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도라!도라!(태평양전쟁) ....3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26 19: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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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발발 2의 플라잉 타이거즈를 이어서...

 

 

해외에서는

프랑스가 140대를 주문하자 커티스 사는 수출용 기체인 H-81A를 제작하게 된다.

이미 프랑스형으로 마킹까지 끝낸 이들 기체들은 결국 프랑스가 침략당하자

당연히 수출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계약은 다시 영국에 의해 부활하게 되고

140대는 토마호크라는 이름을 달고 영국으로가게 되는 운명을 맞는다.

미국은 이기체들을 빨리 영국으로 보내지도록하기 위해

미군용 기체의 보급을 미루는것에 동의하였다.

또한 소련으로도 16대가 보내진다.

프랑스 수출용에는 7.5mm FN 브라우닝 기관총이 장착되었으나  7.7mm로 바뀌어보내진다.

 

영국은 실전에 투입된 P-40이 방탄장갑과 방탄유리,

그리고 자동방루식 연료탱크가 없어 전투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내렸다.

결국 독일의 영국침공은 실패하였고 그리하여 대부분의토마호크MK I을

영국내에서 훈련용으로만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영국의 첫 번째 토마호크 장비부대는 제 112비행대로서 비행대는

글로스터 글라디에이터를 토마호크로 대체하였다.

이 비행대는 기수에 상어이빨 마킹으로 유명해지나

중국의 플라잉타이거즈도 이를 채택함으로 해서 오히려 더 유명세를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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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403비행대소속의 토마호크 MK I (1941년 4월)

 

 

 

아직 납품되지 않은 기체들은 1940년 9월부터 주익에 2정의 30구경기관총이

더 장착되고 방탄장갑과 방탄캐노피 등을 채용하며 연료탱크는 피탄되더라도

연료가 새지않는 방식으로 바뀌는등 전투력과 생존성을강화시킨 P-40B와  C형으로서

제작되어진다. 이런 개량을 거치자 결국 기체무게가 증가하여 원래 3270kg정도였으나

3460kg이되었으며 그 때문에 최고속도도 떨어졌다.  

영국도 110대를 도입하려하여 커티스 사는 수출형P-40B(H81-A2)를 제작하게되는데

영국형으로는 토마호크 MK IIA형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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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토마호크의 방탄캐노피의 방탄능력을 보여주는 그림.

총탄이 방탄유리를 관통하지 못했다.

 

 

그리고 1941년 4월부터는 P-40C(영국 MK IIB)형이 제작되어 나오게 되는데

이기체도 1150마력 앨리슨 V-1710-33엔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134갤런

연료탱크를 탑재하고 추가로 동체아래에 52갤런짜리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할 수

있게 제작되었으며 무전기도 교체되었다.

 

C형은 B형과 흡사했지만무게가 더 증가하여 15000피트상공에서 552km/h로서

속도도 떨어지는등 성능이 대폭저하되었다.

P-40B와 다수의 C는 하와이와 필리핀 클라크 비행기지 등에 배치되었으며

10여대의 C형은 하와이의 제18추적비행단소속 제44추적비행대에 보내졌다.

나중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였을때 약 60대의 기체가 날아보지도못하고

그자리에서 파괴되어 버리고 오직 25대만 살아남았으며 필리핀에서도

유사한 피해를 당하게된다.

 

영국이 무려 930대를 도입하는동안 미국은 193대를 발주하였다. 

영국은 이중에서 195대를 독일의 침공에 맞서도록 무기원조형식으로서 소련에 보낸다.

소련에 보내진 기체들은 레닌그라드와 기타 지역의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소련으로서는 미국제 항공기를 사용하게되는 첫 번째사례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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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용  P-40E형 토마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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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비행장의 P-40B(토마호크 MK IIA)와 병사들 (1942년.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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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주익에 설치된 149갤런 자동 밀봉식 연료탱크(self sealing)

 

 

 

또한 영국은 중국에도 토마호크를 판매하게 되는데 이것이 플라잉타이거즈용

기체가 되는 것이다. 영국은 제조번호 AK100~500중에서 36대, AM370~519중에서

64대를 빼내어 총 100대의 기체를 중국에 보냈다.

 

이것은  나중에 생산되어지게 되는 P-40D(키티호크)중에서 100대를 보충해줄테니

토마호크 MK II 100대를 중국으로 보내라는 미국의 제의에 영국이 동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중국에 항공기를 판매할 입장이 아니었다.

때문에 영국이 중국에 항공기를 재수출한 것으로 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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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40E

 

그리고 중립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터키에도 소 수의 기체를 보내고 이집트에도 보내져 

토마호크 MK II는 1941년 10월부터 중동지역 전투에서 활발히 사용되어진다.

기체들은 주로 퇴각하는 추축군을향해 기총소사 임무를 맡았는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거의 전설이 되었다한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비롯하여 호주공군에도 3개의 비행대가 장비하는등

P-40은 2차대전 초기부터 거의 모든 전장에서 활약하는기체가 되었다.

영국은 원활한 군수유지를위해 30구경 기관총을 제거하고

자국의 303구경(7.7mm)기관총으로 교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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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한 루즈벨트의 요구로 일본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어야 했다. 

미국은 영국, 네덜란드를 설득하여 석유수출을 금지 하도록 만들어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고나섰다.

국내 수요는 물론 중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막대한 양의 석유가 필요한데 국내비축량 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은 국가의 존립마저도 흔들릴 수 있는 위급상황이었다.

미국은 1944년 중반이 되면 일본국내 석유비축분이 완전히 바닥날 것이라 판단하였다.

석유를얻기위해서는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야할

판국이었지만 그러기에는 그동안 흘린피가 너무 많았다. 

만약 여기서 굴복하여 미국의 요구에 응한다면 그들은 앞으로도 석유금수와 같은

칼을 들이대며 일본의 정책에 일일이 제동을 걸어올지도 모를일이었다.

 

일본은 1941년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치욕보다는 차라리 자력으로

석유를 얻어내기로 결정하여 결국 전쟁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일본국민 여론도 수치스러운 일은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어전회의에서는 미국과의 외교교섭을 계속하되 만약 10월 10일까지도

타결되지 못하여 석유와 기타 자원의 금수조치가 해제되지못할 경우

미국, 영국, 네덜란드령 영토들에 공격을가하기로 결정하였다.

단, 공격날짜를 잡아 공격부대가 출항하였더라도 그동안에

협상이 타결되어지면 공격부대를 되돌리도록 되어있었다.

 

10월 10일까지 미국과의 교섭이 계속 난항을 겪자 일본은 전시체제로 전환하였고,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도조 히데키가 수상자리에 앉게되었다.

무능한 수상을내치고 육군대장이며 수상이된 도조 히데키는

협상은 계속 시도하되 뒤로는 적극적인 기습공격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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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30일의 진주만

 

 

운명을걸고 미국과 한판승부도 불사하겠다고 마음먹은 일본군령부는

1941년 9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제안한

진주만의 미함대공격에 대해서는 아직 그 결정을 명확히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9월 1일, 도쿄의 육군 대학에모인 군령부 고위장교들은 지도를 펴놓고

도상작전을 설명하는 야마모토의 기습공격에 대하여 심도깊게 논의하였었다. 

그러나 작전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야마모토가 워낙 강하게,

그리고 자신있게 공격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그 대담하고 위험하기 짝이없는

진주만 기습공격작전을 채택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해군이 야마모토의 작전을 반대했었던 이유는 6척이나 되는 항모와

그 호위선단을 이끌고 어떻게 그 먼거리를 들키지 않고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도중에 미국에 발각되어 전투라도 벌어지면 기습은커녕

되려 큰피해를당할 수도 있음을 걱정하였다. 

그렇게 위험을 무릎쓰고 굳이 미함대를 공격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작전계획을 전면적으로 반대했으며 진주만보다는

필리핀을 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계속 진주만공격을 주장하며 

그들에게 강한 자신감과함께 성공을 약속하였다.

 

야마모토는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최대의 장애물은

결국 미국함대가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자신들이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미국이 해군의 주력을 하와이로

전진배치한 것은 자신들의 남방진출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서, 

미국함대를 태평양상에서 완전히 제거해야만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은 채 

남방을 점령하고 네덜란드 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지대에서

석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미국함대를 치지않고 남방점령에 나서게 된다면 틀림없이

미국함대가 자신들을 치러 달려올 것이었다.

미국함대를 섬멸하면 미국이 오랫동안 태평양상으로 진출하지 못하게될 것이고

그동안 자신들은 착실히 식민지들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광활한 태평양 전체를 점령한 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국이 소모전에 걸려들게 된다면

결국은 화평을 제의해 올것이고 아울러 일본의 점령을 인정하게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너무 오랜시간이 소요되면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다.

미국의 거대한 공업기술과 그 힘이 군수산업으로 전환하게된다면...

야마모토는 그 무서운 잠재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야마모토는 처음 1년 동안은 승산이있으나 그러나 2~3년이 지나면

승리를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해왔던

야마모토는 조국이 미국과 전쟁을결심 하였다면 진주만 공격,

바로 이 방법밖에 다른도리가 없다고생각했다.

그 후 진주만 공격이 성공했을 때  

"우리는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불안한 생각이들었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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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해군 군령부총장

 

만약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임하겠다고 까지했던 야마모토의 제안을 나가노 군령부총장(해군참모총장)이 받아들여 11월 15일 자로 승인하게된다.

 

이 때부터 일본해군은 기습공격을위한

훈련에 돌입하게된다.

 

 

 

 

진주만 기습공격의 모델로서는 1940년 11월 11일, 영국해군이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시킨 21대의 쇼드 피쉬 복엽기가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항에 잠입하여 항에 정박 중이던

이탈리아 전함들과 함선들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던 예였다.

 

이탈리아군은 수심이 얕아 어뢰공격에 대한 불안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타란토 항도 진주만과 흡사해서 수심이 평균 12m로 얕았는데

영국은 어뢰를 개조하여 저 수심에서도 공격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도 항모에서 발진한 구식 복엽기가 이루어낸 기습적인 대성공이었으며

거함거포주의에서 일탈한 획기적인 공격전술이었다.

이제 그뒤를 이어 복엽기가 아닌 최신식 단익기를 사용한

일본의 기습공격이 시도될 것이었다.

 

일본군은 비밀리에 진주만 공격지와 지형이비슷한

가고시마에서 기습공격훈련에 돌입했다.  

선발된 일본군 정예 조종사들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에서도 공격가능한 어뢰가

만들어지기전까지 수 없이많은 모의 기습공격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오아후 섬의 모형과 태평양함대의 함선 식별훈련에 들어가

미함선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연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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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EY SWORDFISH 쇼드피쉬 MK I

 

18인치 (45.7cm)훈련용 어뢰를 장착한 모습이다.
쇼드피쉬는 690마력의 9기통 브리스톨 페가수스 III M3엔진을 탑재하고

223.7km/h의 속도로 3779.5km를 비행할 수 있었다.

승무원 3명에 100발들이 원형 드럼탄창을 사용하는

빅커스 K 기관총1정과 600발의 실탄을 탑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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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드피쉬는 조종사, 항법사겸 폭격관측사, 무전사겸 후방기총사수 등 3명이 탑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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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미리 빅커스K형 기관총 사수.

빅커스 K기관총은 초당 746.8m의 발사속도로서 분당 1050발을 발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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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항의 이탈리아 해군을 공격했던 쇼드피쉬에 장착된 18인치 어뢰는

176kg의 TNT를 탑재하고 27노트(50km/h)의 속도로 총3200m를 주항할 수 있으며

하이스피드로 셋팅하게되면 약40노트(74.2km/h)의 속도로 1370m의 거리를 주항할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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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뚫고 타란토 항을 기습공격하는 쇼드피쉬의 활약을 그린 일러스트
한 시간 간격을두고 두번에 걸쳐 감행된 공격에서 총 10대의 뇌격기와

8대의 폭격기가 조명기의 유도에따라 어뢰와 폭탄을 투하하여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게는 자신들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진주만 공격에대한 충동을, 미국에게는 경고를 던져준 셈이되었다.

미국은 스타아크 해군 작전부장으로 하여금 진주만의 방어상태를 긴급히 점검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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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항을 기습한 쇼드피쉬의 공격을받고 격침된 콘테 가보르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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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항공어뢰가 항모갑판에 올려져있는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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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기습공격훈련 중인 항공기에서 바라다본 가고시마                           

 

 

 

야마모토는 1905년 대마도해협에서 벌어진 러시아함대와의 전투에

해군소위 후보생으로서 참전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35세의 나이로 1919년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의 해군무관으로도 근무했던 경력을가져

미국을 잘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거함거포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해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건조를 이루어낸 일본 항모보유의 공신이었다.

또한 항모에 필요한 해군 항공대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야마모토는 1935년, 해군 소장의 계급으로서 제2차 런던군축회의에 해군수석대표로

참가하여 일본에 불리한 톤 수를 규정한 군축조약에서 탈퇴하는데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으려하자 이에 반대했었다.

그러다 미국과의 전쟁도 반대하여  극우주의자들의 암살위협을받자

미리 유언을 써놓기까지하였다.

해군은 신변에 위협을받는 야마모토를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발령을내어

암살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처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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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 야마모토는 1918년에 히로꼬와 결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해군..... 그러나 일본은 천천히 조용하게 진주만을 향해서 기습의 그림자가 다고있었는데....   그러나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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