다.


회사는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고서 겨우 2억 5천만 달라의 구제 금융을

받았지만 누적 적자가 이미 20억불에 이르고 있었다.

1974년에는 단돈 8천 5백만 달라라는 헐값으로 텍스트론 사에

매각될 뻔하기도 했다.


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상품이

개발되어야하는 절박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 록히드의 사정이었다.


캘리 존슨의 후임으로 스컹크 워크스 책임자가 된 벤 리치는

그를 바라보는 회사의 기대섞인 눈길에 중압감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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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리치 - 스텔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글은 그의 자서전 스컹크 워크스에서 요약한 것이다.
1995년 타계

 

록히드사가 뭔가 구세주 같은 기술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고
미국 정부가 스텔스기 개발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낄 때인 1974년 4월,

기적 같은 타이밍에 스컹크 워크스의 레이다 개발 담당이기도

하고  또한 수학자이기도 한 37세의 데니스 오버홀저가
책임자 벤 리치에게 한 중요한 사실을 보고했다.


그때까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스텔스 항공기를

개발 할 대기술의 발견이었다.


데니스 오버홀저는 이 보물을 그 9 년 전에 소련에서 출판된

한 책에 실린 40 페이지짜리 논문 뒷 부분에서 발견했다.

9년 전에 발표된 논문이었으니까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모스크바 무선 공과 대학 수석과학자 표트르 우핌쳄프였다.

이 논문은 공산권 학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도 못하고 돌아
다니다가 CIA에 의해서 미국으로 밀반출되었다.


CIA는 이 논문을 미 공군에 넘겼고 미 공군 외국 자료부가
이를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논문은 각 항공기 제작사
관계자들에게 열람되었다. 


번역 된 논문의 영어 이름은

 'Method of edge waves in the physical theory of diffraction'

물리적 반사 이론에 의한 전자파 예각 파동 방법이라는 긴 이름이다.

그것은 전문가들도 정신 차려서 읽어야만 이해가 될까 말까한
난해한 수학 공식이었다.


소련 과학자 우핌쳄프는 1세기 전에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릭 맥스웰이 개발하고 독일의 전자 물리학자
아놀드 요하네스 조머펱트가 개량한 공식들을 다시 검토해서
이 공식을 유도해냈다.


이 복잡한 공식으로서 주어진 형상이 반사하는 전자파의 양을
알아 낼 수 있다.


자세히 설명한다면 이 공식을 사용하면 레이다가 쏜 전자파를 되쏘는
항공기 전면과 날개의 반사 단면 값을 정확히 계산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비행기 전체의 값을 구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 공식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전자파를 최소로

발사하는 항공기의 겉모양을 설계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의 전자파란 레이다에 거의 잡히지 않는

수준을 말한다.


그러나 1970년대 컴퓨터의 용량으로는 최소한의 전자파를 되쏘는
입체적인 3차원의 항공기를 통채로 설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공기 겉면을 수 천 개의 작은 삼각형의 2차원적인

평면으로 분해해서 이 작은 삼각형이 되쏘는 전자파를 합산하여
항공기의 전체의 반사 전자파를 합산해내는 고통스러운 절차를 걸치고
다시 되 집어가며 개발의 기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초기 개발 스텔스기 F-117은 온통 각이 진 평면 투성이의
다이아몬드형이 되었다.


이 소련의 한 무선 과학자가 제시한 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스텔스기

개발은 새로운 것을 찾던 스컹크 워크스 책임자 벤 리치의 단호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이미 켈리 존슨 아래서 SR-71이라는 초음속

전략 정찰기를 개발할 때 적국 소련의 신세를 단단히 진 일이 있었다.

엄청나게 빨리 나는 이 항공기는 공기 마찰로 발생하는 열에 강한
재질인 티타늄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서방 세계 어느 곳도 그런 티타늄을 생산하는 곳은 없었다.

단지 소련만이 풍부하게 티타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122587847135286.jpgSR-71 블랙버드

 

 

록히드는 CIA의 도움으로 소련제 티타늄을 대량 구입해서 SR-71을

제조 할 수 있었다.

벤 리치는 이 낯익은 소련제 기술이라는 도박의 카드를
집어 들기로 했다.


물론 벤 리치는 휘하 부장들과 상의 했다.
그들은 모두 찬성했다.


그러나 이 생소한 스텔스 프로젝트를 록히드 간부들이
다 반긴 것은 아니었다.

완고한 몇몇 고참 연구원들의 저항과 무시도 거셌다.

누구보다도 은퇴 했으면서도 아직은 고문직에 있으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켈리 존슨이 반기지를 않았었고
록히드의 사장 래리 키친도 주저했다.


그러나 주저앉아 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던

래리 키친은 단안을 내려 이 프로젝트를 어려운 회사 사정임에도

200만 달라라는 거금의 지출을 승인했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비였다.


1975년 4월 데니스 오버홀저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기본 설계를 시작했다.

그가 제시한 기본 설계의 모양은 마치 화살 촉 같은
모양 같기도 하고 다이아몬드 형 같기도 한 것이었다.


미 공군이 스텔스기의 개발을 의뢰 했을 때 록키드 사는
벌써 100만 달러의 돈을 이 프로젝트에 투입한 뒤였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극비리에 추진 되던 터였다.

록히드사가 다른 항공기 제작사보다도 스텔스기 개발에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비밀작전을 요구하던 CIA의 발주를 많이 받았던

영향과 이미 50년대에 개발에 착수했던 비밀 정찰기 SR-71기의 개발에

스텔스 기술을 적용하던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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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71 레이다 파 반사를 최소로 하는 초보적인 스텔스 기술이
적용 되었다

 

음속의 3.5배로 나는 SR-71은 실질적으로 스텔스기의 원조였다.

전자파를 되 쏘는 기체 하부 면을 최소의 곡선을 썼다던가
역시 옆으로 납작하고 낮게 만든 기수는 스텔스 성능으로
레이다 반사파의 성능을 대폭 낮추었고 기체 전체에

페라이트 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칠을 해서 레이다 파를
흡수하게 하였다.


그래서 SR-71은 그 뒤에 제작된 F-14 전투기의 백분의 일 수준의

스텔스 성을 가지고 있다.


그 뒤 역시 CIA가 발주했던 D-21이라는 무인 정찰기는 록히드가
만든 항공기 중에서 가장 스텔스 성이 뛰어난 항공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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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1 무인기- 주로 중국 정찰에 사용, 서해에도 추락하여
한국 어부들이 인양해오기도 했다

 

 

그만큼의 노우 하우가 축적되었었고 관심이 있었기에
데니스 오버홀저가 뜬금없어 보이는 소련인의 이론을 들고 와서
한번 해봅시다 했을 때 받아들일 기본 환경 연구 문화는
형성되어있었다.


데니스 오버홀저는 프로젝트을 개시하면서 벤 리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새로운 논리에 따라 만든 스텔스기가 록히드가 사가

만들었던 무인 정찰기 D-21보다 일 천배쯤의 스텔스 성을 가진다고

호언 장담했었다.
이 말에 어지간한 벤 리치도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디어 컴퓨터 설계에 따라서 10피트짜리 목제 모형이 만들어지고

1975년 10월에 모하브 사막의 야외 레이다 시험장에서
테스트가 있었다.


목제 모형이 설치 대위에 놓여졌다.
1,500피트 거리에서 천으로 가려진 목형에 레이다 빔을 쏘아본

관제사는 옆의 벤 리치에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리치씨, 모형을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받침대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벤 리치는  대답했다.

“무슨 소린가,목형은 그대로 있어.”

그 때 까마귀 한 마리가 목형의 위에 앉았다.

그제서야 레이다 관제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이제 잡았습니다.’


이론이 실물로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조작했던 레이다에 까마귀는 나타났지만 목형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데니스 오버홀저의 아이디어 실현 추진에 앞장섰으면서도 내심 불안한

감정도 버릴 수 없었던 벤 리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더욱 경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1975년 10월 드디어 노스롭과 록히드가 두 회사가 1차 경쟁에
통과해서 4 개월 내에 목형 실물대를 만들어서 미 공군의 테스트에
응하도록 통보 받았다.


미 공군은 150만 달라의 기본 개발비를 지급 했다

다음 경쟁을 위해서 록히드는 길이 38피트의 목형을 만들었다.

최종 테스트는 1976년 3월에 뉴멕시코주에 있는 화이트 샌즈의

미 공군 레이더 시험장에서 있었다.


이 곳에는 미국의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최신, 최고의

레이다가 5기나 있었다. 

록히드와 노스롭의 목제 모형들은 철저한 기밀 아래 장막으로
가리워지고 철제 받침틀 위에 얹어져 엄격한 한 달간의
테스트를 받았다.


록히드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승리였다.
록키드의 것이 노스롭 것보다 스텔스 성이 열배나 높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같이 참관했던 노스롭의 개발 담당조차도 어리둥절
할 만큼의 믿을 수없는 스텔스 성능을 록히드의 목형이 보여주었다.


1976년 4월초,

록키드는 경쟁에서 노스롭을 이기고 최종 선발자로 선택되었다.


록키드는 이미 개발을 해둔 스텔스성이 극대화된 목제화된 모델을

원형으로 2기의 실제 스텔스 전투기를 만들도록 요구하였다.


주어진 시간은 단 20개월이었다.

록히드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실제 스텔스기를 제작하였다.


시험비행에만 사용될 시작기였으므로 모든 것이 새 것일 필요는 없었고

원가도 절감해야 했다.


록히드는 입수 할 수 있는 부품은 무엇이든지 구해서 조립을
서둘러갔다.

조종석은 F-16기, 헤드 업 디스플레이는 F-18기, 관성 항법 시스템은
B-52것을 사용하는 것등이었다. 거의 중고품들이었다.


록히드는 불과 3,000만 달러 미만의 저예산으로 2년 만에 두 기의

스텔스기를 제작하였다.

최신 전투기 개발을 하면서 만드는 시험기라면 그 제작 비용이
서너 배는 더 드는 실정인데도 록히드는 대단한 비용절감으로
예산 절감과 시간 단축을 했다. 록히드는 이 전투기를 해브 블루
[have blue]라고 작명했다.


레이다뿐만 아니라 비행소리와 열의 방출도 줄이기에 최선을
다한 설계가 더해졌고 레이다를 피하기는 좋으나 비행하기나
조종하기는 매우 힘든 이 스텔스기를 조종 하기 위한 컴퓨터
조종 통제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었다.


1977년 12월 1일,

벤 리치가 스컹크 워크스를 맡은지 3 년만에 스텔스기는

테스트 파이럿 빌 파크에 의해 멋있게 하늘을 날라 올랐다.

저예산에 단 시간 내에 만들어진 이 항공기는 세계 항공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거대한 기술을 입증해주며 모든 시험비행을 마치고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스텔스기가 5대밖에 안 만들어졌을 때 1982년 이미 스텔스 부대인

제 37 전술 항공단이 편성되었고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앨 휘틀리

소령이 첫 비행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전술 항공단은 세 개의 비행대대, 도합 59기의 F117 나이트 호크로

명명된 스텔스 전투기로 구성하기로 하고 록히드사는 대당 4300백만

달러로 일 년에 8기씩 생산 공급하기로 하였다.


다른 보통 전투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비쌌지만 기술의 값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록히드사의 항변이다.


그 스텔스기는 파경으로 기울어져 가던 록히드사를 구해냈고 이어서
F22와 F35를 개발함에 절대적인 우위에 서게 만들어 록히드를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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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배치된 F117 나이트 호크기

 


스텔스기 19기로 이루어진 최초의 대대는 공군이 스텔스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한지 5년이 흐른 1980년 비밀리에 핵실험을 하던
장소이고 주변에 아무런 인가도 없는 샌 디아고 국립 연구소의
활주로에 창설되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토노파가 30킬로나 떨어진 아주 외진 곳이었다.

전투기는 야간에만 활동했고 그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미군은 스텔스기의 존재를 비밀로 했었다.

그러나 소문이 난무했고 전혀 스텔스기와 닮지 않은 가상의 상상도가

미군의 스텔스기라는 이름으로 돌아 다녔다.


1988년 공군은 더 이상 스텔스기의 존재를 감추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그 존재를 발표했다.

스텔스기는 1986년 리비아의 카다피를 폭격하도록 계획되었다가

출격 한 시간 전에 소련에 자칫 이 비밀 항공기가 알려지면

안된다는 국방장관 와인버거의 지시로 취소되었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인 것으로 알려졌다.


카다피 공격은 해군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했던 전폭기가 담당했는데

멀리서 레이다에 걸려 폭격 전 카다피가 도주할 시간을 주었고
극심한 대공포화로 폭탄들은 목표를 빗나갔다.

그가 숙소에 있었어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텔스기였다면 그림자처럼 그의 숙소 상공으로 스며들어가
침묵의 암살자처럼 그를 처치했었을지도 모른다.


스텔스기의 진가는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군대를 몰아내는 1990년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유감없이 발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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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17의 공중 급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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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17기 항공단의 37기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킹 카리드 공군 기지에

배치되었다.

여기서 작전을 개시한 스텔스기들은 16,000여발의 미사일과
30,000문의 고사포가 배치되어 있는 바그다드의 심장부부터
흔적 없이 침투해서 외과 수술하듯이 주요 목표들을  파괴하였다.

미사일 통제시설, 통신센터, 그리고 작전 사령부, 그리고 방공센터등

전쟁 수행 신경의 중추 신경들이 용서없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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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17기 나이트호크기의 스마트 폭탄 투하 - 스텔스기는 한두발의
스마트 탄만 적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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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폭격에서 스텔스기는 상상이상의 성능을 발휘했다.

거대한 노스타 공군기지에 대한 출격에서 이 기지를 지키고 있던

15개의 방공 미사일 부대 모두를 모두 파괴해서 B-52의

융단 폭격을 가능케 했다.


사담 후세인의 입노릇을 하던 CNN 피터 아네트 기자가 전화 중계

생방송 중에 계획과 일초도 안 틀리고  전화국을 폭격하여

방송을 중단시켜서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었다.


이라크의 핵 발전 연구 시설을 의 F16기등의 72기의 항공기가
출격했으나 격심한 대공포화로 단 한발의 폭탄도 명중시키지
못했지만 8기의 스텔스기가 두기의 급유기 지원만 받고서 출격하여
목표를 전부 파괴 시켰다.


스텔스기는 계속 출격하여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강에 걸린 43개의

교량 중 39개의 교량을 파괴하였다.


이라크 전이 끝나고 미래의 전투기의 스텔스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었다.


스텔스 전투기는 작전에 참가한 전체 연합군 항공기의 2퍼센트밖에

안 되었고 전체 연합군기 출격 횟수의 1퍼센트 밖에 안 되는

1,271회 밖에 출격하지 않았지만 공격 목표의 40퍼센트의 파괴했고

명중률은 75퍼센트나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막의 폭풍 작전은 완전히 F117기의 무대였다.


1974년, 스컹크 워크의 책임자로 지명되어 스텔스 기의

탄생을 연출 했던  벤 리치는 사막의 폭풍이 시작되는 날 정년을 맞아

스컹크 책임자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이라크의 심장 바그다드를 치러 첫 출격했던 한 조종사는 작은

미 성조기를 가지고 출격했다가 돌아오자 그 성조기를 벤 리치에게

선사했다.   


자국민이 제시한 기술을 눈도 거들 떠 보지도 않았던 러시아는

한 미국의 기업이 가져다가 F117기라는 꿈같은 전투기를

만들어 낸지 30년이 지났고 단물을 다 빼먹은 그 전투기를 은퇴

시키는 이 시점까지 별다른 스텔스기를 실전에 배치하고 있지를

못하고 있다.


미국은 소련의 기술로 B2폭격기 F22 F35등을

개발해냈는데도 러시아의 대응은 너무 느리고 소극적이다.


스텔스기 개발의 기본 이론을 발표했던 소련의 표드르 우핌체프 박사는

1990년 캘리포니아의 UCLA에 와서 전자기학을 강의했다.

그는 자기 논문이 미국의 스텔스기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 스텔스기가 하늘을 날아 다니는데도 그가 제시한
이론은  소련에서 여전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사실을 알고도 별로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간단히 말했다.

“소련의 나이 먹은 설계자들은 내 이론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


이 말은 젊은 데니스 오버홀저의 제안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완고한 사람들의 저항과 싸우면서 스텔스기를

개발해간 벤 리치의 기업 마인드와는 정반대의 상황 때문에
소련의 아까운 기술 하나를 미국에 선사한 것이 되었다.

자유경제 체제와 민주주의가 인간 창의력 발휘에 통제경제와
전체주의에 어느 정도 월등한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고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십과 조직 문화가 이끄는
스컹크 워크스 같은 조직만이 해낼수 있는 경영의 폭발적 생산성을
입증해주었다는 좋은 사례라고도 할수가 있다  .


 

 

아공 죄송합니다.. 오늘 야간대기인데 벨이 울리네요 ㅡ,.ㅡ;;

 

출동입니다 ..

 

상황종료되면 자료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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