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모오본 소장.
그는 1914년 중위 때 영국의 야전용 암호를 독파하였고
그 기법을 19페이지에 달하는 팜플렛에 기록 출판했었다.
이것은 미국정부로서는 최초의 암호기술 분야에 관한 간행물 발간이었다.
암호 기계의 발명에도 관심이 많았던 모오본은 항공기에서도
발 수신하는 기술을 개발한 인물이었다.
이런 모오본이 소장 계급으로서 육군 통신대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그는 본격적으로 암호 해독 조직을 강화시켰으며
SIS를 자신의 직속으로 하여 예산과 인원을 대폭 증가시켰다.
그러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SIS는 육군성 가운데
최우선적으로 예산을 할당받게 되었고 인원도 더 증가되었다.
암호에대한 사령관의 강렬한 정열이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암호해독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5월,
해군은 통신첩보 분야의 강화를위해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승무원이던
43세의 로쉬포트 소령을 하와이로 파견하였다.
이것은 하와이의 통신첩보반을 재편성하여 강화할 목적 이었다.
그의 임무는 통신첩보에 의해 일본해군의 편성과 작전을 탐색하는 일이었으며
보안을위해 전투 정보반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된다.
로쉬포트(Joseph J. Rochefort)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해군이 가장 어렵고
가장 중대한 통신에 쓰고 있는 고급 지휘관용 암호해독에 있었다.
일본해군이 약 14년 동안 쓰고있던 낡은 암호를 버리고 1940년 중반부터는
4자리의 전자암호를 사용하자 미해군은 이를 풀지못해 골머리를 앓아왔다.
거기에다 5자리의 수자에 난수를 첨가하여 복잡화시킨 암호를 JN-25-B라
명명한 미해군은 이를 풀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전투 정보반의 로쉬포트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특징을 이용해 호출부호의 대부분을
식별해내고 있었으나 일본이 12월1일을 기해 200개에 달하는 호출부호를 바꿔
남방으로 돌렸고 통신량이 증대하자 일본이 태국, 싱가폴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여전히 항모의 통신이 잡히지않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할 때 그 지원을위해 함대가 출동하였으나 항모는 본토에 머물러 있었던
전례에비춰 현재도 항모들이 본토 수역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킴멜 제독의 정보참모 레이튼도 이같은 로쉬포트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러나 혹시 항모가 본토 수역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였으나 구체적 증거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레이튼은 킴멜에게 항모에대한 정보가 없음을
보고했다가 추궁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암호해독 작업을 급속도로 발전시킨 모오본은 1941년 9월에 퇴역하였다(왼쪽).
로쉬포트(오른쪽)는 해군 조종사가 되고 싶은 막연한 꿈을가지고 1918년 해군수병으로
입대한다. 그는 정규 사관학교 출신은 아니었지만 사병에서 진급하여 장교로서
군 복무를하게된다. 워싱턴의 해군본부가 암호해독전문가를 양성하려하자
체스터 중령( Chester C. Jersey)이 로쉬포트를 추천하게된다.
퍼즐 게임을 무척 좋아했던 체스터는 전함 애리조나의 함장으로 근무할 때
마찬가지로 퍼즐 게임을 즐겼던 로쉬포트를 기억 해냈던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년간 해군 암호반에 근무한 후 어려운 일본어를
배우러 일본으로 유학하게된다. 3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반년정도의
정보부 근무 후 다시 해상근무로 복귀하였다가 하와이 제 14 해군구 통신 첩보반 반장
으로서 자신의 전문분야로 돌아오게된다. 그는 미드웨이 해전 때 일본의
공격목표를 명확히 알아냄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는 개가를 올리게된다.
1941년 12월 3일,
도쿄의 도고 외무대신이 호놀루루 총 영사앞으로 다음과 같은 비밀 전문을 보냈다.
지금으로서는 진주만의 항모, 전함, 순양함의 존재유무가 매우중요함.
전력을 다하여 매일 보고하길 바람. 그리고 상공에 방공기구가 올려졌는지,
함선 방어망이 설치되었는지도 보고바람.
외무대신은 다시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암호문의 대부분을 파기하고
암호기도 파괴하라는 전문을 띄웠다.
1941년 12월 5일.
도고 외상은 참모본부와 군사령부 대표들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대미 최후통고의 타이밍을 언제로하는가를 놓고 상의를 하였다.
1907년에 맺은 헤이그 조약 제1조에는 사전에 명료한 경고없이 전쟁을시작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전 얼마 전에 선전포고를 해야한다는 구체적 시간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전 1초 전에 포고한다해도 위반은 아닌 것이된다.
도고 외상이 대미 회답문은 최후 통고보다 한층 강경한 것이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명문화 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라고 말하자 기습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대답이었기에 환한 웃음으로 이에 동의 하였다.
도조 히데키 수상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하와이의 새벽이 워싱턴의 정오 쯤에
해당하므로 12월 7일 오후 12시 30분에 최후 통고를 하길 원했다.
그 다음날 최종 시간을 확정짓고자 하였을 때 군령부 차장 이또오 중장은
도고 외상에게 12시 30분 보다 30분 후인 오후 1시로 늦춰줄 것을 요청했다.
도고 외상이 그 이유를묻자 이또오는 작전상 기밀이라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도고가 30분 늦춰 1시로 연기하면 기습공격 시간과의 사이에 충분한 여유가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거듭물었다. 이에 이또오는 우리로서는 외무성이 워싱턴의
우리 대사관에 너무 빠른 통고를 하지않도록 요청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이것은 기습과의 간격 시간을 최대한 좁히려는 군부의 의도였고
결과적으로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에 해당하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양국의 사태가 긴박해지자 백악관에서 회담을 가진 양국대표.
헐 국무장관(중앙) 노무라 대사(왼쪽) 구루스 특파대사(오른쪽).
일본의 속임수를 알아챈 헐은 일본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일본항공모함의 소재를 파악하지못한 미군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12월 6일 오전 10시 40분경에 영국 주재 미국대사가보낸 전문이
마닐라를 경유하여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이 전문에는 영국 항공기가 캄보디아
부근에서 2개의 일본군 선단을 발견하여 추적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레이튼 대령이 킴멜 제독에게 이 내용을 보고하자 킴멜은 태평양함대
전투부대 지휘관인 윌리엄 파이 중장에게서 의견을 들어보라 명령했다.
레이튼은 파이 중장의 기함인 캘리포니아로 급히 달려갔다.
전문을 읽어본 파이 중장은 레이튼 대령에게 일본의 남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레이튼은 일본이 남진하면서 그 측면을 내버려둔 채로 남진하지는
않을 것이며 필리핀을 공략할 것으로 보인다 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러 이야기가 오고간 끝에 파이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크고,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힘이있는 나라란 말일세"
그의 말에 참모장인 해롤드 트레인 대령도 동감을 표시했다.
이러는 동안 킴멜 제독 또한 참모들과 회의를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일 전쟁이 14시간 이내에 발생할 경우에 취해야할 수단 이라는
의제를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점의제는 진주만에 있는 함선을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할 것인가였다.
토의를 거듭한 결과 미국 태평양 함대가 진주만에 머물러 있는 한,
일본에게 그 소재가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항모들이 이미 진주만을 벗어나 출항 상태이므로 항모의 지원없이
함대가 해양으로 나가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덧붙여 킴멜 제독은 깊은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이때,
함대의 대부분이 주말에 갑자기 출항하면 반드시 일반인들에게 충격과 불안감을
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함대를 항구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였다.
킴멜 제독의 이러한 결정은 워싱턴 당국이 전쟁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 곳은 하와이 부근이 아니라 동남 아시아 일대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 이었다.
어쩌면 킴멜 제독의 이러한 결정은 현명했다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시 태평양 함대 소속의 항모 중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항공기를
공급하기위해 출항한 상태였고 렉싱턴도 미드웨이 섬에 항공기를 공급하기위해
진주만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사라토가는 수리를위해 서해안의 샌디에이고
해군기지로 항해 중이었다. 그래서 진주만에는 정규항모가 한대도 정박해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속에 혹시 태평양 함대가 일본의 기동부대가 하와이로
접근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을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출항하였다면
항공기의 도움을 받지못하는 함대로서는 진주만 내에서 공격받는것보다
훨씬 위험하며 더 피해가 컸을 수 도있기 때문이다.
킴멜 제독(중앙)이 드레이니 대령(좌)과 자신의 참모장 스미스 대령(우)과
함께 진주만 방어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모습
해군과 마찬가지로 하와이의 육군도 회의를 가지고있었다.
쇼트 장군의 참모장 월터 필립 대령은 FBI로부터 세계각지의 일본공관들이
문서들을 소각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어디인가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날 중대한 징조같다는 보고를 받게된다.
그러나 필립 대령은 그다지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이 문서들을 소각하고 있다지만 미국도
정기적으로 서류를 소각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FBI로서도 도청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극히 제한된 부서와만
정보를 공유해왔으며 제대로 깊히 파고들려하지도 않았다.
1934년에 발효된 연방통신법 제 605조는 도청과 더불어 미국과 외국간의
통신 방수도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국제 정세가 긴장상태에 놓이자
참모총장 죠지 마샬이 이점을 고려하여 묵인하는 방침을 세워 도청 및 방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FBI뿐만 아니라 군대도 마찬가지여서 육군과 해군간에도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보들은 제대로 검토되지도 않고
각군이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처리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무렵 일본 총 영사관에서는 직원 두 명이 암호실에서 엄청난 분량의
서류를 빼내 구덩이에 넣어 소각시키고 있었다.
미국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렇게 의심스러운 사실들에 대해서도
크게 문제삼지 않으려하는 경향이 팽배했다.
진주만으로 항진하는 기동함대. 바로앞에 가가가 보인다(쇼가쿠 함상)
일본 구축함대
거친 북태평양을 항해 중인 기동함대를 항모 아카기에서 찍은 사진.
왼쪽은 가가 오른쪽은 쇼가쿠
나구모의 기동부대는 이미 하와이에서 약 900km정도 떨어진 곳까지 도달해있었다.
나구모는 여태까지 단 한대의 초계기도 만나지않는 행운을 누리며
거친파도와 어둠을 뚫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호놀루루 총 영사관에서
보내온 전문은 진주만의 방어가 아주 허술하다는 것이어서 이들을 기쁘게하였다.
그러나 나구모에게 있어서 바로 이 때가 가장 피말리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적국 깊숙히 들어와 공격목표와 가까운 곳에서 마지막 연료 보급을 받기위해
전 함대의 속도를 떨어뜨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때 적국에 포착된다면
큰 손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나구모는 엄중 경계 지시를 내렸다.
진주만 기습안이 정식으로 채택되었을 때 야마모토를 비롯한 공격 기획자들은
과연 거친 해상에서 여러번 있게될 연료보급이 원활히 이루어 질지를 걱정했었다.
이러한 걱정은 일본해군에게는 해상급유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때문 이었다.
해군은 진주만 공격의 성공은 완벽한 기습과 해상에서의 완벽한 연료보급 이 두가지를
그 핵심요소로 보았기 때문에 해상 연료 보급훈련을 강력하게 실시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해상은 그리 거칠지 않아
마지막 연료 보급은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나구모의 모든함선은 연료보급선으로부터 연료를 무사히 보급받고
마지막 진로를 24~26노트의 쾌속으로 달려나갔다.
연료 보급함은 공격부대에게 성공을 비는 신호를 일제히 울려주고는 작전을 마치고
귀항길에 오르게될 공격부대를 만나기로 예정된 지점으로 침로를 바꾸었다.
공격부대는 진주만을 공격한 후 보급선을만나 재 보급을 받게되어 있었다.
필승을위해 러일전쟁당시 동해전투에서 싸웠던 기함에 달려있던 기를
나구모의 기동함대가 달고 있었다.
기동함대에 야마모토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부터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있다. 분골쇄신하여 각원이 그 임무를 완수하라"는
훈시전보가 들어왔다. 이 전보를 전해들은 각 함선에서는 만세소리가 울려나왔다.
진주만 공격 하루전날밤 10시 40분경에 기동부대에는 군령부로부터
격려와함께 호놀루루 시가는 평온하며 등화관제가 없다는 전문을 수신받았다
일본군 잠수함 I-69
잠망경으로 해상을 살피는 사령탑의 모습
기동함대보다 며칠먼저 하와이 해상에 도착하였던 특별 공격부대의 잠수함들이
진주만으로부터 약 90km정도 떨어진 곳의 수면으로 부상하였다.
시계는 좋았으나 파도는 조금 거칠게 일고있었다. 새벽바다로 조용히 부상한
잠수함 승무원들은 다이아몬드 헤드의 등대와 진주만입구의 등대를 조심스럽게
바라다 보며 기동부대의 공격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수함 전대는 기동부대가 미국함선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공격도 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아두고있었다.
진주만 공격에 참가한 일본잠수함은 모두 30척으로 구성된 제6잠수함 전대 소속으로서
한척당 두명이 탑승하는 5척의 소형 공격용 잠수함을 탑재하고 있었다.
소형 잠수함은 모함에서 분리된 다음 진주만 내로 잠입하였다가 일본기의 공격이
개시되면 2발의 어뢰로 미함대를 공격하는 임무를받았다.
이것은 만 내에 몰래 잠입해있다가 미군의 시선이 항공기의 공격에만 쏠려있을 때
함선을 공격하여 그 효과를 드높이기위한 양동작전용이었다.
소형 잠수함은 밤사이에 이미 모함에서 분리되어 진주만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들은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가미가제였으며
승무원 자신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소형 잠수함공격은 야마모토가 기획하였지만 주위의 반대가 심했었다.
공격 효과도 별 없을 뿐더러 만약 공격 전에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기습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잠수함 중 I-74는 공격 전날밤, 먼 해상에서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과
그 기동부대를 발견하였으나 공격금지 명령을지켜 이들을 감시만 하였다.
렉싱턴은 미드웨이에보낼 항공기를 탑재하고 12월 5일에 진주만을 출항하여
미드웨이로 향하던 중 발견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군은 알지못하였지만
항모 엔터프라이즈도 웨이크 섬에 항공기를 내려주고 공격 개시 당일에는
하와이 부근 먼 해상에서 진주만을 향해 항진해 오고있는 중 이었다.
어뢰 발사관실
조용한 휴일의 아침~~
하늘은 온통 일본전투기들로 휩싸였다..
그러나...
8편에서 계속....
비행교육연수때문에 출장을 갔다 오니라...
자료가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