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기 꽈배기비행 개발한 영웅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30 10: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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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기의 꽈배기 기동 비행


힘이 약하면 꾀로 이겨라.

아주 흔히 듣는 덕담 수준의 말씀이다.

그게 쉬운 일이면 세상의 기운 센 사람들은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말인데 세상사가 아니라 전장에서
이 말은 덕담이 아니라 절실한 필수 사항이 된다.


무기의 성능이 부족하면 뭔가 그 무기의 약점을 보완할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나폴레온은 그의 시대 아직도 부족했던 대포의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해서 포들은 여러 문의 대포를 한 목표를 향하여
집중 사격하는 방법으로 극복해서 막강한 포병 화력을
프랑스 육군의 주요 전력으로 활용했었다. 


아프리카 전장에서 독일군 사령관 롬멜은 적군에 비해 부족했던

기갑력을 88밀리 대공포를 동원해서 해결했었다.
적 전차들에 비해서 장거리 사격 능력과  파괴력을 발휘했었던
88미리 대공포는 오히려 전장의 주역 가까운 역할까지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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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mm 대공포.
아프리카에서는 비행기보다 탱크를 더 많이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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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말레이 반도 진격 때 전차를 앞세운 기동 작전을 폈는데

절대 부족했던 차량 부족을 자전거로 편성된 은륜(銀輪)부대를
투입해서 큰 성과를 보았다.


이와 같은 장비의 열세를  창의력으로 극복한 사례를 태평양
전쟁초기 미 해군 항공대가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미 해군 항공대는 개전과 동시 태평양 전역에서 얼굴을 내민

일본 해군의 제로 전투기의 대활약을 불안 속에 지켜보아야 했다122800913399174.jpg
제로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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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일본 해군의 제로 전투기와 대결을 했었던 대부분의
전투기들은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P-39와 P-40이었다.


개전 전 미 군부는 이들 모델의 전투기들이  최신형의 전투기로서

일본 전투기들을 충분히 대적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전이 되고 보니 미군의 예상은 영 빗나갔다.

미군의 P-39나 P-40는 일본 해군 제로기와의 투쟁에서

볼품없는 열세를 금치 못했다.


이런 차이는 제로기를 조종하던 일본 해군 조종사들이

중국 전선에서 닦은 노련한 조종 실력에서도 왔었지만

미군 전투기들보다 더 앞선 제로 전투기의 성능에서도 왔었다.


미국 해군은 제로기에 혼난 미 육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경험담도 귀담아 들었을 뿐더러 산호해 해전에서 직접

일본 제로 전투기와 격돌해보고 말로만 듣던 제로기의

우수한 성능을 인정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로기는 미군이 가진 어느 전투기보다도 선회 능력이 뛰어 났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원을 그릴 때 그 직경이 어느 미군기보다도

훨씬 짧았다는 말이다.

이 선회 반경이라는 능력은 짧을수록 적기와 공중전을 벌이기가 좋다.


제로기는 우수한 선회력에 더해서 미군기보다 우수한 속도와 

우수한 상승 능력을 가졌었다.


더해서 제로기가 가진 20mm 에리콘 기관포 무장 역시

미군기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여러모로 보아도 미 해군의 F4F기 역시 제로기에 비해서

한 수 뒤 떨어지는 전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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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F 와일드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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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능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미해군의 조종사
한 명이 대단한 창의력을 발휘해서 제로기를 상대로 하는
공중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이 기동은 창안자의 이름을 붙여서 전 미해군의 표준 전술로

채택이 되어 모든 해군과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교육되었다.


미군 조종사 루프베리의 이름이나 독일 조종사 임멜만의
붙인1차 세계 대전때의 공중전 기동은
있었지만 2차 세계 대전 때는 개인의 이름이 붙은 공중전 기동은 
이 사람의 예를 빼놓고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일본 제로기의 선회력을 상쇄하기 위해서 고안된 이 비행술은

태치의 위브[Thach's weave]라는 이름이 지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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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항공대 조종사
존 S.태치[John s.Thach]중령은
개전 초기 미 해군 정보
당국이 배포한 제로기의 운동성과

상승력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 선회력이
열세인 F4F를 위해서 이 비행술을
고안해 냈다.


그는 실전을 경험하기 전부터인 미 서해안 산디에고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우수한 성능의 제로기들과
미 해군 전투기들이 붙는  공중전의 다양한 전술을  연구했다.


저녁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서 제로기의 우수한

운동성을 상쇄시킬 방법을 궁리해 보고 다음 날에는

하늘로 비행기를 몰고 올라가서 이 방법을 시험해보았다.


저녁마다 책상위에서 성냥개비를 가지고 공중 전술을 연구하던

태치 중령은 드디어 [그가 빔 디펜스 포지션이라고 명명했지만]
나중에 전 미군 조종사들에게 태치의 베짜기[Thch'weave]로
알려지게 된 전술을 개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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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ve라는 단어가 베짜기,
직조[織造] 라는 뜻이지만
차라리 꽈배기 기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독자들에게
이해가 빠를 듯하다.

이 전술은 나란히
수평 비행을 하는
두 기의 항공기, 또는
두 쌍의 2 기 1 조가
[합계 4기]실행 할 수가 있다.

한 기,또는 두 기가 공격하는 적기의 미끼가 되고 옆에서 수평으로 비행하던 다른 한 기, 또는 다른 한 조가 적기를 덮치는 낚시가 된다.


서로 나란히 수평 비행하는 전투기들은 일단 방어 비행이 개시되면

교차적으로 상대방의 후미로 접근하는 꽈배기 비행을 한다.


서로 후미로 접근했다가 X자로 교차해 갈라져서 다시 상대

후미로 접근하는 비행을 한다. 

마치 두 기가 서로 교차해가며 마치 꽈배기나 베짜기, 또는

새끼 꼬기의 지그재그의 비행을 하는 것 같다.


쉽게 설명하면   동료기의 꼬리를 서로 엄호하는
갈짓자 비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 비행중에 적기가 미끼역의 한 기를 공격하면 동료기는
낚시역의 동료기는 적기를 낚시에 걸어 넣을 수가 있다.


이 꽈배기 기동이 정확히만 되면 아무리 제로기가 운동성이 좋다해도

측면에서 덤벼드는 낚시 역의 엄호기 조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태치 중령은 밤새 고안했던 꽈배기 꼬기 비행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는 그가 비행 학교를 갓 졸업했던 신참 소위들 중에서 특별 선발하여

자기 편대원으로 삼았던 출중한 조종사 에드워드 버치 오헤어 소위를

4기의 한 편대를 리드하게 하고 자신이 4기의

다른 편대를 리드하고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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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헤어.
나중에 에이스가 되었지만 1943년 전사.
시카고에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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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헤어 편대가 공격을 하고 태치가 방어를 하는 모의 공중전을

상황과 위치를 바꾸어 보며 태치의 꽈배기 꼬기 비행을 몇 시간이고

시험해보았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탁월한 조종 실력의 오헤어 편대가 태치 편대의 전투기들

후미에 붙어서 격추 시켜 보고자 노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몇 시간 동안은 힘을 다한 방어와 공격이 되풀이

한 뒤 실험에 참가했던 전투기들이 착륙했다.


오헤어는 태치에게 달려와 열 띤 목소리로  축하를 하였다.

태치의 꽈배기 기동 전술은 완벽한 성공이었던 것이다.


오헤어는
"대장님! 대단한 성공입니다.

 내가 대장님 기의 후미에 붙을 때마다 나를 겨눈
 대장님 편대기의 코빼기가 옆에서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라고 말했다.


태치 중령은 그가 개발한 그의 꽈배기 전술을  실전에서

실험할 기회를 가졌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는 4기의 F4F 전투기를 이끌고

전투 비행 중에 10기의 일본 제로기들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태치의 편대기를 조종하던 R.A.M.Dibb 소위기의 후미에

한 제로기가 따라 붙었다.


Dibb 소위는 즉시 태치 중령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Dibb 소위 후방에 적기가 있음을 발견한 태치 중령은

기수를 빠르게 Dibb소위의 후미로 틀었다.


그는 Dibb소위의 뒤를 쫓아오던 일본기의 아래 후방 위치를

잡았다. 그는 즉시 발포하였다.

기총탄은 제로기의 엔진에 명중하여 제로기는 화염을 내 뿜으며

추락하였다.  


태평양에서 싸우던 미군 해군은 태치의

꽈배기 기동 전술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표준화했다.


태치의 전술은 탄생한지 얼마 안 되어 과달카날 섬의 쟁탈전을
힘겹게 벌이던 성능이 뒤 떨어진 F4F를 조종하던 미 해군은

물론 같은 전투기를 조종하던 해병대 조종사들이 실전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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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 64기 격추 기록의 사카이 사부로

일본의 격추왕 사카이 사부로의
수기를 보면 라바울에서 출격했었던
일본 해군의 공격대 지휘관이었던
베테란 조종사가 이 태치의 꽈배기
기동을 하던 미군기를 처음으로 조우해서 고전 했던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다.   


첫 공중전의 1942년 8월8일에 과달카날에 상륙하던 미군과 이를 저지하려고 하던 일본 전투기 사이에서 발생했다.



일본 해군기들이 라바울에서 까맣게 먼 최남단인 과달카날까지

장시간 날아가서 싸운 전투로서 라바울 항공대는 
미 해군 전투기들과의 격렬한 첫 합을 겨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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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상륙 - 미군 7,000명과 일본군 30,000명이 전사했던 치열한
전투가 6개월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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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투기들은 지휘했던 나카지마 다다시[中島 正]

중좌는 그때 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태치의 꽈배기 기동술에
고전을 하게 된다.


이미 이 때 태치의 꽈배기 기동은 전 해군 항공대의 표준이 된 것이다.


나카지마 중좌는 과달카날 전투 지역의 상공에 진입과 동시에
두기의 F4F 와일드캣과 격돌했다.


그는 우수한 제로기의 운동력으로 그 중 한기의 꼬리에 붙었다.

막 기관포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라 적기의 동료기가 옆에서부터

공격해 와서 적기의 격추는 커녕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급강하로

대피해야 했다.


그는 매번 미 해군기에 의한 측면 공격으로

한 기의 적기도 격추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수모에했다.


이 과달카날 전투는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의 예봉을 꺾은
미군이 시작한 반격 작전의 최초 전투였었다.


미 해군기와 첫 대결에서 일본 해군 최정예 라바울 항공대는

격추왕 사카이와 니시자와를 빼고는 아무도 전과를 올린
조종사들이 없었다.


미군기의 손실이 적었던 것은 태치의 꽈배기 기동이

상당한 기여를 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사카이는 머리를 관통당하고도 다섯 시간을
비행해서 라바울로 돌아오는 세기적인 대기록을 세운다.

이 기적 같은 생환 기록은 조만간 소개하고자 한다.

태치의 꽈배기 기동은 미 육군 항공대에서도 채택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미공군이나 해군에서도 표준 전술로
훈련되고 있다.

꽈배기 기동을 고안했던 태치 중령은 미해군에서의 40년 넘는
근무를 하고 해군 대장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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