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도라!도라!(태평양전쟁) ....5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2.05 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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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고 있는 사자의 콧털을 뽑으러 출발한 일본군...

하지만 진주만의 기습결과는 엄청났다...

진주만기습공격 항모기동부대 출발

 

1941년 11월 2일,

도조 히데키는 천황을 만나 일본이 전쟁에 돌입해야만 하는 현실을 설명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천황을 만난지 3일이지난 1941년 11월 5일,  

전쟁에 돌입한다는 결정을 정부각료들에게 전했다.

미국도 일본이 외교관들에게 보낸 전문을 해독하여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되자 야마모토는 미함대가 기지로 모두 귀환해있게될

12월 8일(날짜 변경선에 의해 미국날짜로는 12월 7일) 일요일을 공격일로 결정하였다. 

공격시간은 어둠을뚫고 은밀히 접근하였다가 목표물을

확실히 발견하고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는 아침으로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11월 25일까지 미국주재 노무라 대사가 교섭을 성공시켜

미일양국관계가 개선된다면 출동하지 않는다는 단서를달고 있었다.

그리고 출동하였지만 다시 회항할 수 있는 최후의 기일로는 27일을 정했다.

또한 만약 항해 도중 12월 6일 이전에 미국에게 발각된다면

공격을 포기하고 곧장 되돌아오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7일에 발견되면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공격할 것인가를

나구모 사령관이 결정하도록 일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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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왼쪽) 진주만 기습 항모 기동부대 지휘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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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왼쪽)진주만 공격비행대 총책임자 후치다 미츠오 중좌

 

 

 

운명의 25일, 그때까지 양국간의 교섭이 성공적으로 타결되지 못한다면

기동부대는 고속으로 항진하여 진주만을 공격하는 것이다.

25일까지라고 못박은 정부의 교섭기한은 노무라대사 자신에게는 너무나 짧은 기한이었다.

최선을다해 미국과의 교섭에 임했던 노무라 대사는 

진주만 공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도쿄에서는 1941년 11월 25일까지 교섭을 타결짓도록 명령하였으나 교섭에 난항을

겪어오던 노무라 대사는 11월 17일, 그 최종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도쿄에요청하였다.

그러자 11월 22일, 도쿄에서는 다음과같은 전문을 보내왔다.

 

"기한의 변경은 매우 곤란함.

미일 관계를 25일까지 타결하고자 하는 것은 대사가 상상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 때문임.

그러나 만약 교섭의 조인을 29일까지 종료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날까지는 기다리기로 결정하였음.

그리고 이 기일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음."

(이 전문은 미국도 방수하여 해독하였기 때문에 이미 알고있었다)

 

군령부가 정한 25일의 진짜 의미를 알지못했던 노무라는 최선을 다해 교섭에 임했다. 

이런 사정때문에 공격기동부대가 다시 회항할 수 있는 최후의 기일이 27일이었던 것이다.  

군령부는 12월 8일로 공격날짜를 결정하였고 공격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천황의 재가라는 마지막 형식적 절차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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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91식 어뢰를 얕은 수심에서 작동하도록 개조하였다.

길이 5.5m로서 핀에 합판을 결합시켰다.
기존의 어뢰로는 수심 15m에서 뇌격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나자

해군 병기창에서는 베니어 합판으로 만든 안정판을 어뢰의 뒷 부분에 부착 시켰다.

개조된 개2어뢰는 수면을 스칠 듯 저공비행하여 투하하면

수심 15m에서도 타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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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은 작전을 성공시키기위한 연구와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완벽히 성공시키기위해 모든 정열을 쏟아붓고 있었다.

해군은 훈련을통해 약3000m 정도의 상공에서 800kg의 폭탄을 투하한다면

미군 전함과 항모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추정하였다.

일본군은 전함의 36cm 포탄을 개조하여 99식 800kg폭탄을 만들었다.

출동 명령이 하달되길 손꼽아 기다리며 가고시마에서 비밀리에 기습공격훈련을

거듭하던 해군 조종사들은 얕은 수심에서도 완벽히 작동되었던 

개조 어뢰가 더 많이 생산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의 얕은 수심용으로 개발한 어뢰는 그 정확도가 우수하여

조종사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진주만에서 암약하는 스파이가 보내온 정보는

미군 함선들이 통상 2척이함께 나란히 정박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효과적으로 격침하는 방법도 연구하였으며 자신들을 요격하려 발진할지도 모르는

미국 전투기를 미리 파괴하기위해 히컴 비행장에대한 모의기습훈련도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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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기습을 성공시키기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기습의 열쇠는 철저한 보안이었다.

상대방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 불시에 공격하여야 성공할 확율이 높은 것이다.

 

드디어 공격부대의 집결명령이 하달되었다.

후치다 미츠오(淵田 美津雄)중좌가 지휘할 진주만 공격용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규슈각지의 훈련기지를 이륙하여 각자의 항모로 날아갔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훈련 항공부대인 제3연합 항공대가 날아와 빈자리를 채웠다.  

제3연합항공부대의 항공기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비행훈련을 실시하였고

이미 항모로떠난 기습부대가 그 곳에 있는 것처럼 가짜 통신을주고 받았다.

가짜통신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함대의 무전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작전에 참가하지않고 잔류 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평상 시와 같은 터치로 무전을 치도록 명령받았다.

무전사가 전신을 치는 버릇은 마치 필적과도 같아서 이것을 계속 들어본 사람이면

이것을 누가 친 것인지를 분별해낼 수 있게된다.

만약 이동하는 함대를따라 무전사가 함께 가버리고 새무전사가 전신을치게 된다면

낯선 터치때문에 만약 적이 방수를한다면 무전사의 이동을 눈치챌 수 도있다하여

이를 방지하기위한 것이었다.  

 

엄격한 보안을 적용해 작전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해군병사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무엇을 하러가는 것인지를 전혀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군복도 방한용과 열대용이 함께 지급되어 자신이 과연 

어디로 가게되는지를 아예 예측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추운 북 태평양에서 입을 두터운 옷과 하와이 부근에서 입을 얇은 옷을 동시에

지급받았으니 그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로서는 어리둥절 하기만 했을 것이다.

또한 병력이동을 감출목적으로 육상기지의 해군병사들을 가능한한 많이 외출을 내보냈다.

 

나중에 기동부대가 태평양 바다를 가로지르며 하와이로 달려가고 있을 시점에는

기습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모은 3000명의 해군교육생과 

육전대 병사들에게 이틀간의 도쿄 관광을 실시하게된다.

이들 병력들은 진주만 공격을 이틀앞둔 1941년 12월 5일에 도쿄로 상경하여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황궁을 방문한 다음 아사히 신문사를 방문한다.

그리고는 방송회관도 방문하였는데 이 것은 신문사와 방송사가

이들의 방문을 보도로 내보게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아사히 신문은

[바다의 용사 3000명 본사를 방문하다]

라는 제목으로 사진과함께 보도했다.

방송도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방문을 보도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 자유시간을 주어 거리를 활보하게하여 시민들과 외국인들은

도심 곳곳에서 해군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과연 언제 쯤 일본이 전쟁에 돌입할 것인가를 탐색하고 있던 때인 만큼

신문과 방송 보도들을 내보내 그들의 판단을 흐려놓자는 의도였다.

 

1941년 11월 17일부터 진주만 기습공격에 참가하기로 지정된 함선들이

각각의 기지를떠나 일본령 북부 츠시마(현재 러시아 영토인 크릴열도) 부근의

히토카프만(灣)으로 은밀히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인적도없고 눈과 얼음만으로 덮혀있는 츠시마 열도의 외딴 섬 에트로프 섬의

히토카프 만으로 모여든 거대한 일본 항공모함와 전함, 그리고 수 많은 구축함들이

조용히 숨죽인 채 출발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이미 일주일 전에 27척의 잠수함이 일찌감치

요코스카와 구레 항의 기지를떠나 하와이로 달려가고있었다.

잠수함들은 각자 출발하여 콰잘린 부근에서 합류한 다음,

다시 하와이제도로 항해하여 진주만이있는 오아후 섬 부근에 대기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들은 기동부대를 호위하며, 해역에 출몰하는 미국함선을 공격하도록 되어있었다.

 

이 때 야마모토에게는 심각한 고민이있었다.

하와이에 잠입한 일본 스파이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국 항공모함의 소재가 파악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유독 항모에대한 첩보가 부족하여 그 행동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기동부대 지휘관 나구모 주이치도 공격당일 진주만에 항모가 없다면

혹시 미국 항모와 기동부대가 마주치게될 것을 무척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길 바라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없었다.

 

122846754559563.jpg히토카프만에 집결한 진주만 기습 기동부대(1941년 11월23일 아카기 함상).

바로뒤에 가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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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25일. 항모 아카기에서 기습성공을위한 회식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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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교섭 타결지정 날짜인 25일까지도 미일양국교섭이 타결되지 못하자

다음날인 11월 26일 오전 6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는 

항모 기동부대 지휘관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해군중장에게

공격기동부대의 출발을 명하였다.

 

진주만을 공격할 기동부대는

6척의 항공모함(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과

2척의 전함(히에이, 기리시마), 2척의 순양함(도네, 씨쿠마)을 비롯하여

경 순양함 1척(아부구마),

구축함 9척(이소카제, 유라카제, 타니카제, 하마카제, 아라에, 카즈미, 가제로,

시라누이,아키구모), 

대형 장거리 잠수함 3척(I-19-지휘관탑승 잠수함: 대위 이마이즈미,  I-21, I-23)과 

8척의 연료보급지원함(켄요 마루, 쿄꾸토 마루, 고꾸토 마루, 신코쿠 마루,

아케보노 마루, 토오 마루, 토에이 마루, 니뽄 마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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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부대는 미국 공군 초계기의 초계 범위가 미치지못하며 항해하는 선박이 적은

북부 태평양을 고속으로 가로질러 하와이 제도로 달려가도록 계획되었다.

국가 존망이걸린 중대한 임무를받아 항을 빠져나온 기동부대는 선도 구축함을 앞세워 

계획된 항로를따라 은밀히 북 태평양의 거친 바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척의 일본 객선인 다이요 호가 이미 몇개월 전에

먼저 이항로를통해 하와이까지 간 적이 있었다.

 

 

1941년 7월 2일, 일본은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7월 24일에 인도차이나 남부로 병력이 움직이자 이미 암호해독을 통해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루즈벨트는 2일 후, 미국내 일본자산을 동결하는 조치를취했다.

그리고 일본선박에 의한 물자수송과 여객선의 운항도 중지시켰다.

이 때문에 미국항구에는 일본행 화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게 되었다.

이렇게되자 9월들어 일본이 금수조처를 완화해달라 요청하였고,

미국은 수많은 절충 끝에 일본으로부터 화물은 싣지않는다는 조건으로

3척의 객선을 미국으로 운항할 수 있게 허가 하였다.

미국은 이같은 조치가 그나마 양국간의 긴장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이미 전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던 일본은 다른 계산을 하고있었다.

 

3척의 객선 중 하나인 호화 여객선 다스다 호가 10월 15일에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23일에 호놀루루에 입항했는데 여기에는 일본해군 정보부 나카지마 미나도소좌가

타고있었다. 그는 배에 잠시 승선한 기타 총 영사와 만나 그동안 위장 스파이 모리무라가

피나는 노력으로 수집한 첩보들을 전달받고 또 다른 정보를 주문하는 등 사실상

간첩선이었다. 다음날 모리무라가 작성한 보고서를 건네받은 총 영사는 이것을

나카지마 소좌에게 전달하였고, 다스다 호는 그날 바로 호놀루루를 출항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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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에 투입된 I-15급 장거리 잠수함.

1930년대 중반에 개발되었으며 최고23노트의 속도로 태평양을 왕복할 수 있었다.

축전지를 이용한 디젤엔진 탑재. 수상기, 가미가제 소형 잠수함을 탑재할 수 있었다.

무장은 140mm포와 533mm 어뢰 17발. 

수상 23노트, 수중 8노트의 속도로 운항할 수 있다.

진주만 공격당시 일본은 총 62척의 잠수함을 보유했으며

15척의 항속거리가짧은 RO급을 제외한 나머지가 I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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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함의 후 갑판에 고정되어있는 공격용 특수 소형 잠수함

 

또 다른 객선 다이요 호는 10월 22일에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11월 1일에 호놀루루 항에 입항하였다.

이배는 미 본토까지는 가지않고 하와이만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자 이것을 의아해하는 미국에게는 단순한 배의 사정 때문이라는 해명이있었다.

 

이 배에는 3명의 해군장교가 승무원으로 위장승선했는데 이들은항공 전문가와

잠수함학교 교관, 진주만 공격 시에 특수 잠수정에탑승하기로 예정된 장교였다.

다이요 호는 일본을 출발하면서 일반 상선 항로를벗어난 훨씬 북쪽을 항해하여

하와이까지 가게되는데 그 이유는 진주만 공격부대가 이용하기로 계획된

항로를따라 이 객선이 먼저 항해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항해도중에 알류샨열도에서 출항하는 배와 소련으로 대여물자를 실어나르는

미국배들과 혹시 마주치게되는지를 살폈다.

또한 시계, 풍향, 풍속, 해상상황, 미국항공기의 초계여부등에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미드웨이 섬 북방에서는 더 더욱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만약 미국의 장거리 초계기에 다이요 호가 발견된다면 공격 기동부대는

그 보다 더 먼 항로를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 항로를 통해 오아후 섬으로부터 150km 떨어진 지점에 오기까지 

그 어떠한 배와도 마주치지도 않았고 초계기를 만난 적도 없었다.

 

다이요 호가 호놀루루 항에 도착한 것은 11월 1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으로서

이것도 치밀히 계산된 것이었다. 이들의 도착 시간은 진주만 공격 예정시간과

가까웠으며 주말이었던 것이다. 다이요 호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공격을마친

기동부대가 귀항하기로 계획한 코스를따라 항해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다른선박이나 단 한대의 초계기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이배에는 하와이에서 철수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는

447명의 일본인이 승선했는데 이들에게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하나의 객선인 히가와 호도 미국 시애틀까지 운항하며

승선한 일본군 장교가 첩보수집을했다.

군령부에서는 곧바로 이 첩보와 스파이들의 첩보를 분석하는 회의를 열었으며  

그 결과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일본은 휴일의 예고없는 기습공격에 맛을 들였나보다.

일본은 1904년 2월 9일, 구축함이 여순 항을 기습하여 정박해있던

3척의러시아 함선에 어뢰를 발사해 피해를 주었고 

그 때문에 결국 러일전쟁이 일어나게만든 전력이 있었다.

이날은 러시아의 마리아 축제일로서 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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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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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6M2 0식 함상 전투기 제로 

 

미쓰비시 사에서 초경량 알루미늄 합금 두랄루민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방탄장갑과 자동방루 식 연료탱크를 채용하지않는 대신

경쾌하고 민첩한 조종성을 얻게된다.

전쟁 초기에는 경험많고 기량이 우수한 조종사들이 미군기를 압도하였으나

전쟁 중반이후부터 강력한 무장과 튼튼한 기체를가지고 나타나게된 

미군기들에의해 불패의 신화가 깨진다.

제로기는 진주만 공격 당시에 주력 전투기로서 눈부신활약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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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히류 탑재기. 나카지마 B5N2 모델12 97식 함상 공격기 "Kate"

 

 

저익 단엽 3인승 기로서 제로기의 호위아래 진주만 공격에 나서 수평폭격으로

투하된 800kg 철갑폭탄이 미해군함선의 철판을  뚫고들어가 격파했으며

또한 어뢰를장착하여 뇌격임무에서도 대 성공을 거두었다.

 

진주만이후의 남방침공 작전에서도 보여준 폭격과 뇌격기체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일본해군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갈수록 약점이 드러나게된다.

방어력이 너무나 빈약하고 최고 속도 370km/h라는 느린 속력때문에 더 강력하고

더 빨라진 미군 신예기들의 밥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새로 개발된 B6N 텐잔에게 주력 함재기로서의 자리를 내어주고

육상에서 발진해야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잠시동안의 영광을 뒤로하고 끝내는 가미가제 기체로 사용되어 운명을 다 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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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일본이 애국심 고취를위한 대국민 선전용으로 제작한

영화의 한 장면으로 97식 함공 11형을 출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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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i(愛知) D3A1 모델11 99식 함상 폭격기 "Val"
  복엽식 폭격기를 대체하기 위해 독일로부터 수입한 하인켈 He70을 모방설계하여 1939년 재식채용된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로서 진주만 공격 때 참가하여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기습에 참여한 타 기종에비해 많은 수가 격추당하였다. 저익 단엽에 1000마력급 긴세이 엔진을 탑재하였고 인입식이아닌 고정식 랜딩기어를 가졌다. 이 때문에 독일의 슈투카와 흡사한 외형을 가지게된다. 이 기체또한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인 방탄장갑이 도외시 되었다.   베테랑급 일본군 조종사들은 99식 함폭으로 인도양에서 영국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느린속도와 취약한 방호력은 급강하 폭격 후 수평비행으로 전환하는 동안 대공포화에 노출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이어 개량형이 생산되었으나 역부족이었으며 수 많은 베테랑 조종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말기에는 대부분이 스이세이로 대체되어 육상발진기지에서 운용되었으며 가미가제 기체로 사용되는 최후를 맞이하게된다

 

 

 

6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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