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둘리틀 특공대...3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06 19: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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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특공대 제 1번기 / 둘리틀 중령 탑승기. 기체번호 2344

 

 

한편, 던칸 대령은 하와이로 달려가 니미츠 제독과 도쿄기습작전에대하여 깊히 의논하였다.

니미츠는 자신이 신임하는 윌리엄 할제(william halsey) 중장의 제16기동부대에

이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 하였다.

그리하여 던칸 대령은 태평양 최고사령부(commander in chief Pacific)에서

도쿄기습작전을 철저히 구상해야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 둘리틀 특공대 작전에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니미츠 태평양함대 사령관,

아놀드 육군항공대 사령관, 어네스트 킹 제독,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장 윌리엄 할제,

프랜시스 로우 대령, 도날드 던칸 대령, 제임스 지미 둘리틀 중령

이렇게 꼭 7명 뿐 이었다. 작전계획이 수립되자 어네스트 킹 제독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작전의 세부내용을 보고하게되었다.

 

 

1942년3월 3째주, 던칸 대령은 호놀루루에서 " 지미, 말에 오르라" 라는 전문을

워싱턴으로 띄웠는데 지미는 둘리틀의 애칭으로서 그에게 작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 이었다. 작전개시를 전달받은 둘리틀은 훈련 중 손상된 2대의 폭격기를

제외한 22대의 폭격기들을  최종점검을위해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로 보냈다.

 

 

던칸 대령은 항모 호네트의 함장 마크 미처(Marc A. Mitscher) 소장을 만나기위해

 샌디에이고로 날아갔다. 

던칸에게서 도쿄공습에관한 작전보고를받은 미처는 매우 기뻐했다.

던칸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둘리틀 특공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할제의 보좌관 마일즈 브라우닝 대령은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항모 호네트와

호위함들에대한 회의를 열었다.

호네트에게는 2척의 순양함(네스빌과 빈센네스), 급유함 시마론, 그윈을 비롯한

4척의 구축함이 지원되며 4월2일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리하여 항모 호네트는 이미 버지니아를 출발하여 파나마운하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달려오고 있었다.

 

호네트는 3월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하였다.

122596703580016.jpg항모 CV-6 엔터프라이즈(좌) 와 CV-8 항모 호네트

 

122596706591030.jpg뉴올린즈 급 중 순양함 빈센네스(CA-44).SOC-3 씨걸 수상기가 택싱 중이다(1942년 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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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헴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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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사콜라 급 중 순양함 솔트 레이크 시티(CA-25)

 

 

 

할제의 항모 엔터프라이즈는 솔트 레이크 시티, 노스햄프튼등 2척의 순양함과

급유함 샤빈, 그리고 벤험을 비롯한  4척의 구축함을 거느리고 4월7일

하와이에서 출항하도록 계획하였다.

 

각기 출발한 두 함대들은 4월12일 일요일에 태평양 상 동경 180도 부근에서

합류하여 제16기동부대(Task Force)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동부대는 일본으로부터 1270km 떨어진 지점까지 항해하여 해상급유를

실시한다음 급유함을 돌려보내고 다시 도쿄로부터 670km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들어가 폭격기들을 출격시키도록 최종 결정되었다.

 

할제는 "만약 우리가 들키지 않고 계속 항해할 수 있다면 둘리틀 특공대를

도쿄로부터 670km지점까지 데려다 줄 것이지만 만약 중도에 발각된다면

즉시 그지점에서 그들을 출격시켜야만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1942년 3월31일,  세크라멘토에서 점검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22대의

폭격기 중 15대가 크레인을 이용하여 항모 호네트의 비행갑판에 탑재되기 시작했다.

비행갑판아래는 육상 폭격기가 들어갈만한 공간은 없었다.

때문에 비행갑판에는 15대의 B-25B 폭격기가 항해도중 만나게될 강한바람과

파도에 대비해 단단히 고정 되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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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호네트 함상에 탑재된 둘리틀 특공기 B-25B. 뒤의 기체는 프로펠러가 제거되어져있다.

항모에 탑재되기 전 모든 폭격기는 개량된 3엽 프로펠러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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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특공대 제 4번기. 기체번호 2282.조종사- 에버넷 웨인 홀스트롬 소위. 도쿄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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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특공대 제8번기. 기체번호 2242(2244로 표기된 문서도있음. 나중에 번호가 바뀐 듯함) 조종사- 에드워드 요크 대위/ 도쿄공습/ 블라디보스톡 착륙. 소련에 기체 억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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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 기관총좌에 검정 페인트 칠을한 위장 막대기 기관총열이 보인다.

 

 

둘리틀 중령은

실제작전에는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계획 되었었다.

그러나 둘리틀 중령은 자신도 참가해야함을 강력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둘리틀은 자신이 선도기 임무를 맡아 먼저 폭격하여 야간에 화재를 일으키면

부하들이 그 불빛을 기준으로 공격해야 효과가 있을것이라며 아놀드 장군을 설득했다.

 

둘리틀은 이러한 중요한 작전에 참가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다.

만45세의 둘리틀은 육군의 평균 연령으로 따지자면  사실상 경로당 클래스였으며

또한 한번도 실전에 참가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주어야하는 둘리틀을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아놀드 장군은 둘리틀의 작전참가를 반대하였으나

결국 절친한 친구인 둘리틀에게 두손을 들고 말았다.

 

1942년4월1일. 원래는 총 18대의 폭격기를 탑재할 계획이었지만

항모의 공간은 15대 분 밖에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둘리틀이 1대를 더 탑재하자 요구하여 관철되었다. 

호네트 함장 미처가 비행교관 헨리 밀러 중위에게 반드시 이함에 성공할 수

있다는 다짐을 듣고서 이를 수락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쿄공습에는 결국 총 16대의 B-25B 미첼 폭격기와 모두 80명의

특공대원들이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1대가 더 탑재되어  명단에서 빠졌던 리차드 조이스 중위가 작전에

참가하는 행운을 맞게되었다.

 

 

 

 

 

1942년4월2일, 둘리틀 특공대를 태운 항모 호네트와 호위함들은 아침부터 출항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둘리틀 중령은 워싱턴으로부터 걸려온 긴급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죠지 마샬 장군 이었다.

장군은 행운을빌며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드디어 일본의 자존심에 한방먹일 둘리틀 특공대를 태운 기동함대가 항을 출발하였다.

함대가 출항하자 미처 소장은 여태까지 비밀로해왔던 목적지를 알려주기로 결정했다.

모든 함선에 "우리의 목적지는 일본 도쿄이다" 라는

미처의 메시지가 전달되자 흥분한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비로소 자신들의 목표를 알게된 해군병사들의  사기는 최고의 절정에 달했었던 같았다"

라고 미처는 회고했다.

 

그동안 힘든 훈련을 거듭해왔던 둘리틀 특공대원들도 자신들이 어디로,

무엇을 하러가는지를 그제서야 알게되었던 것이다.

 

해군장교와 수병들은 조종교육교관이었던 헨리 밀러(Henry J. Miller)해군중위가

항모에 승선해 있었기 때문에 폭격기를 알라스카에 수송하는 임무인 것으로

추측하고있었다.

왜냐하면 밀러 중위가 알라스카 기지에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밀러 중위는 둘리틀 특공대의 비행교육이 끝나면 자신의 부대로 복귀하도록

되어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는 폭격기 탑재를 감독하기위해 왔을 뿐이었다.

그러다 둘리틀 중령이 함께가야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적하목록에도 없는

승선자가 되어버렸다.

그에게는 폭격기가 모두 이함할 때 까지 모든 기술적 책임이 맡겨졌다.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한 호네트는 정오무렵 쯤엔 금문교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4월3일, 추가로 참가하게된 1대의 폭격기에대한 예비 부품들이

해군 소형비행선(L-8)로 공수되어졌고 카탈리나 비행정들은 함대의 전방에서

정찰비행활동을 펼쳤다.

 

둘리틀 특공대원들은  항모 호네트의 정보장교로부터 일본의 군수산업시설물과

역사등에관한 설명을 들었다. 또한 호네트의 항해사로부터 항법에대한 재교육도

실시되었다. 그리고 군의관 출신의 특공대원인 로버트 닥 화이트 중위는 동료들에게

비상 시 응급치료 방법을 설명했다. 기관총수들은 호네트에 메달려 세차게

펄럭이는 깃발을 향해 사격연습을 하였다.

 

 

폭격기 조종사와 대원들은 모두 육군 항공대 소속이었다.

장교들은 호네트의 해군장교침실에서 잠을 자야했는데

해군장교들은  아주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잤으나  특공대원

자신들은불편한 간이 침대를 배정 받았다고 불만이 많았다. 

또한 해군수병들은 이들의 명령에 전혀 따라주지않았다.

타군에대한 멸시 때문 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들의 임무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된 해군장교들은 스스로 편안한 침대에서 내려와

구석의 간이침대를 펼쳐 잠을 잤다.

수병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예우를 다했다.

해군병사들은 그들이 자살하러가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고한다.

2주 정도의 항해기간동안  서로 친밀해졌고 포커 게임에서

둘리틀 특공대원들이 지더라도 수병들은 돈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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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과 마크 앤드류 미처(Marc Andrew Mitscher)호네트 함장.

 

용감하고 유능한 지휘관인 미처소장은 남태평양 육상기지 항공사령관이되며

그때 야마모토 사령장관이 탑승한 기체를 요격하는 이른바 부겐빌 상공의 공작새를 잡는

"복수작전(operation vengeance)"을 지휘하게된다.

진주만 기습작전의 총 책임자였던 야마모토는 솔로몬 군도의 일본군기지들을

방문하기위해 라바울기지에서 폭격기를타고 이륙한다.

이 정보를 미리알고 있던 미군은 그 길목에 찰스 린드버그의 기술지도로

연료탱크를 개조하여 항속거리를 늘린 라이트닝 전투기를 띄웠다. 

야마모토는 미군 P-38 라이트닝의 기습을받아 탑승했던 폭격기가 격추당하여 

1943년4월18일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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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번호 2249. 조종사- 찰스 로스 그리닝 대위의 폭격기 아트 "해리 캐리어(hari carrier)"

 

찰스 그리닝 대위는 나고야와 요코스카 항의 해군시설과 함정에 폭격을 가했다. 

기체는 상공에서 4대의 일본기로부터 공격당했으나 기관총수 맬빈 가드너 병장이

1대를 격추시키고 도주하면서도 도쿄항만의 초계정 3척에게도 기관총 공격을 가했다.

가드너 병장은 도쿄공습작전을 끝낸 뒤 계속 아시아전선에 남았다가

1942년 6월2일 폭격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다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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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를 호위 중인 경 순양함 네스빌

 

 

둘리틀 중령은 만일의 경우를대비하여 폭격목표물에 대하여 1번과 2번의 순위를

정해놓았다. 기상상태나 적의 공격 때문에 1번 목표물에대한 폭격이 여의치 않으면

2번 째로 정해진 목표물을향해  비행하여 폭격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폭격지역의 목표물을 조종사가 임의선택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으나,

특히 황궁, 병원, 학교, 가옥등 군사관련 시설물이 아닌 곳은 절대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둘리틀 중령의 이같은 주의는 10여일간 항해하는

동안 하루에 두세 번 씩 만날 때 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둘리틀 중령은 "공격당일 오후 늦게 항모를 출발하여 야간에 도쿄를 공습하게된다.

우선 선도기가 먼저 공습하여 화염을 일으키면 본대가 이를 기준으로 나고야,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로 날아가 폭격한다.  폭격이 끝나면 항공유도 등을따라

중국의 중간기지에 착륙하여 연료를 보급받은 후 최종 목적지인

중경으로 비행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특공대의 계획에반해 주변의 여건은 너무나 좋지 않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특공대가 연료를 보급받도록 되어있는 동부지역 비행장 쪽으로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4월10일경부터 제16기동부대가 서쪽으로

접근하는 동안 대폭 늘어난 통신량에 주목하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함대가 접근해오고 있으리라 짐작은 했으나 항속거리가 짧은 함재기를

발진시키고 다시 회수하기위해서는 최소한 480km 이내까지 항모가 접근해야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진주만 공격 이전부터 일본은 본토로부터 1000km 바깥의 해상까지를

본토방어의 저지선으로 설정하여 곳곳에 위장된 어선들을 배치시켜 두었다.

 

이 위장어선들은 고성능무전기를 장비하였고 미국함선이나 잠수함, 또는 항공기를

발견하면 즉각 본토로 알려야하는 임무를띄고 있었다.

이들의 경고를 받으면 항속거리가 긴 육상발진 항공기들이 출격하여 적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4월10일경부터 미군의 무선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해군과 공군에 초계 활동을

철저히 하도록 경계령을 발동했다. 이것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네트가 서로 합류해야하는

지점으로 들어서면서 양측간에 활발한 교신이 이루어졌던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본토로부터 약1600km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갑자기 미함대의 통신이 급감하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4월13일 새벽. 항모기동부대가 북위 38도, 동경180도 상에서 서로합류한 후 부터는

할제가 보안유지를위해 상호 교신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수중에는 2척의 미국 잠수함이 은밀히 항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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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 뒤에 호위 중인 순양함 빈센네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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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 옆으로 구축함 그윈과 경 순양함 네스빌이 항해 중이다.

122596770053995.jpg호네트 뒤에 보이는 함선은 경 순양함 네스빌이다.

 

122596774631588.jpg구축함 그윈

122596777414290.jpg구축함 그윈과 경 순양함 네스빌

 

 

 

 

 

 

 

 

4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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